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르겠다.
파시어를 봤을 때와 똑같은 기분이었다. 내가 알고 있었던, '당연히 이런 행동을 하겠지.'라고 생각했던 엘레노어가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포기했을 거라 생각했다. 그녀가 그 자리를 원했다면, 지금보다는 훨씬 빨리 움직였을 것이다.
왜 그녀가 이런 일을 한 건지 모르겠다. 왜 지금 이 말을 꺼냈는지도 모르겠다.
"그건..."
"단순한 소거법에 불과합니다. 당신이 그렇게까지... 지지 않아도 상관없는 짐을 짊어지려 한다면, 그걸 뺏어 드는 것도 방법이겠지요."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자연스레 두려워하게 된다. 엘레노어의 차가운 목소리를 이해할 수 없는 나는, 그녀에게서 공포를 느꼈다.
"그건 안 될 말이다!"
지치지도 않은 건지, 라인하르트가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너는 내 제자다. 가장 훌륭하고 위대했던, 나를 뛰어넘은 유일한 제자다! 나 개인으로서는 너에 대해 한 치의 의심도 하지 않는다. 기사로, 기사단장으로, 황제로! 조금의 부족함도 없다고 장담할 수 있다!"
그라고 해서 멀쩡한 상태는 아니었다. 사실상, 내가 개입하기 전에는 용을 상대할 만한 실력이 되는 유일한 기사였을 테니까.
치명적인 피해를 입지는 않았지만, 그게 몸이 멀쩡하다는 소리는 아니었다. 이곳저곳에 긁힌 상처와 다친 상처가 있었고, 늙은 몸은 서 있기도 힘들다는 듯이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 무엇보다 황제 폐하께 충성을 바쳤다! 그분의 유언은 네가 황제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고, 나는 그걸 따를 뿐이다! 비록..."
늙은 기사의 눈이 애처로운 듯 나를 바라보았다.
"그분께서 내게 모든 진실을 알려준 것도 아니고, 나를... 온전히 신의로 대한 것이 아니라 해도 달라지는 건 없다."
몸은 떨리고 있을지언정, 그의 정신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를 만난 건 단 두 번에 불과했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라인하르트는 흠 없는 기사였다.
"스승님. 예나 지금이나, 저는 당신을 존경합니다. 검을 다루는 재주가 조금 늘었고, 더 젊은 육신으로 빠른 검을 휘두른다 한들, 저는 한 번도 당신을 넘어섰다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엘레노어는 그녀의 스승에게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그녀의 눈은 차갑게 타오르고 있었다.
"그렇다 한들, 이건 제 의사입니다. 제가 제 거취를 어떻게 할지는 제가 정합니다. 양보할 생각은 없습니다."
내 말을 듣자마자 결정한 몇 초짜리 결심에 불과할 텐데, 그녀는 마치 황제가 되는 것이 평생의 숙원이라는 것처럼 단호한 태도로 그녀의 스승을 노려보았다.
"엘레노어..."
이전의 감정을 잃어버린 것 같지는 않았다. 그것보다는, 깎아낸 것 같았다.
제국을 위해 헌신하던 엘레노어, 스승과 친구를 위해 일하던 엘레노어, 항상 모두에게 신뢰받는 기사 엘레노어가 깎여나가 있었다.
"..."
어쩌면, 이게 처음이 아닐지도 몰랐다. '용사 엘레노어'를 위해 그녀가 무언가를 깎아냈을 거라는 생각은, 너무나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예측이었으니까.
"그러니, 걱정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특히 에네렐, 그대는."
감정이 옅어져 있다.
내게 반말을 쓸 때까지만 해도, 그녀의 말에는 감정이 섞여 있었다. 미안함과, 어찌할 줄 모르겠다는 불안함 같은 것들이.
하지만, 지금 그녀의 목소리에는 불안도, 혼란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해야 할 일을 하고 있다는 단호함과 확신만 남아 있을 뿐.
"무슨 일이 일어난다 해도, 제가 당신을 돌려보낼 테니까요."
엘레노어의 눈이 차갑게 타올랐다.
/////
"쉬, 쉬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괜찮아요. 뭘 이정도 가지고..."
기적적으로 사망자는 나오지 않았지만, 피해가 없는 건 아니었다.
공터라지만, 용이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나온 흔적을 메워야 했으니까.
몇몇 마법사들이 나와, 떨어진 용의 비늘이나 흩뿌려진 피를 조사하고 있었다.
그들을 보는 시선이 곱지는 않았다. 용이 수도를 부수는 상황에서는 숨어 있다가, 은근슬쩍 기어나와 연구용 재료를 채취하는 스캐빈저로 보였을 테니까.
하지만, 결국 그들의 도움이 필요했다. 어떤 용인지, 어떻게 등장하고 얼마나 강한지를 파악하지 않으면 앞으로 일어날 일을 막을 수 없었으니까.
약한 용을 물리치고 방심했다가, 며칠 뒤 그 어미가 나타나 도시를 초토화시켰다는 이야기는 흔히 들을 수 있는 이야기였다.
"...어떻습니까?"
게다가, 이 마법사는 어떻게 봐도 싸움에 능숙해 보이지는 않았다.
마법사의 스펙트럼은 넓고, 그들 중 대부분은 전투를 위해 마법을 배운 게 아니라 연구와 탐구를 위해 마법을 배운 이들이었다.
이런 사람이 전투에 참여한다고 해 봐야, 그저 지켜야 할 짐이 늘어나는 정도일 것이다.
