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뭘 멀뚱멀뚱 서 있는 거야! 정신 차려! 움직여라!"
경비대들은, 경악스러운 눈으로 그들의 대장을 쳐다보았다.
"지, 진심입니까? 저거랑 싸우시려고요?"
"그냥 날짐승일 뿐이다! 최전선에 있던 병사들은 이보다 훨씬 거친 놈들과 싸웠을 것이다!"
"제정신입니까? 칼이 박히지도 않을 겁니다! 애초에, 날아다니는 놈에게..."
"활과 화살, 장창을 챙겨라! 검은 비늘에 막히더라도, 창으로 찌르면 따끔한 느낌 정도는 받겠지!"
경비대장은 자신의 활을 챙겼다.
"미친 짓입니다! 기사와 마법사를 불러야 합니다. 저희가 막는 건 개죽음입니다!"
"허튼소리 하지 마! 개죽음이라고? 이 수도에서 제일 먼저 개죽음을 당해야 할 인간이 있다면, 그게 바로 우리다!"
경비대의 눈에 조금씩 힘이 들어갔다.
"저 용에게 상처를 입힐 수 있는 건 기사나 마법사겠지만, 그때까지 시간을 끌어야 한다!"
그제서야, 경비대들은 부산스레 움직이기 시작했다.
"칼과 방패는 놔두고 가! 어차피, 저 용에게는 먹히지 않아!"
"다 버리지는 말고! 그, 창고에 가 보면 사람 키만 한 방패가 몇 개 있을 거다. 전부 가져와! 만약 저 용이 브레스를 뿜어낸다면 막아낼 방법이 필요해!"
"준비된 놈들부터 모여!"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 용이 대지를 가르고 솟아오른 곳은 사람이 없는 한적한 공터였다.
저 거대한 날개를 고려하면, 순식간에 민가나 귀족들의 저택으로 움직일지도 모르지만.
하지만 치솟은 경비대의 사기는, 그들이 용에 가까워졌을 때 대부분 사라져 버렸다.
"이, 이건..."
크다. 전설 속의 용이기에 더 두려운 것도 있었지만, 그저 거대한 생물을 보았을 때 피어나는 두려움이 인간의 정신을 갉아먹었다.
인간보다 조금 큰 호랑이나 멧돼지 앞에 서는 것도 두렵기 그지없는 일이다. 하물며, 연신 거대한 포효를 토해내고 있는 용이라면 더할 나위 없었다.
"진형을 갖춰라!"
경비대장은 엉성한 경비대들의 창진을 보고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경비대의 근본은 수도의 치안 유지다.
열 명, 스무 명 정도가 작은 방진을 만드는 싸움에는 익숙했어도, 이들 모두가 한 몸처럼 움직이길 기대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지원은?"
"수도 방위군이 움직이고 있고, 라인하르트 경이 황궁의 기사들을 모아 움직이고 계십니다."
전령은 입술을 꽉 깨문 채 말을 멈췄다. 경비대장이 역정을 냈다.
"뜸 들이지 말고 빨리 말해라! 시간이 없어! 수도에 용이 출몰했는데, 겨우 그게 전부일 리가 없지 않나!"
"그게... 전부입니다."
"뭐라고?"
경비대장은 머리가 어지러워지는 것을 느꼈다.
기대했던 마법사들은 온다는 얘기도 없었고, 라인하르트와 황궁의 기사들은 물론 강력하지만 그 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무슨 일이냐! 설마, 다른 곳에서 다발적으로 침공이 일어나고 있는 거냐?"
저런 용을 소환할 만한 세력이라면, 마물 몇 놈을 불러들이는 것은 손쉽게 할 수 있을 것이다.
경비대가 가장 먼저 이곳에 도착할 수 있었던 건, 그냥 '주목받지 못해서' 였을 수도 있다는 가설이 경비대장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아... 아닙니다!"
"그렇다면 어째서!"
사태의 심각성을 알지 못할 리도 없었다. 대지를 뚫고 나와 하늘로 솟아오른 용은, 수도에 있는 모든 사람이 볼 수 있을 만큼 이목을 끌었으니까.
"화, 황족 분들이... 호위를 위해 급히 기사들을 호출하셔서..."
"젠장..."
또 정치 논리였다. 경비대장은 탄식할 수밖에 없었다.
"황제 폐하가 없는 지금, 황족이 전멸하면 국가의 안위가 위태롭다고..."
"젠장, 그걸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다고! 일단, 적을 쓰러트려야 할 것 아닌가!"
용은, 확실히 전설적인 신수다. 그 거대한 질량과 파괴적인 숨결, 단단하고 질긴 비늘과 날카로운 발톱은 사람들을 두려워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하지만,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어디 시골 마을에 용이 나타났다면 제 살길을 찾아 도망칠 수 있겠지만, 이곳은 제국의 수도다.
엄청난 무용을 지닌 기사도, 거대한 마법을 구사하는 마법사도, 기적을 일으킬 수 있는 성직자도 있었다.
아무리 용이 강하다 한들, 수도에 있는 제국 최고의 인재들과 싸우면 승리를 장담할 수 없는 생물이었다.
"호, 혼란을 틈타 서로를 암살하려 하는 놈이 있을지도 모르고, 사건의 배후에 다른 황족분들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그걸 전해주는 전령도, 그걸 듣는 경비대장도, 그런 말을 꺼낸 황족들도 알고 있을 것이다. 그게 새빨간 거짓말이고, 기만이라는 사실을.
그냥, 이런 곳에 전력을 소비하고 싶지 않을 뿐이다. 최소한의 기사들로 용을 쓰러트렸다는 명예를 얻으면 물론 좋겠지만, 정작 그 명예를 지켜 줄 기사와 세력이 없다면 명예와 전공은 아무것도 아니다.
