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섭다. 눈을 보면 압박감을 느낄 정도로.
잠깐 잊고 있었다. 엘레노어가 아무리 내게 유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한들, 그녀의 본질은 기사다.
승리와 명예를 위해서라면 조금도 망설이지 않을 여자. 황제의 가장 강한 무력이자 백금 기사단의 단장.
"...엘레노어."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저건, 결의를 다진 사람의 눈이다.
결연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그녀를 보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잊어버렸다.
"에네렐."
그녀가 살짝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
"당신은 황제의 자리를 원하지 않겠지요."
"...그래."
"그렇다면, 굳이 우릴 위해 그 자리에 앉을 필요는 없습니다."
차가운 그녀의 목소리가 목을 조여오는 것 같았다.
"엘레노어. 이건 황제의 유언이다. 그가 황제가 되고 되지 않고는 오롯이 그의 선택이고."
라인하르트가 그녀를 제지했다. 하지만, 엘레노어는 그녀의 스승 앞에서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서 있었다.
"..."
조금, 기억날 것 같았다. 그녀의 앞에 서 있는 건, 이런 기분이었다.
타협도, 협상도 없이 그저 서 있는 산을 보는 것 같은 느낌.
"네가 황제가 될 생각인 게냐, 엘레노어. 이건 황제의 유언이다. 제국을 위한..."
"그럴 생각은 없습니다. 물론, 제국을 위해서는 그게 효율적인 선택일지도 모르지만..."
엘레노어의 갑옷은 그리 깨끗해 보이지 않았다. 당장 싸울 정도의 관리는 되고 있는 것 같았지만, 보기 좋을 정도로 잘 닦인 상태는 아니었다.
추측에 불과하지만, 그녀가 독자적인 세력을 만든 것은 아닌 것 같았다.
"누구도 황제로 만들지 않겠다는 거냐? 계속?"
라인하르트가 허탈하게 웃었다.
"언젠가는, 다른 황제가 나오겠지요. 그때까지 꽤... 소란스럽겠지만,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물론, 엘레노어의 계획이 라인하르트의 계획과 크게 다른 것은 없었다. 하지만, 그건 엘레노어와 나를 통제할 수 없다는 가정하에 세워진 계획이었다.
할 수 있다면, 그 둘 중 하나가 되는게 제국에 득이 되는 선택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엘레노어."
잠깐 잊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녀도, 나도.
이게 엘레노어의 본모습이었다. 오히려, 나와 함께했던 여행에서 주저하고 망설이던 그녀의 모습이 그녀답지 않은 모습이었다.
"애초에, 이렇게 극단적으로 생각할 이유가 없잖아. 황제하고 했던 말이지만, 몇 년 정도라면 생각해 볼 수도..."
적어도, 마무리를 짓고 싶었다.
파시어가 죽는 모습을 보고 깨달았다. 적어도, 이 세계를 찝찝한 마음으로 떠나고 싶지는 않다.
나에게도, 그들에게도 너무 늦었을지도 모르지만, 아니 늦었겠지만 조금이나마 갈등을 봉합한 뒤 고요한 마음으로 떠나고 싶었다.
"이번에도, 다른 사람을 먼저 생각하시는 겁니까."
그러고 보면, 어느 순간에서부터인가 엘레노어가 내게 존댓말을 쓰고 있었다.
"아니, 이건... 그거랑은 달라. 노력은 하고 있지만, 당장 내가 돌아갈 방법은 없잖아."
혹시나 내가 못 찾은 것 아닐까 싶어, 수도에 온 다음에도 이곳저곳 돌아다녔다. 물론, 어떠한 단서도 찾을 수 없었다.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엘레노어는, 표정을 조금도 바꾸지 않고 내 말이 틀렸다고 말했다.
"뭐?"
"몇 년이 걸리지도 않을 겁니다. 제가 당신을 보는 것도, 그리 오래 남지 않았습니다."
"그게 무슨... 마룡의 심장을 찾은 거야? 그렇다면 내게도 말해 줬어야지."
"그건 아닙니다. 하지만, 곧 얻을 수 있을 겁니다."
또 내가 모르는 곳에서 무언가가 진행되고 있었다. 화가 났지만, 기대감이 더 컸다.
돌아가고 싶다는 마음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이유는 좀 달라질 수 있을지언정, 도망치고 싶다는 마음은 변하지 않았다.
“단서를... 찾은 거야?”
아직 실감이 나지 않았지만, 엘레노어가 수도에 와서 계속 그걸 찾아다녔다면 단서를 구할 방법이 꼭 없는 것만은 아니었다.
나야, 힘이 좀 강할 뿐인 일반인이었으니까. 생각도, 인맥도, 행동력도 엘레노어와는 하늘과 땅 차이였을 것이다.
"..."
쉬고 있을 거라 생각했다. 내 귀환을 위한 재료를 찾기 위한 여행이 쉬운 일은 아니었으니까.
물론, 마왕 퇴치를 위한 여정에 비하면 피크닉 수준이었다. 그렇다 해도, 그 여행으로 인한 피로가 쌓여 있던 건 그녀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몇 달 쉬지도 못하고 다시 검을 쥐는 것이 달가울 리 없었다.
"지금까지 그걸 찾아다녔어?”
"제가 한 일은 거의 없습니다. 그저... 최소한의, 할 수 있는 일을 했을 뿐."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었다. 당장 오크 로드 하나도, 그녀 혼자서는 승리를 장담할 수 없는 적이었으니까.
목숨을 걸고 싸웠다. 그러고도, 아무런 불만도 품지 않았다.
