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작별을 앞둔 용사 파티가 내게 집착한다-158화 (158/217)

〈 158화 〉 안개­4

* * *

"다행이구나.안색이좋아졌어."

결의에찬셀리아의눈을훑어보던파시어는,조용히고개를끄덕였다.

"걱정해주셔서고마워요.하지만...그걸위해온건아니에요.애초에,저는행복해질자격이없는걸요."

파시어가씁쓸한웃음을지었다.

"괜한일을할필요는없다.너는이미모든것을바치지않았느냐?

마법이든,검이든,신성력이든,혹은권력이든.한분야에서정점에다다랐던인간은,어느순간그능력과자신을동일시하게된다.

파시어는그녀가얼마나큰희생을치렀는지이해할수있었다.짧은순간이었지만,큰결심이었다.

"그래도,잘찾아보면아직남은것이있지않을까요?"

파시어도,네르웬도심각한얼굴로셀리아를바라보고있었다.성녀였던소녀는,아무렇지않은듯밝은미소를지었다.

"계획은들었어요,마법에대해서는잘모르지만...제가도움이될수있지않을까요?"

마법사는침음성을흘렸다.

"네말이옳다.신성력을잃어버렸을뿐,네가가진성녀라는속성자체는변하지않았으니."

한번신의힘을받은이들은,신이그힘을거둬가더라도'신의힘을받을수있는사람'이라는속성이남는다.

커다란나무상자에담긴물을전부빼내더라도,그상자의크기자체가줄어들지는않는것처럼.

그리고만일그상자에물이아닌와인이몇년동안담겨있었다면,나무사이사이로포도냄새가배어있을것이다.

"나는마법사고,그걸이용할수있다.그점은부인하지않겠지만,이건..."

안색이좋아진셀리아와달리,그녀의상태는점차악화되고있었다.

팔이남아있는쪽,손가락끝에는검은색핏줄이울긋불긋솟아올라있었다,한쪽눈은아예감겨있었고,반대쪽눈은안의실핏줄이검게물들어있었다.

그럼에도불구하고,지금당장그녀를고통스럽게하는건그런사소한일이아니었다.

"너를쓰고싶지는않았어."

"저는,사용되고싶어요."

하지만셀리아의눈빛은굳건했다.파시어는,입술을꽉깨물고그녀를바라보았다.

"후회하지않을선택을해.넌아직젊고,기회는충분히많아."

"걱정해줘서고마워요.하지만...그래도꼭해야겠어요."

마지못해파시어가고개를끄덕였다.셀리아는평안한웃음으로화답했다.

하지만,그걸좋게볼수만은없는사람도있었다.

"그만들해.으으...난진짜모르겠다고.정말이방법밖에없어?"

조용히듣고있던네르웬이끼어들었다.

"방법은찾아보면나오겠지.그걸찾을시간이없을뿐."

파시어라면무언가방법이있을거라생각했던네르웬이었고,그때문에그녀를찾아왔던것이기도하다.

하지만,늘그랬듯이파시어의해결책은극단적이었다.

"이대로기다릴수있겠나?"

네르웬이절대그러지못할것이라고확신하는것처럼,파시어가이죽거렸다.

"어디한적한숲을돌아다니면서,아무렇지않게새로운사람을만나고,적당히자기배채울일을하고.그렇게몇년을기다릴수있겠냐는말이다."

"큭..."

좀익숙해졌다뿐이지,네르웬의상태도정상이라할수없었다.

무력감이유령처럼그녀의몸을감싸고있었다.

"그래도,자기몸은좀신경써.꼴이말이아니라고...불쾌한마기도얹혀있고.그거,쉽게씻겨지지않을거야."

"오래쓸생각이있었으면,이팔부터어떻게했겠지.얼마남지않았네.얼마남지않았어..."

파시어의작은몸이부르르떨렸다.네르웬이한숨을쉬었다.

"이러고있을틈이있어?어쨌든,에네렐은네가한일을싫어하고있단말이야.마탑이관련된것까지알아냈으니,당장이라도너를찾아올지도몰라."

네르웬은파시어를걱정하는마음에서꺼낸말이었지만,마법사는눈하나깜짝하지않았다.

"그런가...행운이따르는구나.좋다.이렇게효율적인전개,싫어하지않아..."

"이일의심각성을알고있는거야?"

"당연히알고있다마다.큰일을하는데,사소한희생을..."

파시어는목이막혀말을잇지못했다.여유로웠던얼굴이순식간에고통으로물들었다.

이를꽉악문그녀는,감고있던눈을떴다.흉흉한기운이그녀의주위를맴돌았다.

눈동자와눈동자가아닌부분을구별할수없을정도로,눈에난핏줄들이검게물들어있었다.

"두려워할이유는없지."

네르웬은,파시어의꽉쥔주먹에서피가흘러나오는것을볼수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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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걸원하셨던겁니까."

엘레노어는,이토록날선눈빛으로황제를바라볼날이있을거라고생각하지못했다.