게다가, 싸우겠다고 주장하는 황족이 있어도 제 목소리를 내기 어려운 상황이다. 그들 옆에 붙은 귀족들은 '그들이 아니면 안 되는 사람'이 아니다.
조금이라도 위험한 곳에 기사와 병사, 그들의 재산을 소모하게 만든다면, 얼마든지 그들을 저버리고 다른 황제 후보를 옹립하러 나설 것이다.
"제국의 앞날이 어둡군..."
하지만, 그들 중 누가 다음 황제에 오르더라도 시민들은 이 일을 기억할 것이다.
그리고 황제는 그들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무력 혹은 권력을 사용할 것이고, 결국 피해는 또 다른 선량한 시민이 입게 된다.
"어, 어떡하면 되겠습니까?"
"동요하지 마! 우리가 할 일은 변하지 않았다! 라인하르트 경의 지원을 기다리자!"
경비대장은 필사적으로 부하를 독려했다.
"기사단 단위의 지원은 없다 해도, 제국에는 명예로운 기사들이 많다! 우리가 여기 버티고 있으면, 그들이 나와 우릴 도울 것이다!
그의 말이 꼭 틀린 것은 아니었다. 라인하르트는 늙었다고 한들 강한 기사였으며, 그들을 따르는 기사들 역시 약하지 않았다.
하지만, 사실상 그게 전부였다. 물론 그의 말대로 경비대가 여기서 전투를 벌이고 있으면, 제국 안에 숨어 있는 많은 기사 지망생들이 나와 줄 것이다.
하지만, 기사단에 들어가지도 못한 채 명예를 찾아 떠나는 어중이떠중이들이 용에게 상처를 낼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하는 건 지나치게 희망적인 생각이었다.
드래곤 슬레이어라는 칭호에 눈이 멀어, '이 정도로 지친 용이라면 내 수준이라도...'라고 생각하는 풋내기들이 모일 테니까. 제대로 된 기사에 비교하면, 그들은 너무 나약했다.
"화, 황녀님은? 백금 기사단에는 연락을 보내 봤나?"
경비대장의 머리에 희망의 빛이 번뜩였다.
오랜 시간 자리를 비웠다 한들, 결국 제국 최강의 기사는 엘레노어였다.
그녀가 도와준다면, 다소 열세인 상황도 확실하게 뒤엎을 수 있을 것이다.
"그게... 황녀님께서는, '시간 낭비'라고..."
"뭐?"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지금 당장에야, 저 용은 거칠게 포효하며 하늘을 향해 불길을 쏘아대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언제 저 불길이 시민들을 향할지 모른다. 뿜어내는 흉흉한 기운도 만만치 않았다.
"황녀님께서 그런 말을 하실 리 없다!"
"제가... 직접 들었습니다."
경비대장은 그 말을 믿을 수 없었다. 그녀가 아직 미성년자였을 때부터, 빈민가에 구호 활동을 벌이고 범죄자들을 소탕하는 모습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으니까.
경비대장보다 훨씬 어린 사람이었지만, 그는 그녀를 존경하고 있었다.
"말도 안 돼!"
"저, 정말입니다! 하지만 다른 기사단들에게 '자발적으로 움직이는 건 상관없다.'라고 말씀하셨으니, 지원이 오긴 할 겁니다!"
"알겠다."
용이 움직였다. 한참 동안 하늘을 돌아다니고, 공터를 오가며 움직이던 용은, 황궁으로 시선을 돌린 뒤 서서히 날개를 퍼덕였다.
"전 경비대원, 사격 개시! 화살을 발사해라!"
수많은 화살이 용을 향해 날아들었다. 하지만, 용의 날개에는 흠집 하나 낼 수 없었다.
"이, 이쪽을 봤습니다!"
하지만, 시선을 끌기에는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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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들은 함께 가지 않는가."
엘레노어는, 남아 있는 기사들을 보며 조용히 물었다.
"뭐, 솔직히 용은 좀 무섭고. 이렇게 흉흉할 때는 등 따신 곳에 숨어 있는 게 제일 아니겠습니까?"
백금 기사단원 중 한 명이 우스갯소리를 꺼냈다. 아무도 그의 말을 믿지 않았다.
명예라면, 옳은 일이라면 목숨을 걸고 달려드는 이들이다. 겨우 용이 무서워서 도망칠 거라면, 애초에 여기 들어오지 말았어야 했다.
여기 남은 몇 명의 기사를 제외한 다른 이들은, 모두 용을 막기 위해 떠났다. 삼 분의 일도 되지 않는 기사들이 남아 이곳을 지키고 있었다.
"...걸리는 곳이 있는데, 혹시 모르니 함께 가 보겠느냐?"
"원래는 권유 같은 거 안 하시지 않았습니까?"
기사단의 대장으로서, 엘레노어는 언제나 단원들에게 명령했다. 이런 부드러운 말을 쓰는 그녀의 모습은, 황녀를 오래 섬긴 기사단에게도 꽤 신선한 광경이었다.
"내가 반드시 해야 할 일은... 따로 있으니까. 이건 그저... 뒷정리일 뿐이다."
용이 솟아오르는 것까지 확인한 엘레노어는, 더 이상 남아 있을 이유가 없었다.
이제 계획이 실패할 일은 없다. 마법사와 성직자를 공들여 뽑았고, 필요한 것도 모두 갖춰졌다.
용도를 모두 소진하고, 껍데기만 남은 그녀만 남아 있었다.
엘레노어는, 이 껍데기마저 남지 않기를 바랐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