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겼다!!!"
경비대들 사이에서 환호의 함성이 터져 나왔다. 시간이 조금 지났는데도, 그들은 피로에 쓰러지거나 상처에 아파하는 대신 승리에 환호의 함성을 지르고 있었다.
누구보다 기뻐할 사람은 나라고 생각했지만, 그런 나마저도 저 사람들의 들뜬 분위기에 적응할 수 없을 정도였다.
"새끼들아, 목소리가 작다! 우리 용사님께서 섭섭해하시겠다! 용사님 만세!"
"만세!!!"
그걸 좀 말려 줄 거라 기대했던 경비대장과 라인하르트마저, 그 함성을 말리기는커녕 더 부추기고 있었다.
정신이 바짝 들었다. 여기에 제정신을 차린 사람은 나밖에 없는 것 같았다.
"이, 일단, 부상자나 사망자부터..."
"사망자? 우리 쪽에는 한 명도 없소. 경비대장. 그대의 부하들은 어떻소?"
라인하르트는 바로 인원을 파악했다. 황실 기사들이야 수가 그리 많지 않은 최정예 요원들이었으니, 한 명도 죽지 않았다 해도 이상할 게 없었다.
"이쪽도... 마찬가지요. 몇 놈 비는 거 같긴 한데, 용이 누굴 잡아먹지는 않았잖소? 찾아보면 나오겠지."
"설마..."
그러고 보면, 주위에 끔찍한 몰골을 한 시체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경비대의 횃불 하나를 빌려 들고 바닥을 살피던 나는, 평온한 모습으로 누워 있는 병사 한 명을 찾을 수 있었다.
나는, 숙연한 감정으로 그에게 다가갔다.
용이 날뛰었다. 그것도 꽤 오래.
피해가 없을 수는 없다. 조금만 더 빨리 왔으면, 이 사람을 살릴 수 있을지도 몰랐다는 후회가 머릿속을 맴돌았다.
눈에 띄는 상처는 없었지만, 사람이 죽는 데 상·하체가 뒤틀리고 심장에 칼이 박히는 치명적인 상처가 필요하지는 않다.
그저, 조금 높은 곳에서 추락하거나 저 용의 마기에 휩쓸리는 것만으로도 사람은 죽을 수 있다.
생명이 사라질 수 있다. 이미 아는, 모를 리 없는 이야기였지만 그 사실이 내 가슴을 조여 왔다.
상처 하나 없이 평온한 얼굴은, 지금 당장이라도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일어날 것만 같다. 내게 소중한 사람은 아니었고, 어쩌다 경비대에서 한 번 봤을지도 모르는 지나가는 사람일 뿐인데.
그래도, 지금 당장이라도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일어날 것처럼, 평온한 숨소리가 귀에 들리는 것 같아서.
"...평온한 숨소리?"
내 착각이라 생각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너무 '그냥' 숨소리 같다.
"저, 아저씨? 일어나 보세요. 아저씨?"
쓰러진 병사를 툭툭 건드려 보자, 그는 몸을 뒤척였다.
"으으..."
"...살아 있네요?"
어렵사리 눈을 떠 내 얼굴을 확인한 그는, 소스라치며 놀라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요, 용사님! 제가 진짜 자려던 게 아니라... 그보다, 용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제 동료들은!"
라인하르트가 짓궂은 웃음을 지으며 다가왔다. 거짓말처럼 쓰러진 병사 앞에서 표정을 바꾼 그는, 근엄한 표정으로 그에게 말했다.
"자네는 정신을 잃고, 숨겨진 힘을 방출했어. 여기 있는 누구보다 용맹하게 싸워, 결국 용을 쫓아냈지."
조곤조곤한 목소리와 고양에 젖어 있으면서도 냉정하게 상황을 설명하는 것 같은 태도까지. 연기가 꽤 악질적이었다.
"그, 그게 정말입니까? 그럴 리가 없는데..."
"당연히 아니지! 용은 저기 계신 용사님이 쫓아내 주셨네. 언젠가 다시 돌아올지도 모르지만, 한 번 혼쭐이 났으니 당분간은 어디 산에라도 틀어박힐 거야."
"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그는 내게 연신 고개를 숙이며 감사를 표했다. 나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라인하르트를 바라보았다.
"진짜... 없는 겁니까? 아무도?"
사람이 한 명이라도 죽은 순간, 용의 침공을 웃음거리로 만들 수는 없다. 그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는 건 아니었지만, 적어도 그 엘레노어의 스승이다.
농담을 해도 될 때와 하지 말아야 할 때를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처럼 생각되지는 않았다.
"방금 막 인원 파악이 끝났네. 경비대도, 수도 방위군도 마찬가지야. 한 명의 사망자도 없어."
"말도 안 돼..."
하다못해 용이 아니라 오크 무리가 기어 나와도 죽는 사람이 한두 명은 생길 것이다. 그냥 달려들어 물고 찢기만 하면 사람이 죽는다.
그냥 그 거대한 몸뚱이를 사람이 많은 곳에 굴리기만 해도 죽고, 꼬리를 들어 내리치거나 숨결을 뿜어내면 인간은 죽는다.
죽지 않을 리가 없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이렇게 오래 싸웠는데, 희생자가 나오지 않을 리 없다.
내가 붙은 다음부터는 나오지 않을 수 있었다. 용의 관심이 오롯이 내게 집중되고, 빈틈을 라인하르트와 황실 기사가 메워 주며, 다른 병사들이 멀리서 석궁과 화살을 쏘는 정도의 지원만 해 주는 상황에서는 그럴 수 있었다.
