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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별을 앞둔 용사 파티가 내게 집착한다-170화 (170/217)

신비로운 공간이었다. 그의 말처럼, 이건 수직으로 흘러내리는 호수이자, 매끈한 물로 만들어진 거울이었다.

"여기서, 뭘 하면 되는 거지..."

파시어의 냄새가 났다. 서류 뭉치나 기록이 있을까 싶어 주위를 둘러봤지만, 여기에는 정말 저 호수를 제외하면 아무것도 없었다.

따로 설명해 준 것은 없었으니, 혹시나 하는 마음에 나는 조심스레 그 안에 손을 넣었다.

"읏!"

기억들이, 스며들어 왔다.

그 투명한 거울에 무언가 보일 거라 생각했던 나지만, 아예 용도가 달랐다. 앉아서 보는 게 아니라, 머릿속에 직접 영상이 박히는 느낌이었다.

"이건..."

행복했던 기억이 아니었다. 그저 너무 많아 기억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흔했던, 파시어가 나를 괴롭히는 장면이었다.

-왜, 왜! 왜 이렇게 멍청한 게냐! 왜, 내 말을 이해할 생각조차 하지 않는 거냔 말이다!

그녀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내 심장을 찌르고 있었다. 무슨 이유에서 일어난 다툼인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사람을 저 꼴로 만든다니, 제대로 된 해결책이 아니지 않습니까!

-단순한 개조였을 뿐이다. 저 사람들이 이 추위를 견딜 수 없다고 네가 하도 징징거리니까, 그에 맞는 대비를 해 준 것 뿐이다!

그녀의 말을 듣고 있자니, 어렴풋이 기억났다.

좋은 사람들이었다. 이런 척박한 마을에 살던 사람이라기에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좋은 사람들.

그들의 덕을 보았다. 물자는 떨어지고, 쉴 곳을 찾지 못하는 순간에 그들은 우리에게 먹을 것과 쉴 곳을 제공해 주었으니까.

-겨울이 끝나가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쓸 보온 마도구는 이미 충분하고...

-냉기를 다루는 마족과 싸우게 될 수도 있다. 그런 귀중품을 헛되이 써 버릴 순 없어!

-오는 길에 그런 능력을 쓰는 마족 대공을 죽이고 온 것 아니었습니까?

-대공급이 아니라 한들, 그런 능력을 쓰는 마족은 차고 넘친다. 꼭 필요하지 않은 물자를 피난민의 목숨을 위해 쓴다는 건, 네 상상 이상으로 위험하고 비효율적인 짓이니라!

여정의 막바지였다. 나는 이미 그들을 포기했고, 그들 또한 나를 시선 밖에 두었을 때였다.

이렇게 거친 말로 그녀와 맞설 수 있었던 것은, 단지 그게 목숨이 걸린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엘레노어의 검이 조금이라도 무뎌진다면, 우리 파티 전체의 목숨이 위험해진다. 우리가 실패하기라도 하면, 저 피난민을 포함한 제국에 사는 모든 인간이 죽을 것이야!

-그렇다고 해서, 사람을... 저 꼴로!

-살게 해 주지 않았느냐. 아끼던 마력을 쥐어짜서! 너 때문에! 너만 아니었으면!

-그 마도구를 쓰면 해결될 일 아니었습니까!

-마왕 퇴치에 변수가 없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냐? 조금이라도 일이 틀어지거나 한 번에 마왕의 숨통을 끊지 못하면, 이 황무지에서 겨울을 한 번 더 보내야 할 수도 있는데?

결과적으로 그녀의 고민은 헛된 것이 되었다. 우리 파티는 충분히 강했고, 마왕은 최대한 저항했지만 한 번에 쓰러트릴 수 있었다.

다음 겨울을 보는 일은 없었고, 냉기 마법을 쓰는 마족이 등장하는 일도 없었다.

하지만 그 고민이 아예 헛되다고 말할 수만은 없었다.

