소설리스트

작별을 앞둔 용사 파티가 내게 집착한다-184화 (184/217)

"...자의로 온 건 아니죠?"

"네..."

나는 내 앞에 선 귀족 여자와, 떨떠름한 얼굴로 서로를 마주 보고 있었다.

"혹시나 해서 말하는 건데, 우리 구면이죠? 전에 한 번 봤던 것 같은데."

"맞습니다. 그, 그때는 제가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그냥 충성심에 눈이 멀어서..."

내가 아는 사람이었다. 구체적으로는, 수도에 막 돌아왔을 때 가볍게 싸웠던 사람이었다.

그리 오래된 일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아련한 과거처럼 느껴졌다. 너무 많은 일들이 있었다.

"정말로, 진짜로 용사라는 생각은 하지 못해서 그만..."

"됐어요. 그럴 수 있죠. 원래 기사가 아니었나요?"

용사의 힘을 얻기 전의 나도, 조잡한 검술로 무너뜨릴 수 있을 만한 사람이었다.

"그때는 기사라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아니었죠. 용사님에게 지고 나서 느꼈어요."

그녀는 양손을 조심스레 펼쳐 보였다.

"사람들이 나를 기사라고 해 주는 건, 그냥 명문가의 여자가 자신을 기사라고 불러 달라고 해서 그래 주었다는 것뿐이었다는 걸요."

"...그럴 수 있죠."

그녀에게 화를 낼 힘은 남아 있지 않았다. 찾아야 할 것이 많았고, 해야 할 일은 너무나도 많았다.

"다시 귀족 영애가 되기로 했어요. 저는 기사처럼 노력할 끈기도, 재능도 마음가짐도 없었으니까요."

거짓말을 할 생각은 없었다. 그럴 필요도 느끼지 못했다.

포기하고 자신의 자리로 돌아온 그녀를 욕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때야 나도 워낙 불안정했으니 울분이 치솟았지만, 이제 와서 복수하겠다고 달려들 만큼 화가 남아 있지도 않았다.

"하지만 용사님. 그때는... 이 정도로 강하시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그때는 아직 용사가 아니었습니다."

어쩌면, 나는 아직도 용사가 아닌 걸지도 모른다. 이 빛이 절대적인 증거라고 볼 수는 없겠지만, 용사의 힘은 도통 내게 손을 내어주지 않았으니까.

노력할 끈기가 없는 것, 재능과 마음가짐이 없는 것. 꼭 그녀만의 일은 아닐지도 모른다.

"아하."

다시 침묵이 이어졌다. 그녀와 나 사이에, 달갑게 할 만한 이야기는 없었다.

"제국이 혼란스러워지고 있어요. 용사님이 누군가를 지지해 주신다면, 큰 도움이 될 거예요."

"추천해야 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녀의 표정이 순간 밝아졌지만, 내 말뜻을 깨달았는지 금세 어두워졌다.

귀족 영애로 사는 삶을 선택한 순간, 그녀는 가문의 일부가 된다.

개인적인 호오를 떠나, 가주가 정한 황족을 지지하지 않는 것은 가문에 대한 반란이었다. 한 번 포기한 그녀에게, 그걸 저지를 만한 용기가 있을 리 없었다.

"프란츠 황자님이..."

"죄송합니다. 누군가를 지지할 생각은 없습니다."

어쩌면, 이것마저도 도피일지 모른다.

정말로 내가 제국의 시민들을 위하고, 무고한 생명이 사라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면 움직여야 한다.

내가 황제가 되거나, 그게 정 싫으면 아무나 한 명 붙잡고 황제로 만든 다음 나중에 그를 감시하는 방법도 있었다.

나는 책임지고 싶지 않은 것이다. 도망치고 싶은 것이다.

내가 누군가를 황제로 뽑아 주게 된다면, 그가 저지르는 모든 실정과 악행 뒤에 내 선택을 두는 것과 다름없으니까.

"그렇군요. 혹시, 이미 마음을 정한..."

