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가 죽었다.
제국의 분위기는 한없이 어두워졌다. 이번 황제는 오랜 시간 안정적으로 제국을 통치했다.
노인들은 입버릇처럼, 그가 황제에 오르기 전에 제국이 얼마나 후진적이고 혼란스러웠는지 말하곤 했었다.
그 때문에, 젊은이들은 변화에 대한 두려움을 안고 그저 죽은 황제를 추모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게 꼭 기우인 것만은 아니었다.
황제파는 뿔뿔이 흩어졌다. 귀족파에 조금 밀리고 있었다고 한들, 그들이 결집한다면 혼란을 잠재울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 안에서도 내분이 일어났다. 황제파는 필연적으로 엘레노어와의 점점이 많을 수밖에 없었고, 황제와 제국뿐만 아니라 그녀 자체에 충성을 바치는 사람도 많았다.
그들 안에서도 의견이 갈렸다. 황제의 유언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지켜야 하는 것이며, 엘레노어 대신 다른 사람을 황제 직위에 앉혀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었다.
반대로는, 아무리 그들이 황제파고 제국에 충성을 다했다고 하지만 그 유언만큼은 따를 수 없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었다.
그들이 보기에, 다음 황제가 될 만한 재목은 엘레노어밖에 없었다. 그들은 죽은 황제를 존경하고 사랑했을지언정, 그만큼 제국의 미래를 걱정했다.
하지만, 그들의 한계도 뚜렷했다. 죽은 황제의 유언이 주는 영향력도 무시하지 못할 수준이었지만, 더 중요한 건 그녀 자체가 황제 자리에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분열되어 있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덕분에 당장 유혈 사태가 일어나지 않았다.
황제파가 분열된 것 이상으로 귀족파가 분열되었다. 그들은 각자 자신이 지지하는 사람을 황제로 만들기 위해 수작을 부렸고, 그 과정에서 분열된 황제파를 끌어들이려 했다.
무력도, 정치적 영향력도 강력한 세력이 뿔뿔이 흩어져 있다. 아무리 약점이 많다 한들, 엘레노어는 황제의 딸이었고 제국 최고의 검사였다.
지금 당장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은거하고 있었지만, 쓸데없이 그녀를 자극해 황제파를 결집시킨다면 구도가 어그러질 수 있었다.
긴장감으로 가득 찬, 허울뿐인 평화가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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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뵙는 날이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그렇군요."
단 한 번 봤던 사람이었지만, 그의 얼굴을 잊어버릴 리 없었다.
눈앞에 앉아 있는 노인은, 당장이라도 검을 뽑아 싸울 수 있을 만큼 정정해 보였다.
노쇠해진 몸일지언정, 제국에서 그와 결투를 벌여 살아남을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라인하르트. 제국의 기사가 내 앞에 있었다.
"먼저... 그때의 무례를 사과해야겠습니다. 변명이 될 수는 없겠지만... 몰랐으니까요."
"이해합니다."
용사의 힘을 얻고 미쳐 날뛰는 나를 상대로도 어렵게나마 검을 맞댔던 그였다.
차분한 분위기에서 보는 그의 얼굴에는, 수많은 흉터에 걸맞은 위압감이 서려 있었다.
"..."
그는 아무 말도 없이, 내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실례지만, 무슨 일로..."
"아닙니다. 그저, 용사님은 이런 모습이셨구나. 실제로 용사님을 보게 된다면, 이런 분이시구나... 하는 생각을 했을 뿐입니다."
마치 소년으로 돌아간 것처럼, 그는 호기심에 가득 찬 얼굴로 나를 관찰하고 있었다.
"유감입니다. 제국의 기사로서, 용사님이 당하셨던 피해와 멸시에 대해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아니요. 그건... 됐어요."
사과는 충분히 받았다. 개인적으로 그에 대한 악감정이 있던 것은 아니었다.
"그보다, 후계 문제 때문에 저를 부르신 것 같습니다만."
이전에도 적지 않았던 내 가치는, 이제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뻗어 올랐다.
일단, 황제의 유언은 나를 차기 황제로 지목하고 있었다.
나는 따로 세력을 두고 있지 않았으니, 진지하게 내가 황제가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 사람은 적었다.
하지만, 내가 지지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황제의 유언을 지키려 하는 황제파를 같은 편으로 만들 수 있다.
알트도어 가문의 로비는 신사적이고 부드러웠다는 것을 느끼게 될 정도로, 그들은 과격하고 거친 방식으로 나를 끌어들이려 했다.
길거리에서 나를 붙잡고 절을 한 다음 헐벗은 여자를 붙이는 것 정도는 애교였다.
"많이 혼란스러울 거라 생각됩니다. 이번에는 제국의 일원으로서... 진심으로 사죄드립니다. 용사님을 습격한 이들은 엄히 처벌받을 겁니다."
달콤한 말과 선물로 나를 꾀려 하다가, 내가 응해주지 않자 얼굴을 싹 바꾼 채 '협조하지 않을 거라면 여기서 죽어줘야겠다.'라며 칼을 뽑아 든 이들도 있었다.
"...그러고 보면, 그 사람들은 대체 무슨 생각이었던 겁니까?"
라인하르트가 헛웃음을 흘렸다.
"정보를 얻긴 했는데, 제대로 된 정보를 얻지는 못한 것 같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죠?"