"그게... 일단, 우리가 알던 용은 아닌 것 같습니다. 혈액이 드라코니안 액체에 강렬한 거부 반응을 보이는데, 지금까지 이런 용은 없었어요. 고대의 기록을 확인해 봐도, 굉장히 이례적이고 특별한 경우입니다."
"...네?"
"그, 도마뱀과 인간이 섞인 듯한 형태를 하고 있는 종족, 드라코니안에 대해서는 알고 계십니까?"
"아니요. 들어는 본 거 같은데..."
"그럴 만합니다. 용사님은 이 세계에 살아온 지 얼마 안 되셨고, 제국 토박이들도 잘 모르는 이들이 많으니까요. 대부분은 밀림 지역에서 서식하는 이들인데, 종족학에 관심이 있는 학자나 마법사들이 아니면 잘 모르는 이들입니다."
정보량이 너무 많았다. 내 떨떠름한 표정을 알아챘는지, 그는 옅은 웃음을 흘렸다.
"핵심만 말하자면, 그들의 피와 용의 피는 반드시 유화적인 반응을 보여줍니다. 이건, 그 종족이 용과 관련이 있다는 증거로 활용되기도 했지요."
"그래서요?"
"하지만, 이 피는 좀 다릅니다. 마치 처음부터 다른 생물인 것처럼, 완전히 다른 반응을 보여주고 있어요. 솔직히 말하자면, 용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의구심이 피어올랐다. 확실히, 그건 용이라기에는 지나칠 정도로 약했다.
상식적으로, 진심을 다해 사람을 죽이려 했다면 사상자가 없을 수가 없다. 내가 전력을 드러내도 쫓아내기는커녕, 대등하게 싸우는 것조차 힘들었어야 했다.
"그렇다면, 용이 아니라는 겁니까?"
"아닙니다. 그것 말고 다른 점에서는, 철저히 용과 같은 성향을 보여주었으니까요."
"음..."
"드라코니안의 피와 반발했다고는 하지만, 아예 관련이 없는 생물이었다면 이보다 훨씬 더 격렬한 반응을 보이거나, 아예 반응을 보이지 않았을 겁니다. 관련은 있지만, 다르다. 뭐 이런 정도로도 볼 수 있겠군요."
"다른 겁니까..."
"자연적인 형상은 아닙니다. 용은 희귀한 생물이고, 오지에서 저희가 알지 못하는 새로운 용이 태어났다 한들... 수도까지 오는 동안 어디선가 들켰을 겁니다."
일리가 있었다. 저 크기의 괴물이 날개를 편 채 날아다닌다면, 목격자가 없을 수가 없었다.
몸이 검은색이니 밤에만 날아다녔다면 들키지 않을 수도 있었지만, 용이 무슨 암살자도 아니고 사람의 시선을 피할 거라 생각하기는 어려웠다.
"목격자들의 말에 의하면, 땅 밑에서 솟아올랐다고... 그리고, 수도에서 거대한 마법진이 발동된 일도 있잖습니까?"
"그것도 생각하고 있습니다. 땅 밑에서 솟아올랐다는 것은, 용이 땅 밑으로 들어갔다는 것. 흔적을 찾아보고 있지만, 거대한 공간이 발견되었을 뿐 용이 들어갈 만한 통로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흠..."
"단순히 소환되어 나온 마법 생물체라면, 지금쯤 어디론가 사라졌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피가 지금까지 남아 있는 걸로 보아... 그걸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하지만, 내게 제일 중요한 정보는 따로 있었다.
"그 용, 마룡입니까?"
마법사는 안색을 찌푸렸다.
"아직은... 아직은 한참 부족합니다. 시간이 더 있으면 분명 마룡으로 자라날 것 같긴 합니다만... 핵심적인 무언가가 부족합니다."
"네?"
"마룡을 만드는 것은 마기가 깃든 행동입니다. 단순히 재화를 모으거나 먹기 위해 인간을 죽이는 것 정도로는 어림도 없습니다."
"그건..."
"정말 말도 안 될 정도로 수많은 사람을 죽이거나, 고귀하거나 신성한 사람을 죽이거나, 사람을 찢어 놓고 고문하거나... 그런 악행을 저지른 다음에야, 그 심장에 마기가 고루고루 깃들어 마룡이 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건 왜..."
"고마워요. 개인적인 이유니까, 신경 안 쓰셔도 괜찮아요."
혹시나 귀환에 사용할 수 있지 않을까 고민했지만, 그런 작업이 필요하다면 어쩔 수 없었다.
그래도, 용을 처음 봤을 때 가슴이 뛰던 건 어쩔 수 없었다. 실마리도 보이지 않던 마룡이, 좀 부족하다고는 해도 바로 내 눈앞에 나타났으니까.
하지만, 뭔가 이상했다.
용의 등장은 분명 변수다. 아무도 예측하지 못할 변수여야 했다.
하지만, 엘레노어는 너무 당당했다. 내가 돌아가는 게 당연한 것처럼, 심지어는 그게 얼마 남지 않은 것처럼 자연스럽게 내가 돌아갈 거라고 말했다.
그리고, 용의 등장이 마법사와 관련되어 있다면, 이런 거대한 마법을 실현시킬 사람은 하나밖에 없다.
"파시어..."
나는 분명 그녀를 죽였다. 하지만, 모든 마법에 시전자의 존재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새로운 것을 찾고 또 찾아도, 정보는 계속 부족했다. 나는 마지막으로 나를 바라보던 엘레노어의 표정을 떠올렸다.
정신을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할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