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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별을 앞둔 용사 파티가 내게 집착한다-174화 (174/217)

"이런 말씀을 드려서 정말 죄송합니다. 하지만... 저희도 상황이 여의치 않은 터라."

경비대장의 힘 빠진 목소리를 듣고 있자니, 도저히 그를 추궁할 마음이 들지 않았다.

"이해해요. 많이 힘드시겠죠."

경비대는 마탑을 수색했지만, 유의미한 정보는 찾을 수 없었다.

사실, 파시어가 개입되어 있다는 얘기를 들은 순간부터 반쯤 예상했던 일이기도 하다.

"그날 이후로도 몇 번 합동 조사를 시도해 봤지만... 도무지 해답이 보이지 않더군요."

"그렇겠죠."

"협조할 마음이 있긴 한 건지, 마탑 내부의 마법사들의 태도도 죄다 비협조적이고... 조금 수상해 보이는 곳이 있어도, 그들의 능력으로는 해제할 수 없는 마법이 걸려 있다고 했습니다."

"파시어니까요. 그들도 어쩔 수 없었을 겁니다."

살아 있는 마탑의 전설이자, 현존하는 인간 마법사들 중에서는 최고의 마법사인 파시어다.

그녀가 작정하고 증거를 숨기려 하면, 설령 마탑의 협조가 있다 한들 더 많은 정보를 찾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일단, 마탑주... 전 마탑주가 이 일에 관여되었다는 증거는 확보했습니다. 증언도 충분히 쌓인 상태고... 그래도, 큰 의미는 없겠지요."

파시어가 이 일에 관여했다는, 이미 전부 알고 있던 사실의 증거를 획득하는 것 외에는 아무런 수확이 없었다.

시체의 행방도, 그녀의 목적도 미궁 속으로 묻혀 버렸다.

하지만, 지금 경비대에게 그 이상을 기대하는 건 무리였다.

"최근 나타나고 있다는 괴물 건은... 괜찮습니까?"

"비상 상황입니다. 최소한의 인원이 번갈아 가며 수면을 취하고 있고, 다른 경비대는 온종일 대기하고 있습니다."

황가의 가호가 없어졌다는 사실은, 너무 빨리 피부에 와닿았다.

아직 수도에서 괴물이 나타나지는 않았지만, 어두운 숲이나 늪지에서 괴물들이 나타나고 있다는 소문이 이곳저곳에서 들렸으니까.

"이해가 안 돼서 그러는데... 다른 왕국에서도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겁니까?"

경비대장은 깊은 한숨을 쉰 뒤, 내 질문에 답해 주었다.

"그게 바로 제국이 제국일 수 있었던 이유입니다."

"네?"

"제국 밖에도 여러 왕국들이 있지만, 그들은 그 거대한 영토를 온전히 지키지 못합니다. 각자 그들이 살 방법을 찾고, 최소한의 면적을 충분한 병사로 방어하지요."

마왕군을 쫓는 여정을 제외하고는 제국 밖에 나가 본 적이 없었고, 그마저도 내가 밟은 땅은 극히 일부에 불과했다.

"음..."

"제국은 넓은 영토에 비해, 턱없이 적은 병력을 가지고 있지요. 고대에는 각자 왕국이었던 나라들이 한데 뭉친 격이니, 당연히 영토가 넓어질 수밖에 없었고... 이 모든 게 다, 제국 밖에서는 '당연히' 등장하는 저 마물들이 없기에 가능했던 겁니다."

그런 판국이니, 파시어를 수사하는 데 더 많은 인원을 투자할 여력이 없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엄밀히 말하면 괴물 퇴치는 경비대라기보다는 군인의 일이었지만, 유사시에는 검과 창을 든 조직이 군인 대신 움직여야 할 테니.

"힘드시겠습니다."

"그것도 그거지만... 정세도 걱정입니다."

"네?"

"경비대장이 되었을 때 이런 일까지 하게 될 줄은 몰랐지만... 저희 같은 놈들에게는 너무 위험한 상황입니다."

경비대장의 얼굴에는 깊은 주름이 파여 있었다. 마지막으로 그를 봤을 때보다 훨씬 많은 주름이.

"누가 반역자가 될지도 모르고, 반대로 저희가 반역자로 취급받는 날이 올지도 모릅니다. 없는 정보라도 긁어모으지 않으면, 잘못된 선택을 하게 될 수도 있는 상황입니다."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당장 눈에 띄는 충돌이 없다 한들, 언제 어떤 황족이 야심을 드러낼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무력이 동반될 것이다. 그렇다면, 경비대는 그들을 막아야 한다.

하지만, 그렇게 준비한 이들이라면 적어도 경비대보다는 강한 무력을 보유했을 것이다.

아무리 적어도 강력한 기사와 마법사 몇 명은 데리고 있을 것이고, 경비대가 자력으로 그들을 이길 수 있을 리 없었다.

만일, 그 쿠데타가 성공한다면 그것도 문제다. 줄을 잘못 선 죄로, 경비대의 고위 인력들이 물갈이될 테니까.

"...알겠어요."

"진심으로 사죄드립니다. 용사님이 직접 수사에 나서, 원흉을 처단하시기까지 했는데... 뒤처리 마저 똑바로 하지 못하다니."

고개를 숙인 그의 정수리에서, 진심이 느껴졌다. 차마 그를 더 괴롭힐 수 없었다.

"나름대로 사정이 있을 테니까요. 그보다, 많이 바쁜가요?"

"수도 근처 숲에서도 괴물들이 모이고 있습니다. 사실, 놈들이 더 커지기 전에 군대를 동원해 토벌해야 하겠지만... 결정을 내려 줄 사람이 없는 터라."