"마왕군이 습격한 지역에서 살아남은 사람에게 정보를 얻은 것 같았습니다. 그때는, 용사님의 처우가 지금과는 많이 달랐을 때니까요."
이제야 이해가 됐다. 그들이 왜 용사에게 달려들었는지.
남들이 알지 못할 법한 특별한 지식을 하나만 알고 있는 이들은, 그걸 맹신하기 마련이다.
지금 용사 취급을 받고 있는 이가 에네렐이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내가 언제 용사의 힘을 되찾았는지 같은 자세한 정보는 알지 못했던 것이다.
엘레노어의 공적은 모두 진짜 용사였던 에네렐의 공적을 가로챈 것이라고 믿고 있다가, 사실 그 '진짜 용사'마저도 거짓이라는 걸 알아버린 것이다.
"어렵군요."
"우스운 일이지요. 그럴 인력이 있으면, 여기 와서 서류에 서명 한 번씩만 해 주면 좋을 터인데."
황궁은 반쯤 마비된 상태였다. 공중에 떠 버린 권력을 잡을 세력이 나오지 않았다.
황제의 가장 충성스럽고 늙은 신하 몇몇만이, 그가 이전에 계획해 놓았던 정책들을 진행시키고 있을 뿐.
그 임시 정부 체제에서, 이 늙은 기사의 영향력은 작지 않아 보였다.
황제파에도 강력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으면서, 당장 정권을 잡고 있는 데다 백성들 사이에서도 인망이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다시 후계자 얘기로 돌아가죠. 도대체 왜, 엘레노어는 안 되는 겁니까?"
내가 보기에는 너무나도 답답한 상황이었다.
지금은 약점이 좀 생겼을지언정, 결국 다른 황족이나 귀족파의 인간들이 나를 회유하기 전까지는 문제 삼기 어려운 약점이다.
애초에, 여황제라는 것이 불가능하지 않은 나라에서 황제의 직계 자손에게 다음 황위를 물려주지 않는 것 자체가 문제를 키우기 너무 쉬운 행동이었다.
"짐작 가는 바는 있습니다만..."
"그래요?"
"저는 많은 것을 알고 있으니까요. 황제 폐하에 대한 것도, 그 따님, 엘레노어 황녀 전하에 관한 것도.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스스로 눈을 가렸던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의 목소리가 떨렸다. 나는, 그가 냉정을 되찾을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려 주었다.
"하지만, 황제 폐하의 마지막 명령입니다. 저는 그걸 알아도 말할 수 있는 위치가 아닙니다."
"이런 식으로 혼란이 길어지면, 결국 내전이 일어날 겁니다."
"과연 그럴까요..."
그는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저보다는 라인하르트 경이 더 잘 알고 있을 것 같군요. 분위기가 심상치 않습니다. 당장은 하하호호 웃으며 자기 편을 확보하고 세력을 다지고 있지만, 몇 달만 있으면..."
수많은 황족들이 각자 자신의 세력을 구축하고 나면, 어느 순간부터는 금과 여자, 권력에 대한 욕망으로 서로의 세력을 끌어올 수 없는 순간이 올 것이다.
"외부의 적이 등장할 테니까요."
"네?"
"황족들은, 좀 불충한 말이지만, 제대로 된 놈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들 뒤에 있는 귀족파 놈들은 이기적이고 비열할지언정 노련합니다."
별일 아니라는 듯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하는 라인하르트의 말에 위화감이 느껴졌다.
"자기 외에 다른 사람이 몇 명이 죽어 나가든 신경 쓰지 않을 이들이지만, 그들을 포함한 모든 이들이 죽을 위기에 처하면 눈을 번쩍 뜨고 힘을 합칠 테니까요."
"...네?"
"그때, 누가 됐든 그들이 선택한 이에게 힘을 보태 주면 될 일입니다. 물론, 용사님이 황제 자리에 오르겠다면야 제 욕심으로도, 황제 폐하에 대한 충심으로도 최선의 상황입니다만."
"무슨 일이 일어난다는 거죠?"
그는 잠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죄송합니다. 용사님이 너무 현명하시니, 마치 이곳에 오래 사셨던 귀족처럼 대해 버렸지 뭡니까."
"..."
"황가의 가호가 사라졌습니다. 황제 폐하는 돌아가셨고, 새로운 대관식을 시작할 수는 없으니 혼란이 이어질 겁니다. 마족들이 다시 얼굴을 드러내고, 우리들은 다시 싸울 곳을 찾겠지요."
그는 호승심 가득한 눈으로 검을 들었다.
"의무에서 자유로워졌으니, 저도 죽을 곳을 찾을 수 있을 겁니다."
어느새 라인하르트는, 투쟁에 목마른 무인의 눈을 하고 있었다.
"막을 방법은 없습니까?"
"용사님이 황제가 되시거나... 그것 말고는 딱히 생각나는 것이 없군요. 제가 어중이떠중이 중 한 명을 골라 황제로 만든다 한들, 그를 제외한 모든 이들이 연합할 테니까요."
"그렇다면, 저는 왜 되는 겁니까?"
"그렇게 연합한 모든 이들을 죽일 힘이 있지 않습니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멍하니 눈을 감고 생각했다.
어느 것 하나 고르기 싫은 선택지지만, 하나를 골라야 한다면...
"안 됩니다."
그리울 정도로 익숙한, 차갑고도 냉혹한 여기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엘레노어가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