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이 나타났지만, 세상은 바뀌지 않았다.
황족들은 각자 책임을 넘기며, 다른 황족의 '위협적인 행동' 때문에 그들이 기사를 이끌고 나가지 못했다고 선포했다.
제국 전체가 흔들렸다. 이 혼란은, 단지 수도에 국한된 일이 아니었다.
지방의 영주들은 새 황제가 즉위하지 않는 것에 불만을 품었다. 중앙 정치에 관여하지 않은 이들에게도, 당장 숲에서 나타나는 괴물들은 적지 않은 위협이었다.
당장 한두 번 나타나는 괴물들은 영지의 병사들과 경비병들로 막아낼 수 있다 해도, 모든 싸움을 피해 없이 치룰 수는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마왕군과의 전쟁 때문에 싸울 수 있는 남자들이 부족해진 상황이었다.
상황이 괜찮은 영지에서는 마족들을 잡아 죽이며 전투 경험을 쌓은 베테랑 병사들이 다른 이들을 다독이고 이끌었지만, 그마저도 할 수 없을 만큼 많은 남자들이 희생당한 지방도 있었다.
황제 교체 과정에서 으레 일어날, 잠깐의 사고라고 생각했던 영주들은 커지는 불안감을 억지로 짓눌러야 했다.
마왕군은 훨씬 더 크고 강대했지만, 적어도 그때는 확신이 있었다.
이 제국을 오래 다스리며 신뢰를 얻은 황제가, 수많은 지역을 안전하게 수호할 것이며, 여의치 않으면 피난을 명령할 것이라는 확신이.
하지만, 지금은 지방의 영주들이 수도에 어떤 서신을 보내더라도 응답받을 수 없었다. 황제의 노신들은 답신을 보낼 여력도 없었고, 명령이나 권고를 내릴 권한도 없었다.
곧 제국군의 지원이 있을 거라는 약속도 없다. 근처에 있는 영지가 위험하니, 지원군을 보내라는 지시도 없다. 하다못해 제국이 그 지역을 지킬 수 없으니, 모든 인원을 대피시키라는 절망적인 답변조차 없다.
눈치 빠른 영주들은 친하게 지내던 주변 영주와 네트워크를 만들기 시작했다. 아무리 잡다한 괴물이라 한들, 이런 상태가 지속되면 언제 거대한 괴물 무리가 나타날지 모르는 상태였다.
두세 영지가 숲 하나를 공유하고 있는 경우도 많았고, 목숨을 걸고 그곳을 감시하는 순찰자들은 서로 정보를 나누었다. 이런 '영지들의 배타적 연합'은,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제국은 서서히 분열되고 있었다.
수도라고 괜찮은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시민들이 직접 느끼는 불안감은 더 컸다.
괴물의 공격은, 최소한 전조가 있었다. 임시 초소와 감시탑이 설치되고 있었고, 젊은 남자들은 신병으로 모집되었다.
시민들은 불안에 빠졌을지언정, 그건 '병사가 없는 상황에서' 그들이 위협에 처해 있다는 말이었다.
괴물을 죽이기 위해 불화살과 장창을 준비한, 잘 훈련된 백 단위의 병사 앞에서 괴물들은 그리 큰 위협이 되지 못했다.
적어도 그들은, 병사나 성벽 안에서 안전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제국의 시민들은 아니었다. 전면전이 일어나지는 않았지만, 자고 일어나면 누군가 암살당할 뻔했다는 흉흉한 소문이 들려왔다.
수도의 상인이나 여러 길드의 수장들은, 대부분 줄을 서고 있는 귀족이 있었다.
과거에, 그 귀족이 누구인지는 그들에게 그리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대장장이 길드의 수장이 한스 남작이 아니라 프란츠 백작에게 줄을 대고 있다 한들, 크게 달라지는 일은 없었다.
중요한 건 그들이 부당한 일을 당했을 때 정치적 영향력을 얹어 줄 수 있는 귀족이 있다는 것 하나였다.
황제와 그의 감찰관이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을 때는, 더 권세가 강한 귀족에게 붙었다 해도 부당한 일을 행할 수 없었다. 반대로, 더 약한 귀족과 안면을 텄다 한들 부당한 손해를 볼 일은 없었다.
하지만 수도의 정치적 상황이 혼란스러워지면서, 그들은 그들이 섬기고 있는 귀족이 누구의 편을 들었는지 꼼꼼하게 따져 봐야 했다.
대장장이 길드와 연관된 황족은 다른 병사들에게 들어갈 무구와 장비를 통제하려 시도했고, 재단사 길드와 연관된 황족은 그들과 적대하는 황족을 섬기는 이들에게 터무니없는 옷값을 받아내라고 지시했다.
수도의 사람들은 괴물이 아니라, 다른 인간이 자신을 죽이거나 위협하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었다. 제국의 시민들은 오랜 시간 동안 느껴보지 못한, 고통스럽고 기분 나쁜 감각이었다.
하지만, 달라진 사람은 있었다.
"황제가 되겠다."
엘레노어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말을 꺼냈다.
"그게 무슨..."
"드디어 결정하신 겁니까!"
백금 기사단의 반응은 둘로 나뉘었다. 이제 와서 왜 그런 결정을 했냐며 걱정 어린 시선을 보내는 이들이 있었고, 왜 이제야 그런 결정을 했냐며 기대감에 뛰어오른 이들이 있었다.
