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의 다 끝났다. 몇 시간 동안의 추격전 끝에, 나는 대부분의 괴물들을 처리할 수 있었다.
"마지막인가..."
거대한 지진처럼 대지를 울리던 발소리는, 이제 길거리를 뛰어다니는 고양이 소리 정도로 줄어들었다.
힘을 짜내 속도를 높이자, 시야에 괴물 몇 마리가 들어왔다. 그들도 나름 죽을힘을 다해 뛰고 있는 것 같았지만, 나보다도 더 많이 지쳐 있는 것 같았다.
앞서 뛰어가던 괴물은, 단숨에 쓰러져 버렸다. 나를 피해 달려가던 관성 때문에, 몇 미터 정도 더 나아가 꼴사납게 흙바닥을 굴렀다.
"어?"
하지만, 나는 아직 검을 휘두르지 않았다. 어딘가에 걸려 넘어졌을지도 모르지만, 그놈의 시체를 본 나는 그 가능성을 접어두었다.
그놈 앞에 도망치던 괴물들도 하나하나 고꾸라졌다. 나는 터벅터벅 앞으로 걸어갔다.
죽은 괴물의 몸에 박힌 화살은, 너무나도 익숙한 생김새를 가지고 있었다.
"네르웬?"
그녀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 엘프 궁수의 실력을 생각하면, 내 생각보다 훨씬 먼 곳에서 화살을 쐈다 해도 이상할 건 없었다.
그래도, 그녀는 나를 봤을 것이다. 기척을 느끼든 직접 두 눈으로 보든, 내 존재를 눈치챘을 것이다.
나와 마주치고 싶지 않은 걸까.
잠깐 머뭇거린 나는, 결국 소리를 쳐 그녀를 불렀다.
"나와. 얼굴 한번 보자고."
잠시 침묵이 흘렀다. 짐승도 괴물도 없이 고요해진 숲에, 나뭇잎이 바람에 흔들거리는 소리만 아른거렸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더 기다리자, 미세한 발걸음 소리가 땅을 타고 전해졌다.
"에네렐..."
쭈뼛거리는 태도가 그녀답지 않았다. 활을 잡은 손이 떨리고 있었다.
"여긴 무슨 일로 온 거야?"
"그냥... 숲이 더럽혀지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별다른 생각은 없었고, 그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잘 지내고 있냐?"
나도, 내가 왜 이런 말을 하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어쩌면, 파시어 일이 머리에 남은 걸지도 모른다. 다른 파티원들이 전부 그녀와 같은 결말을 맞이한다면, 그리 달갑지는 않을 것 같았다.
"..."
그녀는 입을 다물었다. 어쩌면, 나와 대화하고 싶지 않은 걸지도 모른다.
"셀리아는? 같이 다니는 것 아니었어?"
다시 침묵이 흘렀다. 그녀는 지나칠 정도로 조심스럽게 해야 할 말을 고르고 있었다.
"성녀와는... 헤어졌다. 그녀는 자신이 할 일을 찾았으니."
"뭐, 다행이네."
셀리아 정도의 인간이 평생 그런 꼴로 지낼 리 없었다. 신성력을 잃었다고는 해도, 그녀의 능력이면 먹고사는 데에는 지장이 없을 것이다.
구인광고를 보는 셀리아의 모습이라니, 사실 상상이 잘 가지 않았다. 파시어보다는 덜해도, 셀리아 역시 외모에 한해서는 아이라고 봐도 될 정도였으니까.
마지막으로 봤을 때 그나마 괜찮은 얼굴을 하고 있었으니, 어쩌면 완전히 진정된 걸지도 모른다.
"너는? 하고 싶은 일 있어?"
셀리아에 대해서는 한시름 놓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엘레노어야, 내가 걱정할 필요도 없이 어디선가 잘 살아 있을 게 뻔한 사람이었고.
하지만, 네르웬은 아직 불안해 보였다.
"그건..."
그녀의 숨소리가 거칠었다. 자세히 보니, 눈도 초점이 맞지 않는 듯 감았다 뜨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좋아 보이지는 않네."