하지만, 이들의 싸움이 그렇게 짧지 않았다. 분명 내가 들어오기 전부터 경비대는 용과 교전하고 있었고, 얘기를 들어보니 황실 기사가 바로 도착한 것도 아닌 모양이었다.
"이상하네..."
"뭐, 사람이 살아 있다고 해서 나쁠 건 없지 않습니까. 이것도 여신의 도우심 아니겠습니까?"
라인하르트는 너털웃음을 지으며 '신의 도움'에 대해 말했지만, 나는 그 여신이 지금 어떤 상황인지 알고 있었다.
"그게 가능할 것 같지는 않은데... 그래도, 천만다행이네요."
"역시, 황제 폐하께서 후계자로 지목하신 분입니다. 용과 싸워 이겨냈다는 신화적 위업을 이뤄내고도 희생자를 걱정하시다니. 이 늙은이를 부끄럽게 하시는군요."
그의 폭탄 같은 발언에, 잔뜩 달아오른 분위기가 더 뜨겁게 타올랐다.
"그, 그게 사실입니까, 용사님? 하지만 황가의 가호가..."
"바보야! 처음에 그 가호가 왜 생겨났는지도 몰라? 용사님과 제국의 시조가 맺어지면서, 신과 대지에 서약한 가호라고! 용사님이 있는 한, 가호가 사라질 일은 없어?"
"그리고 뭐, 사라지면 어때? 용도 단숨에 베어 버리는 분이 용사님인데, 그깟 괴물 따위..."
기습적이다. 나는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더듬거리는 목소리로 라인하르트에게 따졌다.
"아, 아니. 그거 여기저기 퍼져도 되는 말 맞아요?"
"정치적으로는 아니지. 그 말에 경기를 일으킬 황족 놈들이 수도에 널려 있으니. 하지만... 도의적으로 해서는 안 될 말인가, 이게? 내가 직접 들은, 수많은 증인들이 있는 황제 폐하의 유언이신데."
"읏..."
라인하르트의 묘한 미소가 나를 놀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그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내가 그걸 거절했을 뿐, 마지막까지 황제의 유언은 나를 황제로 만들라는 것이었으니까.
"그러면, 용이 수도에 나타났을 때 얼굴을 비춘 황족 계승자는 용사님밖에 없다는 것 아닙니까?"
"큭..."
믿었던 경비대장이 함박웃음을 지으며 나를 압박했다.
"됐어... 요."
사실, 의구심이 솟는 것은 사실이었다.
황제의 말을 들었을 때만 해도,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생각했다. 내가 아니라도 제국을 이어받을 황족은 많이 있었고, 정 안 되면 엘레노어가 이어받을 거라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엘레노어는 변했고, 황족들의 행동은 내 기대를 한참 저버릴 정도로 추악했다.
어쩌면, 이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그 자리에 올라야 할지도 모른다.
내 정치력에 대한 기대는 없었다. 나는 이기적이고 약한 사람이고, 분명 황제의 자리에 올랐을 때 잘못된 선택을 하고 말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그때까지 시간을 벌어 줄 수는 있다. 황제의 선택을 이해할 수 있었다.
자기 몸을 지키기 위해, 다른 황족들을 견제하기 위해 아무것도 안 할 수준의 황족들이라면, 권력에 관련이 조금이라도 있었던 존재가 후계자로 들어가자마자 내전이 일어났을 테니까.
어쩔 수 없을지도 모른다. 꼭 이들의 기대와 함성 때문은 아니었지만, 나는 결정을 내려야 할 필요를 느꼈다.
"안 됩니다."
피칠갑을 한 채 다가오고 있는 것은, 엘레노어였다.
하얀 갑옷에 붉은 물감이 번져 있었다. 그녀의 눈에서는 냉기가, 몸에 묻은 피에서는 열기가 뿜어져 나왔다.
"엘레노어! 어디서 뭘 하고 있었던 거냐! 개인적으로 오기로 했다던 백금 기사단도 오지 않았고, 대체..."
엘레노어는 손에 쥔 목 하나를 톡 던져, 그의 스승에게 보여주었다.
"황실 기사단이 전부 빠져나와 버리면, 남은 이들을 지킬 사람이 없지 않습니까."
"이건..."
"암살자들입니다. 황족들... 사이가 안 좋은 듯해도, 남은 신하들을 눈엣가시로 보는 건 다 똑같더군요."
"읏!"
황실 기사단은 최강의 기사단이지만, 상식적으로 수도에 용이 출몰하든 수도가 함락당하든 절대 전선에 서서는 안 될 이들이기도 하다.
그들의 목표는 기본적으로 황제를 지키는 것이다. 라인하르트가 독단적으로 용을 막기 위해 뛰쳐나온 것은, 황제는 죽었고 새 황제가 나오지 않았다는 틈을 이용한 것에 불과했다.
"경솔했군."
하지만, 황궁에는 임시로 정무를 보고 있는 늙은 신하들이 있었다.
그리고 황족들은, 그들을 무력으로 손에 넣었을 때 피를 흘리지 않고 황위 싸움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을 것이다.
"에네렐. 아무도 당신에게 황제 자리를 강요할 수 없습니다."
엘레노어는 칼날같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나를 보며 말을 걸었다.
"대안이 없다면... 할 수도 있지. 너도 황제 자리에는 관심이 없고, 다른 황족들도... 제대로 된 사람들은 아닌 것 같고."
"겨우 그것 때문입니까?"
"겨우라니..."
"그렇다면, 제가 하겠습니다. 황제."
마치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처럼 덤덤하게, 그녀는 황제가 되겠다고 선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