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시어는, 죽을 준비를 마쳤다.
작은 마법사의 머릿속을, 수없이 많은 추억이 휘젓고 지나갔다. 영원히 이곳에 있고 싶다는 유혹이 그녀를 감쌌다.
하지만, 이제 가야 할 시간이었다. 파시어는 수직으로 뻗은 호수에서 빠져나온 뒤, 지하실로 발걸음을 돌렸다.
"에네렐..."
결정은 끝났다고 생각했지만, 아직도 그녀의 마음은 요동치고 있었다.
두렵다. 잃어버리는 것이 무섭다. 죽는 것이 두렵고, 더 이상 그를 보지 못하는 것이 무섭다.
그 마음을 억누른 채, 파시어는 발걸음을 움직였다. 도망치고 싶지 않았다.
지하실로 연결된 허름한 집 앞에 들어온 그녀는, 입 안에서 나지막이 주문을 외웠다.
파시어는 쓸데없는 변수를 만들고 싶지 않았다.
지하실의 문지기는 그 탐욕과 별개로 사리 분별을 할 줄 아는 인간이었지만, 그에게 그녀의 계획을 전부 알려 줄 생각도 없었다. 그가 필요한 만큼의 연기를 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녀가 이 안에 있다는 사실은 모르는 편이 좋았다. 에네렐과 마찰이 생겨 싸움이 날 수도 있었지만, 그라면 저 정도의 마법사에 패하지 않을 것이다.
저 마법사가 어떻게 될지는, 딱히 그녀가 알 바 아니었다.
순간 이동 마법을 통해 지하실로 들어간 파시어는, 수없이 많은 시체를 보며 회상에 잠겼다.
"이것 때문이었지..."
아이러니하게도, 에네렐이 여기 오는 것은 다 저 시체 때문이었다.
"그게, 그토록 중요했나..."
그녀도 옛날에는, 죽음을 막으려고 해 봤다. 병으로 죽는 사람들을 막기 위해 치료약을 연구하고, 치안을 어지럽히는 이들을 쓰러트리기 위해 범죄자 청소에 협력했다.
하지만, 달라지는 건 없었다. 한 명의 사람이 살아나면, 그 살아난 사람이 또 한 명의 인간을 죽였다.
지금 한 명의 사람이 죽지 않으면, 마치 그걸 벌충이라도 하는 것처럼 내일 두 명의 사람이 죽었다.
어느 순간부터, 효율을 따지게 되었다. 사람이 죽었다는 것에 슬퍼하는 대신, 지금 그가 살거나 죽었을 때 어떤 이익과 손해가 생기는지 계산했다.
그렇게 변했으니, 지금 그녀가 이 꼴이 되어버린 것이겠지만.
"그래도, 쓸데없는 희생은 원치 않았는데."
어디까지나 그녀의 자기만족일 뿐이지만, 사람을 죽일 생각은 없었다. 그래도, 사람이 죽을 수 있는 일이라고 해서 포기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녀는, 더 소중한 사람을 위해 일하고 있으니까.
"...결국, 여기까지 왔구나."
발소리가 들렸다. 고뇌로 가득 찬 숨소리가 들렸다.
파시어는, 표정을 날카롭게 다듬은 채 그를 불렀다.
그가 지하실에서 분노에 미쳐 날뛰었을 때, 셀리아는 순순히 자신의 몸을 내주었다.
그래서는 안 된다. 그의 성정을 생각해 보았을 때, 그렇게 순순히 자신의 죄를 인정한 사람의 목을 칠 리 없다.
더 철저하게 악역이 되어야 한다. 그를 적대하고 분노케 하여, 아무 가책 없이 그녀를 죽일 만한 이유를 만들어 줘야 한다.
"파시어."
그녀를 부르는 그의 목소리에, 작은 마법사는 조심스레 몸을 떨었다.
그가 그 실종 사건을 이렇게 집요하게 추적하여, 그녀를 찾아내는 것을 예측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미 벌어진 상황이라면 이용할 수 있었다. 곧 버릴 그녀의 몸뚱아리를 사용할 수 있었다.
그는 그녀에게 사건의 전말을 물었다. 파시어는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은 아픔을 참고, 준비해 놓았던 거짓 동기와 거짓 답변을 내뱉었다.
그렇게 해야, 그는 마지막에 '악한 마법사'에게 정의로운 복수를 행할 수 있을 테니까.
조금이라도 여지를 남기면 그의 자비가 눈을 흐리게 할 것이다. 어리석을 정도로 선한 마음이 그 검을 멈추게 만들 것이다.
그러니, 그를 편안하게 만들기 위해서 그녀는 사악한 마법사가 되어야 했다.
"나는, 너를 믿었는데..."
어지러웠다. 파시어는 그가 자신을 죽일 이유를 수도 없이 만들어 놓았지만, 아직도 그의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
"마술에는 희생이 필요한 법이지."
그가 어떤 말에 증오하는지, 수십, 수백 번 거울을 들여다본 그녀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행복했던 기억만 바라봤던 것이 아니다. 그가 괴로워하고 있던 기억, 슬퍼하던 기억들을 수도 없이 돌려 보았다.
그가 가장 혐오하는 것은 희생이었다. 마왕을 죽이기 위한 대의 하에 벌어지는, 당연하면서도 씁쓸한 희생. 남겨지는 사람들.
그는 그걸 두고 보지 못했고, 왜 구해 주지 않는 거냐며 소리쳤다.
용사라는 걸 알고 손바닥 뒤집듯 바뀐 그녀의 태도도, 그의 분노를 자극할 것이다.