장로들이 급히 모여 일을 처리하고 있다고 한들, 군대를 보내는 일은 좀 다른 문제였다.

단순한 괴물이라면, 그리 많은 군대를 보낼 필요는 없었다. 황제가 죽었다고 해서 그의 친위대가 사라지는 것도 아니었고, 수도의 병사들도 멀쩡히 남아 있었다.

지방의 영주들도 자체적으로 군대를 이끌어 처리할 수 있는, 말 그대로 조금 더 과격하고 공격적인 산적 수준에 불과한 적이었다.

하지만, 그걸 결정하고 책임을 지는 건 다른 문제였다. 장로들은 지나칠 정도로 완벽하고 안정적인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다.

조금의 실책이라도 나온다면, 황족 중 하나가 그 실수를 거대하게 부풀리고 그걸 규탄하며 정치적 인지도를 높이려 할 테니까.

결국, 결단을 내릴 사람이 없었다.

"그것 때문이면, 좀 쉬세요. 경비대장님도 잠을 제대로 못 주무신 것 같은데."

의자에서 일어나자, 내 몸이 무겁게 느껴졌다. 오랜만에 느껴 보는 감각이었다.

"제가 처리하죠. 복잡한 건 마음에 안 들어서."

분명 좋은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그의 표정이 밝지 않았다.

"감사합니다. 분명 감사한 일이지만... 용사님. 그, 마지막으로 주무셨던 날이 언제입니까?"

"네?"

기억나지 않았다.

해야 할 일이 많았지만, 꼭 바쁜 것만은 아니었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나는 잠을 자지 않았다. 어딘가에 누워 쉬어야겠다는 생각이 사라진 것처럼.

아마, 파시어가 죽었을, 아니 파시어를 죽였을 때부터 그랬을 것이다. 그 전에는 습관 때문이라도 꼬박꼬박 잠을 잤으니까.

"뭐, 피곤하지는 않아요. 이 정도로... 상관없어요. 좀 이상한가요? 눈이 빨개졌나?"

거울이 흔치 않은 세계였으니, 내 모습을 돌아볼 만한 곳이 그리 많지 않았다.

"아닙니다. 그저... 죄송합니다. 그냥 궁금했을 뿐입니다."

"괜찮아요. 이 꼴이지만 용사인걸요. 이 정도로는 끄떡도 안 해요."

나는 웃으며 그를 안심시켰다.

"다녀올게요."

경비대장은 마지못해 내가 가야 할 곳을 알려 주었다. 나는 느릿느릿 일어나, 조용히 문을 닫고 나왔다.

경비대를 나온 순간, 다시 혼자가 되었다.

왜인지는 몰라도, 내 발걸음에서 흘러나오는 소리가 크고 또렷하게 들렸다.

/////

아무 생각 없이 평야를 걸었다.

괴물이 나타났다는 숲은 그리 멀리 있지 않았다. 이런 곳에 괴물이 나타난다면, 평범한 산적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큰 피해가 나올 것이다.

"여긴가..."

아직 낮이었다. 햇빛이 따스하게 나뭇잎을 비추고 있었고, 눈으로 볼 때는 저 안에 무언가 있다고 짐작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악취는 숨길 수 없었다. 썩은 나무와 짐승의 배설물이 마기와 섞인 듯한 오묘하고 구린 냄새.

심호흡을 한 번 한 뒤, 나는 그 안으로 들어갔다.

처음에는 듬성듬성 나 있던 나무들은, 어느새 발을 디디기 어려울 정도로 빽빽하게 들어찼다.

나뭇잎이 햇빛을 탐욕스럽게 먹어 치우자, 어느새 발밑에는 떨어진 나뭇잎과 시들어가는 풀 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냄새가 점점 심해지고 있었다.

"으어어..."

사슴의 뿔이 보였다. 하지만, 일반적인 사슴의 뿔이라기에는 너무 높은 곳에 걸려 있었다.

거대한 나무에 가려 그 몸은 보이지 않았지만 숨소리와 악취, 그리고 나뭇잎을 밟는 발소리가 들렸다.

"그워어어어어!!!"

눈이 마주쳤다. 두 발로 걷는 괴물은 몸 이곳저곳이 흉물스럽게 부풀어 있었고, 털이 덮인 곳과 살점이 덮인 곳, 근육이 덮인 곳이 이리저리 섞여 있었다.

그리고, 나를 보는 눈은 독기와 분노로 가득 차 있었다. 말이 통할 법한 상대는 아니었다.

그놈의 고함에 반응하듯, 숲이 움직였다. 수많은 발굽 소리가 울렸다.

"그래..."

적의 능력은 파악했다. 그리 강하지는 않다. 조금 어지러웠지만, 저 정도의 적은 몇이 오든 해치울 수 있다.

최소한의 지성은 있는 건지, 그 기괴한 괴물은 바로 내게 덤벼드는 대신 조무래기들이 도착하는 것을 기다리고 있었다.

고블린 정도의 크기를 가진 두발짐승들이 끝없이 몰려왔다. 무기라고는 뾰족한 나뭇조각이나 기다란 돌, 드물게 날카로운 돌멩이를 끝에 묶은 창 정도였다.

평범한 인간보다는 강하겠지만, 이 수준이라면 갑옷을 갖춰 입은 병사를 이길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 수는 무시하지 못한다. 움직이는 속도를 보아하니, 발도 빠른 것 같았다.

여행자나 상인, 혹은 무방비한 마을이 습격당하면 얼마나 큰 피해가 나올지 상상하기도 싫었다.

"으어어어..."

충분한 수가 모이자, 거대한 짐승이 다시 한번 소리쳤다.

"우워어어어어어!!!"

마침, 생각하고 싶지 않던 참이었다. 나는 성검을 뽑았다.

이내, 피가 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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