처음 나와 떨어졌을 때는, 나를 거의 납치라도 할 기세로 따라오던 그녀였다. 그리고, 네르웬의 상태는 그때에 비해 조금도 호전되지 않았다.
그냥, 참고 있었던 거다. 나와 함께 있을 때는 어찌어찌 버틴다 하더라도, 아예 멀리 떨어져 버린 상태라면 견디기 어려웠을 것이다.
나는 몇 걸음 걸어가, 그녀의 앞에 섰다. 동공은 더 크게 흔들렸고, 그녀의 콧소리가 조금 더 거칠어졌다.
"싫으면 말해."
나는 약하게 네르웬을 끌어안은 뒤, 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가렸다.
"후, 흣, 으우..."
그녀는 탐욕스럽게 산소를 빨아들였다. 마치,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높은 산을 오르는 등산가처럼.
몇 분이 지나자, 그녀의 얼굴이 붉어졌다는 것이 느껴졌다.
"이, 이건... 이건."
꼴사납게 내 눈치를 보며 찔끔찔끔 냄새를 맡고 있는 모습이 보기 싫었을 뿐이다.
"너도 이거, 어떻게 해야 하는 거 아니냐?"
"처음부터 이렇게 태어났다는데... 내가 어쩔 수 있겠나."
"흠..."
엘프들은 이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없는 것 같았으니, 굳이 따지자면 남은 희망은...
없다. 파시어는, 내 손으로 죽였으니까.
"요즘은 스토킹 같은 건 안 하냐?"
"절대... 그런 일은 하지 않았다. 들킬 게 뻔한데다, 네가 싫어할 법한 일이니까."
나는 조심스레 그녀를 풀어 주었다. 네르웬은 잠시 머뭇거리다, 내게서 한 발자국 떨어져 나왔다.
"그래도, 그... 이 숲에 들어왔을 때는 네가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상관없어. 뭐, 냄새를 맡았다면 그랬겠지."
"그보다도, 그 말이..."
"말?"
잠시 멈춰 네르웬의 말뜻을 생각하고 있던 사이, 다그닥거리는 말발굽 소리가 들렸다.
"다시 보는구나."
온몸이 흰 털로 덮인 아름다운 백마가 나타났다. 머리에 성스럽고 순수한 뿔이 달려 있는, 유니콘이.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당장은 내가 필요하지 않은 것 같아 주위를 서성거리고 있었지."
그녀의 뿔은 괴물의 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저렇게 더러운 상태로 고결한 모습처럼 느껴지는 건, 마치 최면에라도 걸린 것처럼 신비로운 느낌이었다.
"유니콘이라면 당연한 일이란다. 삿된 것을 정화하고, 부자연스러운 것들을 소멸시키는 일은."
우연히 세 명이 모였다. 네르웬은 아직 내 향기를 잊지 못했는지, 조금은 몽롱하고 많이 우울해 보이는 얼굴로 나를 보았다.
"그런데, 방금 그건..."
"네가 너무 힘들어 보여서 잠깐 도와준 거다. 뭐..."
아무도 모르는 곳에 쓰러져, 쓸쓸히 죽어갈 것만 같았다.
이전에는 신경도 쓰지 않을 일이었을 것 같지만, 지금은 마음에 걸렸다.
그녀들이 죽는다는 게, 불행하게 삶을 끝내고 사라져 버린다는 게.
"그런가... 역시, 그랬구나. 그들이 틀리지 않았어."
네르웬은 미친 사람처럼, 헐떡거림과 웃음이 섞인 거친 숨을 내뱉었다.
"무슨 말이야?"
"아... 아니다. 그냥..."
그녀는 내 얼굴을 올려다본 채, 한참 동안 말없이 멈춰 있었다.
"됐어. 이 숲은 대충 정리됐으니, 이제 돌아가야지."
"내 목숨이 필요할 때가 되면 부르거라, 작은 인간이여. 난 잠시... 호수를 찾아보겠다."