"아니요. 여기 온 귀족 영애가 당신뿐인 것은 아닙니다. 전부 돌려보냈고요."

황족이 직접 내게 찾아올 때도 있었고, 귀족가의 거물이나 아름다운 여자가 찾아온 적도 많았다.

나는, 그들을 모두 돌려보냈다.

"미안해요."

그녀를 돌려보낸 뒤, 나는 책상에 놓인 수북한 종이 뭉치들을 다시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찢겨나간 종이에는, 거친 펜으로 적힌 메모들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다시 저 속에 들어가는 것이 두려웠다. 나는, 한 발짝 떨어진 채 멍하니 내가 쓴 메모들을 바라보았다.

-엘레노어는 변했다. 제국에 대한 충성심은 더 이상 그녀에게 필수적인 것이 아니다.

-파시어는 변했다. 영생에 대한 희망은 무의미해졌으며, 그녀는 스스로 그걸 포기했다.

-셀리아도 마찬가지다. 나를 보며 항상 느꼈던 불안감과 공포심, 죄악감에 빠져 있는 대신, 그녀는 당당하게 나를 보며 인사할 수 있었다.

-네르웬을 움직이는 것은 더 이상 내 냄새가 아니다.

그 메모를 한참 바라본 뒤, 나는 위화감을 느꼈다. 어쩌면, 이미 알고 있었을, 그냥 내가 인정하지 않은 것뿐이었을 위화감을.

셀리아와 네르웬이라면 모를까, 적어도 엘레노어와 파시어는 '이미' 변해 있었다.

나를 돕는 건 제국을 위한 일이 아니다. 영생을 위한 일도 아니다. 파시어의 머리라면 그 과정에서 무언가 더 이득을 챙겼을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그게 효율적인 행동은 아니다.

그들과 함께 떠난 여행 동안, 나는 그들을 보지 않았다. 그저, 과거의 엘레노어, 과거의 파시어, 과거의 네르웬, 과거의 셀리아만 보고 있었을 뿐.

그들은, 그 시간 동안 내게 속죄하고 있었다. 나는 그걸 받아들일 생각이 없었고, 그 정도로 그들의 속죄가 충분한지도 확신할 수 없었지만.

적어도, 그들의 행동 기저에는 내가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 옳았다.

"그렇다면..."

나는 기억을 되새겼다. 그들의 '달라진 것처럼 보이는' 목적이 뭔지, 미친 듯이 고민했다.

직접 물어볼 수는 없었다. 그들의 행동이 나를 위한 것이라 해도, 그들은 나를 신뢰하지 않는다. 분명, 잘못된 정보를 줄 것이다.

직접 찾아내야 했다. 그들이 무엇을 행하려 하는지, 나를 위해 뭘 준비하고 있는지.

"아."

그건, 너무 뻔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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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본색을 드러냈구나, 이 사악한 사기꾼아!"

엘레노어가 차기 황제 경쟁에 참여했다는 사실은, 순식간에 수도 전체로 퍼졌다.

흔들리던 사람들이 '엘레노어'라는 이름 하나를 믿고 그녀의 기치 안에 몰려들었다. 손익 계산이 빠른 이들도, 당장 황좌에 가장 가까운 사람이 그녀라는 것을 인정했다.

몇 가지 변수만 없었더라면, 그녀는 아무렇지 않게 황좌에 올라 대관식을 치뤘을 것이다.

"프란츠를 섬기는 이들이구나."

"당연하지! 그분은 황제의 자질을 갖추신 분이다! 너 같은 배신자, 사기꾼, 창녀에 비교하는 것조차 그분에 대한 모욕이다!"

그녀 앞에 선 기사는, 주위에 부하들을 쭉 늘어놓고 황녀에 대한 폭언을 일삼았다.

상식적으로는 일어나선 안 될 일이었다. 아무리 황위 다툼이 이루어지고 있다 한들, 그녀는 황족이었다.