"처음부터이럴생각인것은아니었다.하지만,일을그르친뒤에곰곰이생각해봤지.어떻게해야할것인가."

늙고야위었지만,황제는여전히황제였다.머리는굳고몸은쇠약해졌을지언정,그의지는생생하게살아있었다.

"황제폐하께서는...얼마나남은겁니까?"

"모르지.당장내일이될지도모르고,운이좋다면...일년은버텨줄지도.이제는,오직신만이알고계시다네."

복잡한감정이엘레노어의머릿속으로밀려들어왔다.

아버지가죽는다.죄를저지른것도아니고,싸움에서진것도아닌데,그저'너무오래있었다.'라는이유만으로

모든사람들의영생을바라던파시어의염원이어떤감정에서흘러나온건지,어렴풋이알것만같았다.

"왜이제서야...제게알려주신겁니까."

시간이더있었더라면.하다못해몇달,며칠전에이일을알았다면조금이라도마음을정리할수있었을텐데.

엘레노어의말에한탄이스며들어있었다.그녀가원한바는아니었지만,짙은원망이덕지덕지깔려있었다.

"미안하다,내딸아."

그걸아는황제는,고개를숙여사과했다.그작은움직임마저,그의수명을깎아내는것처럼보였다.

"차라리,제가그짐을지도록해주십시오."

엘레노어는조급한목소리로외쳤다.

그녀가황제의재목이아니라는사실은,이번사건을통해뼈저리게느꼈다.

에네렐처럼선하고조용한이의감정마저헤아리지못하는그녀가,제국전체의감정을어루만질수있을리없었다.

"그는...이걸기뻐하지않을거란말입니다."

마법으로움직이는수정구슬덕분에,그녀는황제와에네렐이나눈대화를속속들이들을수있었다.

그는잠시흔들리는것처럼보였지만,그건그의욕심때문이아니었다.황제의권세도,그막대한지배력과무한한힘마저그가바라고있던것이아니었다.

그를잠깐이나마멈춰세운건,그저의무때문이었다.제국과는아무런관련도없는그가,그선함으로인해스스로짊어진의무.

"그에게무엇을더바라십니까,그가얼마나더많은의무를짊어져야합니까!"

자기혐오였다.엘레노어는그녀가저질렀던죄를황제가또다시저지르는것을원치않았다.

"너는안된다,엘레노어.미안하다."

엘레노어는순간,그의눈에담겨있는시름과회한을느꼈다.그녀의분노를받아내는것조차어려울정도로노쇠한황제의모습을보았다.

"제게미안해하실일이아닙니다..."

하지만,그녀로서도물러설수없는일이었다.

"도대체왜그가아니면안되는겁니까.제가아니라도,제국에는황가의인간들이충분히남아있습니다."

"너도알지않느냐.그들이어떤인간인지."

황제는자식이없었다.지금남아있는,황제가될수있을법한황가의인간들은전부'선택받지못한'사람들이었다.

그들의권력이강해지는것은,자연스럽게현황제의권위를추락시키는일이었다.너무나당연하게도황제는그들이권력을갖지못하게막았다.

황가의인간들은그들의아버지나그들자신이황제가될수있었다는아쉬움에사로잡혔고,그에더해황제는그들을억누르기까지했다.

당연히그들은황제의원한을품고있었고,그원한만큼이나오만하고악랄해졌다.

"비록그들중에...모범이될만한자가없다는것은알고있습니다.그렇다한들,잘찾아보면뜻있는사람이나올수도..."

"찾는것도문제거니와,비록선하고강단있는자를찾는다해도무의미하다.그들은너무많고,당연히제국을분열시킬것이니."

황제의말을곱씹은엘레노어는,어렵사리그의말뜻을깨달을수있었다.

"강한황제가필요하군요."

"내가다음황제로누구를세우든,그와비슷비슷한계승권을가진황제지망생들이수도없이나타날것이다.동질감도있을테고,서로의약점도잘알고있을테니."

황가의사람들은어느정도동질감을가지고있지만,그중하나가황제라는직위를얻게되는순간그우정은눈녹듯사라질것이다.

"하지만용사는다르다.그힘만가지고있어도...거기에마탑과교단같은외부의지지를받는이상,그권위에대적하려면목숨을걸어야하지."

황제가아니었을때부터한번수도를뒤엎고,제국근위대에칼을휘둘렀던용사다.어지간히간이큰사람이라도쉽사리반역을일으키지못할것이다.

"그렇다한들..."

엘레노어는입술을깨물었다.왜다른황가의인간이아니라,그가황제가되어야하는지는알수있었다.

"왜제가그자리에설수없는지는말씀해주지않으셨습니다."

황제의얼굴에고통이번졌다.

"평생말하지않으려했었는데.거의다왔다고생각했는데..."

"들어야합니다.황제폐하...아버지."

황제는몇분간그녀의딸을바라보았다.때로는슬픔으로,때로는회한으로,때로는아픔으로.

"그건,황가의가호때문이다."

"그게도대체왜..."

"너는,황실의피를잇지않은사람이다.지금까지속여서미안했다,엘레노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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