용사 파티의 여정에서 변수는 수도 없이 일어났고, 그때 파시어의 편집증적인 준비가 없었다면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대처할 수 없었을 테니까.

-그래서, 이딴 식으로 해결하신 겁니까?

-마도구도, 재료도 쓰지 않은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그 방법이, 피난민 전원을 키메라로 만드는 마법이 아니었다면 나도 거부하지 않았을 것이다.

사람의 형태를 띠고 있었지만, 등에는 하얀 털이 덮여 있었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는 사냥해 온 생고기를 뜯고 있었다.

-지능에는 문제가 없다. 아니, 부작용에 대해서는 확신할 수 없지만... 지금 이것저것 따지고 있을 상황은 아니지 않느냐.

슬프지만, 그들의 허락도 구한 상황이었다. 엘레노어가 용사라는 걸 알고 난 뒤, 그들은 우리에게 무한한 신뢰를 보냈다.

하나둘씩 가족이 괴물로 변하고 있는 걸 본 뒤에도, 그들은 다른 선택을 할 수 없었다.

이 추위를 맨몸으로 뚫고 나가는 건 자살행위에 가까웠고, 거기 남아 있어 봐야 용사의 흔적을 따라온 마왕의 군대가 그들을 모두 죽일 테니까.

-그 마력이라면, 더 나은 방법이...

-나는 영생을 꿈꾸며, 수없이 많은 연구를 시도했다. 내가 가장 쉽고 안전하게, 어떤 마법 재료도 소모하지 않고 할 수 있는 마법은 이것뿐이니라.

그때 나는, 분노에 가득 차 있었다. 그들에게 받은 게 너무 많았다.

그들이 나를 싫어하는 것 이상으로, 나도 그들을 좋아하지 않았다. '나와는 다른 사람'이라 생각했고, 이해하려는 생각도 설득하려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화를 낼 생각이 들지 않았다.

어쩌면, 이게 마지막으로 보는 파시어의 얼굴일지도 모른다. 경비원이 그 지하실에 갔을 때, 시체 하나 없이 텅 비어 있었다고 했으니까.

그렇게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그녀의 눈을 보게 된다. 애써 눌렀던 미련이 가슴을 뒤덮었다.

죄책감은 아니다. 하지만, 너무 빨리 포기한 것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마치, 파시어가 저 사람들을 포기했던 것처럼.

옳은 선택이다. 그들의 남은 일생을 신경 쓰지 않고, 당장 목숨을 연장시키기 위해서 할 수 있는 선택이다.

용사 파티의 여정은 마왕을 죽이기 위한 여정이지, 피난민을 구하기 위한 여정이 아니다.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이 중요하지 않은 일인지 따지라면, 결국에는 그녀가 옳을 수밖에 없었다.

"아..."

그녀의 얼굴을 멍하니 지켜보던 나는, 아주 작은 사실 하나를 깨달았다.

그곳에서 화를 내고 있던 그때의 나는 몰랐던 사실을.

-이보다 더 나은 방법이 있기라도 하단 말이냐!

그녀도, 고민하고 있었다.

그저, 나보다 더 불안해했을 뿐이다. 두려워했을 뿐이다.

죽어가는 사람의 목숨을 낮은 우선순위에 둬야 할 정도로 중요한 무언가가 있었을 뿐이다.

내가 그녀를 이해하는 날은 평생 오지 않을 것 같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녀의 나 사이의 거리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는 가까웠던 것 같았다.

"음..."

무의미하다. 다 의미 없는 일이다.

그녀는 나를 죽이려 했고, 또 다른 악행을 저지르려 했다. 내가, 내 손으로 파시어를 죽였다.

이제 와서 회상에 잠기는 것 따위, 아무런 의미 없는 짓이었다.

-왜, 왜, 왜 이렇게 멍청한...