차라리 싸워 목을 베는 것이 정상 참작의 여지가 있을지언정, 말로 모욕하는 것은 제국의 기사에게 크나큰 불경이었다.

하지만, 그녀 앞에 선 기사도 최소한의 계산은 하고 있었다.

"창녀라... 나는 그들에 대해 잘 모르지만, 프란츠는 잘 알고 있을 것 같구나. 살을 섞은 이들만큼 서로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사람이 있겠느냐."

"비열한 년이!"

"그러는 너는, 그와 같은 창녀를 나누었느냐? 혹은, 네가 그의 창녀가 되었다고 해도 이상할 건 없겠구나. 백금 기사단은, 납치당해 그의 침소로 들어갔던 남자아이를 구출하기도 했으니."

하지만, 엘레노어는 한 마디도 지지 않았다. 진짜 황제 자리를 노린다면, 차라리 이런 자리에서는 말을 삼가는 편이 좋았다.

황족은 그 둘만 있는 것이 아니었고, 다른 이들은 이 싸움의 승패를 지켜본 다음 그들의 품격이 얼마나 땅에 떨어졌는지 입으로 떠들 테니까.

하지만, 엘레노어에게 그런 사소한 일은 관심 밖에 있었다.

"프란츠 황자님을 모욕하지 마라!"

그가 이토록 통렬하게 엘레노어를 비난할 수 있던 첫 번째 이유는, 이미 다른 황족에게 가문이 걸고 있는 기대가 너무 컸기 때문이었다.

황제로 점찍은 황족의 범죄를 억지로 묻고, 그를 위해 충성 서약을 했다. 이제 와서 엘레노어에게 꼬리를 친다 한들, 가문이 몰락을 피할 길은 없었다.

고개를 땅에 붙이고 살려 달라고 빈다면 목숨만은 부지할 수 있겠지만, 일반적인 귀족들에게 그렇게 가문의 명줄을 보존하는 것은 당당하게 죽는 것보다 더 치욕스러운 일이었다.

그럴 바에는, 그가 섬기는 황족이 황제가 된다는 전제하에 움직이는 것이 더 현명한 선택이었다.

"애초에, 네가 창녀의 자식이라는 것은 너 스스로 인정한 바가 아니더냐! 황족이 아니라!"

"그렇다만."

두 번째 이유는, 엘레노어가 그녀의 입으로 직접 그녀가 황제의 딸이 아니라고 인정했기 때문이었다.

거짓을 꾸며낼 힘조차 없다는 것처럼, 그녀는 순순히 진실을 인정했다. 모욕에 대한 처벌은 피해자가 황족일 때 적용되는 것이지, 비슷한 수준의 귀족 영애와 기사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에게 적용되는 것이 아니었다.

"오늘 네놈을 처단하고, 프란츠 황제 폐하의 기치를 더욱 드높이겠다!"

"그럴 생각인가."

그는, 엘레노어의 공적과 무력이 부풀려졌다고 믿었다.

진짜 용사 앞에서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두들겨 맞은 뒤, 싹싹 빌며 그에게 자비를 구걸했다는 소문을 듣기도 했다.

게다가, 강한 기사라 한들 여러 기사를 상대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지금 그의 옆에 있는 기사들 또한 제국에서 이름 높은 무예를 자랑했고, 한꺼번에 달려든다면 이길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이날을 위해 검에는 맹독을 발랐으며, 귀중한 아티팩트들도 아끼지 않고 가져왔다.

엘레노어가 황제 자리에 가장 가까운 인간이라는 것은, 반대로 말하면 그녀만 제칠 수 있다면 그가 섬기는 황족이 황제 자리에 가장 가까워진다는 말이기도 했다.

모든 이들이 두려워하던 정면 무력 충돌이었지만, 이 기사는 그 포문을 열 준비가 되어 있었다.

"죽어라, 창녀!"

기사가 달려들었다. 검이 허공을 갈랐다.

순식간에 피가 쏟아졌다. 그의 상반신과 하반신이 갈라졌다.

"...다음."

엘레노어는, 그 자리에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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