부단장은 전자에 속했다.
"한 가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물론."
"황제 폐하의 유언이 돌고 있습니다. 사실, 저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이지만...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라인하르트 경의 말이라면 믿지 않을 수 없습니다."
평범한 황족이나 귀족이라면, 황제의 유언을 조작할 동기가 너무나도 많다.
엘레노어는 뭐니 뭐니 해도 가장 오랜 시간 후계자로 점찍어진 사람이었고, 시민이나 병사들 사이에서는 압도적인 지지를 받고 있었다.
기사로서 세운 전공도, 개인의 무력도 다른 황족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용사 사건 때문에 흠이 생겼다고는 하나, 다른 황족들도 본격적으로 황제 자리에 가까워지게 된다면 그것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많은 실수와 악행이 드러나게 될 것이다.
가장 강한 황제 후보였으니, 견제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라인하르트는 다르다. 그가 오직 황제만 섬긴다는 것은 제국에 있는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엘레노어가 등장하기 전까지 모든 기사의 귀감이었던 그가, 엘레노어의 스승이며 여기 있는 누구보다 엘레노어와 친밀했을 그가 황제의 유언을 조작했을 리 없었다.
"사실이다."
엘레노어는 흔쾌히, '그녀가 다음 황제가 되어서는 안 된다.'라는 황제의 유언을 긍정했다.
"그건..."
기사들도 그 소문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그 소문을 퍼트리는 메신저들의 신뢰성이 적을 뿐, 숨겨질 만한 유언도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그녀가 황제가 되겠다고 말한 뒤에 그 소문을 긍정하는 건 그들이 예상하지 못한 전개였다.
엘레노어의 충심이 얼마나 깊은지, 효심이 두터운지 여기 있는 모두가 알고 있었으니까.
"그, 그래도 어쩔 수 없지 않겠습니까! 제국은 혼란에 빠졌고, 황족 중 가장 황제에 어울리는 분은 엘레노어 황녀 전하십니다."
하지만, 황제의 유언을 거부하는 이들도 있었다.
제국의 미래가 불투명하다는 것은, 여기 있는 모든 사람이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들은 엘레노어의 힘을 믿었다.
"벌써 지방 영지에서는 괴물 문제가 심각해지고 있습니다. 수도에서야 워낙 수비대가 많으니 그런 문제는 없지만..."
"그렇구나."
다른 이들은 사태의 심각성을 토해내며 그녀를 변호하고 있었지만, 정작 엘레노어의 태도는 지나칠 정도로 무덤덤했다.
"그래도, 얼마 전에 용이 나타나지 않았습니까? 황가의 가호와 꼭 관련 없는 일이라고 말하기도 어려울 것입니다."
"그 용과 황가의 가호는 관련이 없다. 나도 마찬가지고."
"...네?"
기사들은 엘레노어의 말에서 두 번 놀랐다. 용과 황가의 가호가 무관하다고 단정 짓는 그녀의 태도에서도 놀랐지만, 진짜 그들이 두려워하고 있는 것은 그 다음에 이어진 말이었다.
"나는 황제 폐하의 딸이 아니다. 굳이 따지자면... 그분을 제외한 모두를 속인 양녀라고 해야 할까. 어쨌든, 황가의 가호와는 무관하다. 내가 황제가 되어도 괴물들은 나타나겠지."
거짓을 말할 힘마저 남아 있지 않았다는 것처럼, 엘레노어는 아무렇지 않게 진실을 토해냈다.
"그걸 우리에게 속이신 겁니까!"
"나도 황제 폐하께서 승하하시기 전까지는 모르고 있었다."
백금 기사단은 혼란에 빠졌다. 입을 떡 벌린 채 경악을 금치 못하는 사람이 있었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들의 단장을 노려보는 사람이 있었다.
그 중심에 있는 엘레노어는, 그저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은 채 차갑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렇다면, 왜 황제의 자리에..."
"내가 그 짐을 짊어질 필요가 생겼으니까."
소란이 더욱 커졌다. 부단장은 어떻게든 이 상황을 무마하려 했다.
하지만, 그도 의구심을 숨길 수는 없었다.
"그, 그래도 제국이 내전에 빠지는 것보다는, 괴물의 습격을 받는 게..."
부단장이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한 기사가 앉아 있던 의자가 거칠게 뒤로 쓰러졌다.
"말이 안 되지 않습니까!"
혈기 넘치는 기사 하나가 앞으로 나와, 그녀에게 검을 겨누었다.
"인정하겠습니다. 당신이 우리 모두를 속이고 있었던 것도, 이제 와서 황제 자리에 욕심을 부리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인정하겠습니다. 하지만, 그래 놓고서 아무 일 아니라는 것처럼 담담하게..."
"미안하다."
엘레노어는 너무 쉽게 고개를 숙였다.
"저희도 인간입니다. 이번에, 기사단이 황녀 전하를 돕지 않으면 어떻게 하시려고 하는 겁니까!"
"돕지 않아도 좋다. 오히려, 돕지 않았으면 좋겠다. 황제 자리에 깊은 뜻이 있는 건 아니니, 길어지면 나와 함께 화를 입게 될 거다."
"아무리 황녀 전하라도, 혼자서 황제의 자리에 오를 수는..."
"있다."
엘레노어의 눈은, 한 치의 의심도 없이 차갑고도 고요하게 타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