다시 처음으로 돌아왔다. 잠시 당황한 나는, 이 장치가 기억을 '틀어 주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내 기억이 아니었다. 내 시야로는 볼 수 없는 각도로 파시어의 얼굴을 비춰 주고 있었으니까.

아마 마법적인 영상의 일종일 것이다. 저장된 영상이 끝나자, 다시 처음으로 돌아온 것일 테고.

감각적으로, 이곳에 수많은 파시어의 기억이 담겨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마법을 몰랐으니, 다시 멍하니 이 광경을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게 끝이다.

미련이 머릿속을 계속 간지럽혔다. 파시어의 얼굴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그녀가 좋았단 건 아니지만, 너무 오래 함께 있었다. 상실감이 머리를 가득 메웠다.

더 시간을 줄 수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그녀를 죽이기 전에, 조금만 더 망설였다면.

다시 한번 그녀를 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

나오는 것은 간단했다. 그저, 그 안에 들어가 있던 손을 살짝 빼 버리는 것으로 충분했다.

잠깐 흔들렸던 호수는, 이내 잠잠해졌다. 나는 다시 그녀의 방에 혼자 남았다.

"파시어..."

이렇게 힘들어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가 죽었다는 이유로 이렇게 멍해질 거라고는 상상도 해 보지 못했다.

그래서, 원망스러웠다. 대체 뭘 꾸미고 있길래 이런 짓을...

"왜?"

이상했다.

그녀가 뭘 원하든, 나와 척을 져야 할 이유는 없다. 그녀에게 시간은 무한하니까.

부와 명예, 권력은 이보다 훨씬 쉽고 간단한 방법으로 얻어낼 수 있는 그녀였다. 하다못해 제국의 황제가 되길 원한다 해도, 그녀에게는 기다린다는 선택지가 있었다.

내 귀환을 기다리거나, 하다못해 20~30년이 흘러 내가 늙어 힘이 없어졌을 때를 기다리거나.

그리고, 그마저도 말이 되지 않았다. 그녀가 오랜 시간 꿈꾸었던 염원을 포기해야 할 정도로 중요한 이유가, 그저 그런 세속적인 이유일 리 없었다.

어떤 식으로든 나와 관련되어 있다.

"이건..."

나를 죽이려던 건 아니다. 파시어의 마법은 매서웠지만, 항상 완벽을 추구하는 그녀다.

나를 죽이지 못할 어설픈 함정에 자신의 목숨을 걸 여자가 아니다.

"이것도..."

파시어는 이걸 내게서 숨기려 했다고 한다. 하지만, 왜 이런 무의미한 기억들을 내게서 숨기려 했을까.

여기에 유의미한 정보는 없다. 더 찾아보면 무언가 그럴듯한 걸 찾아낼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내가 여기에서 얻을 수 있었던 정보는 그녀와의 추억이 전부였다.

애초에, 그녀가 살아 있는 상태라면 내가 마탑에 들어오는 것도, 도착하기 전에 이 시설을 파기하는 것도 얼마든지 자유롭게 할 수 있을 터였다.

"죽음을... 자신이 죽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어?"

그렇다면, 그녀가 주위 사람들에게 해 왔던 당부는 그녀의 사후를 대비한 지시라는 뜻이었다.

물론 이 모든 게 그녀의 기만이고, 나를 이곳에 끌어들이기 위한 교묘한 술책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기에는 담겨 있는 기억이 영 애매모호했다. 마지막에 나를 고통스럽게 하거나, 후회하게 만드는 게 목적이었다면 굳이 이런 기억을 보여줄 이유가 없었다.

그녀와 내가 웃으며 대화했던 적이 아예 없던 건 아니었으니까. 오히려 그런 기억을 보여주는 게 내 마음을 더 흔들 수 있었을 것이다.

파시어를 죽였을 뿐, 나는 아직 아무런 답도 얻지 못했다.

내가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혼란 속에, 작은 희망이 샘솟았다.

지금 내 눈앞에 보이는 광경은, 그리 아름다운 모습이 아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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