뿔과 머리에 묻은 괴물의 피가 영 찝찝했는지, 유니콘은 바로 고개를 돌려 어딘가로 달려갔다.
"수도로 돌아갈 생각인데..."
"나는 여기서 기다리겠다."
겨우 진정된 네르웬은, 절뚝거리며 옆에 있는 나무에 기댔다.
"숲이 좋은 건가?"
엘프였으니, 그런 느낌이 드는 건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건... 아니다. 수도에 가서 봐야 할 사람도 있고, 하지만..."
그녀는 무언가를 참아내는 것처럼, 어렵사리 말을 흘렸다.
"따라와도 괜찮아. 수도에 도착할 때까지는."
그녀의 눈이 흔들렸다. 진지하게 내 제안을 생각해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선뜻 이해되지 않았다. 결국 그녀는 내게 중독된 상태고, 몇 시간이라도, 몇 걸음이라도 나와 가까운 곳에 있는 것을 원했을 테니까.
네르웬의 입술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괜찮다."
"...그렇다면, 뭐."
그녀 역시, 나에게 좋은 감정을 품고 있지는 않은 것 같았다. 어쩌면, 나를 원망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녀가 내게 했던 짓을 빼놓고 보면, 내가 딱히 네르웬에게 '함께 있어서 기쁠' 사람은 아닌 것 같았으니까.
태어날 때부터 나와 관계 맺기 위해 태어났다는 진실이 그녀에게 달가울 리 없었다. '나를 위해' 뭐든 하겠다고 말했지만, 적어도 그게 즐거운 일이어야 할 필요는 없었다.
이것도, 나름 그녀의 결심인 걸지도 모른다. 마약 중독자가 이를 악물고 약을 끊는 것처럼, 눈앞에 있는 나를 멀리하는 걸지도.
"그래."
그렇다면, 구태여 그녀를 끌고 갈 이유는 없었다. 나는 성검을 칼집에 집어넣고, 괴물의 사체가 가득한 숲을 빠져나왔다.
/////
몸을 씻고 돌아온 유니콘은, 아직도 그 자리에 주저앉아 있는 네르웬을 발견했다.
"왜 따라가지 않았니?"
네르웬의 눈에 조금씩 생기가 돌아왔다. 일어나야 한다는 생각이 그녀의 머릿속을 지배했다.
"결정했으니까."
"...뭘?"
"다른 애들의 말이 맞았어. 나는... 조금 늦게 깨달은 것 같아."
활을 쥔 그녀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거칠었던 호흡이 정돈되고, 어지러웠던 그녀의 눈이 사냥꾼의 눈으로 변모했다.
"유니콘 씨. 에네렐과 따로 다니는 건 좀 의외지만... 배신한 건 아니지?"
"그런 무례한 말을. 나는 그를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고 선언하지 않았니. 그걸 깨트릴 리 없지."
"그를 돌려보내기 위해서... 그래."
"그럼, 이곳에서 태어나지 않은 이가, 원치 않은 힘에 의해 끌려와 고통받는 것.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될 일이란다."
네르웬이 벌떡 일어났다.
"따라와. 안내해 줄 사람이 있어. 아마... 당신의 피가 언제 필요하게 될지 설명해 줄 거야."
유니콘은 잠시 고민했지만, 이내 그녀의 옆으로 다가왔다.
"타겠니? 일단은 너도 처녀고, 굳이 태워주지 못할 건 없는데."
눈이 살아났다 한들, 그녀의 몸은 아직도 떨리고 있었다. 약해빠진 괴물 몇 놈을 상대로 이렇게까지 지칠 그녀는 아니었지만, 그녀 자체가 흔들렸다.
"...고마워."
유니콘 위에 올라탄 네르웬은, 쏜살같이 달려가 숲을 벗어났다.
아직 숲은 그의 향기로 가득 차 있었다. 미련이 그녀의 뇌를 자극해, '조금만 더' 여기 머물러 있자고 애원했다.
네르웬은 그걸 거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