물론 그녀가 내게 한 일이 잊혀지는 건 아니었다. 무슨 이유가 있었던 건지 모르지만, 적어도 그녀의 수련 시간은 내게 끔찍한 시간이었다.
그래도, 그녀의 '할 수 있는 일'이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얘기해 줘. 얼마나 찾은 거야? 단서가 있으면, 내가 직접..."
"더 이상, 당신이 노력해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녀의 눈이 고요하게 빛났다. 그 차가운 눈동자 속에, 나에 대한 연민과 속죄가 깃들어 있었다.
"엘레노어..."
"그저, 기다리고 있으면 됩니다. 지금까지... 고마웠습니다."
기사의 입가에, 아주 옅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주의해서 관찰하지 않으면 그녀가 웃고 있다는 것도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작은 웃음이.
나는, 그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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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들은 대체 뭡니까?"
병사 몇몇이 주저앉은 채, 거친 숨을 내쉬며 전투의 열기를 식히고 있었다.
"몰라, 나도 이런 건 처음 본다고... 마왕군하고는 조금 다른 느낌인데."
병사는 옷에 묻은 피와 살점을 거칠게 닦아냈다. 살점은 털어낼 수 있을지언정, 그 악취는 닦아낼 수 없을 것이다.
"젠장, 이 옷은 버려야겠네."
주위에는 방책을 넘어 온 괴수들의 시체가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그래, 수고했어! 잘 싸웠군. 열심히 훈련한 보람이 있어."
갑옷을 단단히 갖춰 입은 노인이 그 병사의 등을 두드렸다.
"자, 장군님?"
"자네는 마왕군을 만나본 적이 없었던가?"
"보, 보긴 했지만... 그때는 성채 위에서 화살만 쐈었습니다."
"참전 용사였군! 그렇다고 해도, 이런 놈들은 만나보지 못했을 테지."
늙은 장군은 주위에 쓰러진 괴물의 시체를 툭툭 건드려 치웠다.
"오랜만에 보는 놈이군. 다시 볼 일은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아, 아십니까?"
"물론 알지. 자네도 마왕군과 싸워 봤다면 알겠지만, 이놈들은 그들에 비해 어떤가?"
병사는 조심스레, 눈에 보이는 모든 생명체를 죽여버릴 기세로 성문을 올라오던 마왕군을 떠올렸다.
"약합... 니까?"
"그렇지."
짐승과 인간, 마기와 생명이 괴이하게 꺾인 이들은, 불안정하고 느리고 약했다.
물론, 그건 강대한 마왕군과 비교했을 때 드는 생각일 뿐이다. 키가 몇 미터는 되어 보이는 이 괴물은, 그저 팔을 휘두르는 것만으로 목재 바리케이드를 박살 내 버렸으니까.
그 후 몇 초도 되지 않아, 사방에서 날아오는 화살 세례를 맞고 추하게 쓰러지긴 했지만.
"그놈들은 군대네. 객체의 지능은 이놈들과 다를 바 없을 것 같지만, 명확한 목표를 가지고 움직이지. 그에 비하면 이건..."
장군은 잠깐 몸을 움직여, 그보다 조금 더 작은 괴물의 팔을 살짝 들어 보았다.
"내가 예전에 봤던 것과 비슷하군. 이건 그냥 짐승이야. 마기에 노출된 짐승."
"하지만...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그것도 제국 안에서!"
반쯤 누워 있던 병사가 어기적어기적 일어났다.
"멀리 사막이나 북방의 황무지라면 모를까, 제국 안에서 그럴 일이 일어난다는 건..."
"요즘 놈들은 젊구먼. 뭐, 제국이라고 다를 게 뭐 있겠나? 그저 이 넓은 대지의, 좀 더 큰 나라일 뿐이지."
"하지만, 황제 폐하의 가호가..."
"지금 그 황제 폐하께서 돌아가셨잖나."
장군의 짧은 말에, 주위의 분위기가 어두워졌다.
황제의 사망은 숨길 수 있는 사실도 아니었고, 나름대로 수도와 거리가 있던 이곳에도 순식간에 퍼져 나갔다.
"보통은 이런 일을 대비해 생전에 미리 후계자를 만들어 두지만... 아마, 그럴 겨를이 없으셨나 보군."
"그건..."
"당분간은 이럴 걸세. 이 정도는... 일상이라고 생각하게나. 언제 다음 황제 폐하가 즉위하실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니."
병사들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이번 싸움에서 많은 피해를 입은 것은 아니었다. 사망자는 잘 쳐줘야 한 자릿수였고, 적의 규모에 비하면 엄청난 대승이라 할 말 했다.
대규모의 병사를 한 번에 움직였으니 이 정도의 성과는 거둬야 했지만, 이 괴물은 잘 쳐줘야 어지간한 도적단 수준이었다.
"이걸... 계속해야 한다는 말씀이십니까?"
"뭐, 소문은 들어 봤을 것 아닌가. 사막에 나타나는 거대한 모래 전갈이라거나, 북부에 등장하는 설인이라거나... 그런 놈들을 우리도 죽여야 하는 거지. 더 강한 놈들이 나오면 모를까... 이 정도 놈들은 끝도 없이 나올 걸세. 새 황제 폐하가 즉위하실 때까지 계속."
그래도, 이게 특별한 이벤트가 아니라 지금부터 쭉 계속될 일상이라는 장군의 말은 그들의 힘을 쭉 빼놓기에 충분했다.
"힘내자고."
늙은 장군의 말이, 빈 싸움터에 바람처럼 흘러갔다.
다른 병사들은 이미, 그의 말을 주의 깊게 들을 수 있을 정도로 편안한 상태가 아니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