화를 낼 것이다. 싸움 끝에, 그는 그녀를 죽이게 될 것이다.
"...너와의 인연은 이걸로 끝이다."
처음에는, 그녀의 계획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진짜 용사가 날뛰어 세상에 혼란을 가져온다면, 영생을 위한 계획 따위는 아무래도 좋은 일이 되고 말 테니까.
하지만, 흐르는 시간이 그녀의 마음을 바꿔놓았다.
되돌려 본 기억들은, 가뭄에 콩 나듯 나오는 '행복한' 기억들을 제외하면 전부 그를 멸시하는 내용뿐이었다.
구박하고, '없어도 되는 것' 취급하고, 작은 실수를 헤집어 상처를 벌리고.
마왕을 처단할 때까지 용케 참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아픈 기억들이었다. 그리고, 가해자는 그녀 자신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행을 떠난 그는 변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상관없는 사람들을 돕는다. 그의 책임이 아닌 일로 죽게 될 사람들을 살게 만든다.
금세 무너질 거라 생각했던 그의 정신은, 끝까지 버텼다. 흔들리지 않았다.
그건 현실에서는 존재할 수 없는 존재가 뿜어내는 광채 같았다. 이질감이 들고, 눈이 부시고,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따뜻해서.
반해 버렸다.
"유감이지만, 어쩌겠느냐? 이쯤에서 헤어지는 수밖에."
우습지만, 좋아하게 되어 버렸다. 그녀의 '효율적인' 삶의 목표 중 첫 순위에, 에네렐이 들어가 버리게 되었다.
하지만, '함께 행복하게'라는 셀리아의 망상이 얼마나 어설펐는지 파시어는 기억하고 있었다.
이 추악하고 어지러운 세상이, 결국 그의 기대를 받아 주지 못할 것을 알고 있었다.
돌아가야 한다. 그가 어떤 세계에 살고 있었든지, 적어도 이 세계보다는 훨씬 따뜻하고 아름다운 세상이었을 것이다.
돌려보내야 한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녀의 손에서, 마탄이 쏟아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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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룡의 심장은 구할 수 없다. 마룡은 존재하지 않으니까.
그렇다면, 만들면 된다. 영생 계획을 위해 소모되는 리소스를 전부 마력 생명체를 만드는 데 돌리고, 그래도 부족한 마법 재료들은 황제를 압박해 갈취하면 된다.
물론, 그 정도 방법으로 '진짜 용'을 만들 수 있었다면 제국의 황제는 용을 길들여 타고 다녔을 것이다. 그 방법으로 만들어지는 것은 불완전하고 어설픈, 껍데기만 흉내 낸 용일 뿐이다.
하지만, 마술의 근본은 기만이다.
사람의 머리 대신 둥글게 뭉친 밀가루 덩이를 제물로 바치는 것처럼, 어떻게든 용의 비늘을 긁어모으고 용이 뿜어내는 마력의 향취를 흉내 내는 것으로 충분하다.
오래 쓸 생각이 아니니 수명을 걱정할 필요도 없고, 번식을 기대한 것도 아니니 관련 기능을 넣을 필요도 없다.
그저, 곰의 가죽을 뒤집어쓴 인형처럼 '용 같기만' 하면 된다.
그렇게 용을 만든다 한들, 그게 마룡은 아니다. 마룡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고, 용이 악업을 이루는 과정이 필요했다.
하지만 파시어 정도의 숙련된 마법사라면, 그 과정을 대체하는 것이 가능하다.
'이미 죽어 있는 사람들'에 적당한 마술적 조작을 가해, '미친 용이 끔찍한 방법으로 이들을 죽였다.'라는 결과를 이끌어내는 것.
용이 깨어나는 순간, 그 계획이 실행될 것이다. 그리고 에네렐은 그렇게 마룡을 죽여, 그 심장을 얻은 다음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커흑, 흑, 흐읍..."
숨을 쉬지 못하는 상황이었지만, 파시어는 안도하고 있었다. 그녀의 계획은 모두 이루어졌다.
단 하나,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 있다면 에네렐의 슬픈 표정이었다. 좀 더 시원하고 기쁜 표정을 짓거나, 증오에 찬 얼굴을 하고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리고 믿을 수 없게도, 그 입에서는 용서의 말이 흘러나왔다. 도와주겠다는 말이 에네렐의 입에서 나오고 있었다.
상상도 하지 못했던 상황이었다. 그가 그녀를 더욱 더 혐오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녀를 죽이고 싶지 않을 거라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 없었다.
"그딴... 건, 이제 관심 없어..."
파시어는 진심을 내뱉었다. 모든 미련을 버렸다고 말한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그 비원은 이제 그녀의 손을 떠났다.
파시어가 살아서 그 비원을 달성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연구 자료는 남겨 놨으니, 후대에 누군가가 같은 목표를 가지고 움직이면 또 모르겠지만.
더 중요한 것이 생겼다. 그녀의 한계는 여기까지였다.
조급한 그의 목소리가 파시어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완벽한 성공이라고 생각했지만, 흔들리는 그의 마음을 보면 결국 어딘가에서 실수가 나왔다.
그는 항복하라며 윽박을 질렀지만, 파시어의 마음은 굳건했다.
"이 내가, 그럴 것 같나?"
그가 증오스러운 인간을 처단하고, 고향에 돌아가 행복을 누리는 것. 그걸 위해서는, 뭐든 할 수 있었다.
순식간에, 그의 검이 휘둘러졌다. 거대한 고통이 파시어의 머리를 덮쳤지만, 그녀는 입을 꽉 다문 채 비명을 참았다.
순간이었다. 어둠이 그녀를 감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