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2화 〉 이름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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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미리준비해두신겁니까?"
내앞에가득쌓인서류의산에,나는말을잇지못했다.
"오라버니가돌아...나타나셨을때부터,저는어디까지나영주대리였으니까요.아직허가를받지못한영주대리."
그리넉넉한상황도아니었을텐데,그런악재가얼마나불편할지는말을하지않아도알수있었다.
상인과의계약이나교역,기사서임이나경비병고용까지.
이런사소하고세세한일에도내도움이필요할정도라면,얼마나이영지가아슬아슬한상황에놓여있었는지알수있었다.
몇시간동안비슷비슷한문서들을보고있는것은꽤지루한일이었다.이런일을한지오랜만이라더욱그랬던걸지도모른다.
황궁에서야도서관에들어가책을읽는것만이유일한낙이었고,이세계로들어올때언어와문자가통하게되는일종의가호같은것을받아그나마다행이었다.
"미안해요,오라버니.이렇게보니좀많은것같은데...그래도,여기있는건정말급한일들이어서..."
"괜찮아요.버틸만해요."
거짓말은아니었다.다소피로할지언정,나도이일을게을리하고싶지는않았다.
"오라버니의...생각이좀예상밖이었거든요.당연히영주자리를원할거라고생각했어요."
"뭐,각자사정이있으니까요."
그녀는나를내버려두고혼자일하고있는것이아니었다.오히려그반대였다.
단순히서류를읽고서명만하면되는나와달리,그녀는내서명이담긴서류하나하나를신줏단지처럼모시며뛰쳐나가그정책과계약을실현시키고있었으니까.
당장그녀가할수있는일이많았던것은아니었다.부하들에게명령을내리고,상인이나다른귀족들과만날약속을잡는것뿐이었다.그조차도쉽지않아보였다.
나보다더어린그녀가이렇게열심히하고있었는데,겨우이정도일이힘들다고도망치는건마음에들지않았다.
"이영지는마음에들지않으시나요?"
"그건아닙니다.뭘알정도로오래있었던것도아니고...아,이건축자재계약,이대로진행해도괜찮은겁니까?값이꽤나갈텐데요."
"이건...좀무리하긴하지만,당장필요한물건이에요.돈은황제폐하께서최근에지원해주신물자가있으니,어떻게든처리할수있고요."
"물자라니요?"
"이미알고계신것같았는데...에네렐남작에대한사과의의미로,황제폐하께서저희가문에상을내리셨거든요."
그건처음듣는말이었다.
"제가용사라는건...공공연히알려진모양이군요."
황제가쉽게인정하려들지않을거라생각했지만,그는의외로순순히내존재를인정한모양이었다.
내사건에대한보상을알지도못하는가문에내렸다는건좀언짢았지만,애초에그는내게해줄수있는게없었다.
"그래서하는말인데,마왕을처치할때는어떤기분이었나요?"
나는잠시입을다물었다.내게는예민한화제였지만,그녀와는어떤관계도없는일이었다.
"그건다른사람에게물어보는게더좋을겁니다.엘레노어나파시어에게요.저는,그렇게듣기좋은대답을해드릴수는없을것같군요."
어쩌면,그녀의생각도나와비슷했을지도모른다.성이보일무렵부터마기에머리가절여지는것같고,숨이턱턱막히는건다르지않았을테니까.
나는억지로시선을돌려다시서류를보았다.물레방앗간을만들고,들개에의한피해를막기위해경비를보강한다는평범하면서도실질적인계획.
사람들에게정말필요한일이었고,실질적으로중요한일들이었다.내서명하나로해결할수있다는게믿기지않을정도로."
"따,따로도장같은건없으세요?"
"그런걸만들만한위치는아니었습니다."
"저런..."
어느새산더미같이쌓였던서류더미들이사라졌다.그제서야안도의한숨을내쉰나는,일어나허리를쭉폈다.
"본의아니게폐를끼쳤네요.새영주가되실분이라면이정도는해야한다고생각했지만,아예관계없는분이라면..."
힘들었지만,기분나쁘지는않았다.일을하면서느끼는스트레스보다는효능이더컸다.
흉악하고거대한마물을죽여야하는것도아니고,누구의잘못인지생각하기어려운딜레마에빠진채누군가의물건을뺏어다른누군가에게나누어줄필요도없었다.
그저내가글자몇자를휘적이는것만으로도좋은일을할수있다는것은,오랜만에느껴보는편안한감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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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대로된방에서푹자고일어나자,몸의피로가풀리는느낌이었다.메이드는친절하고,방은사치스럽지않았지만깨끗하고잘관리되어있었다.
문을열고밖으로나오자,이제는익숙한얼굴의여자들이나를기다리고있었다.
"기다리고있었어?"
"그리오랜시간은아니었다.신경쓸필요없다,에네렐."
엘레노어의목소리에힘이실려있지않았다.
"언제쯤출발할생각인지물어보고싶어서왔다.다행히도레오드린영애와의대화는잘끝난것같지만,소식이없었기에..."
"내가해야할일이있어서,당분간은여기있어야할것같아.이것도따지고보면내잘못은아니지만."
"그게무슨말이냐?함께수도로돌아가는것아니었나?"
"이제는함께있을필요가없지.나때문에..."
수고했다고말하기에는그녀들에게당한게너무많았다.하지만많은것을잃어버린그녀들에게차갑게대하는것도편치않았다.
그냥,보고만있어도불편했다.
"오래붙잡혀있었지.이제갈길가라."
기뻐할거라고생각했지만,그들의표정은어두웠다.예상하지못한일이었다.
어쩌면,그들이기뻐하면내가기분나빠할지도몰라표정을숨기는것일지도모른다.
"벌써?"
"포기한건아니다.하지만,싸움이있을리없는상황에서서로지겨운얼굴보고있을필요는없잖아."
"우리가정보를찾기가장쉬운방법은,황궁도서관을뒤지는것이다.이런곳에서찾으려해봐야진전은없을거야."
"그럴수도있겠지만...그건이미황제가알아서하고있겠지.새로운정보가나오지는않을거야."
물론,모험가를더고용하고각지의학자들을긁어모으며,한문장,한단어로나온아주작고미세한흔적이라도찾아내겠다는각오로노력하면새로운무언가가나올수도있다.
하지만,지금당장은기다릴수있었다.
"영원히있을생각은없어.그래도당분간은내도움이필요하다고하니까."
"레오드린이라는가문의이름때문인가?하지만,너는아무런책임도지고있지않다.내가듣기로,그이름은황제폐하께서독단적으로너에게하사하신것아니냐."
"그래서?"
"...뭐?"
"내가속고있을가능성도아예없다고는할수없지만,그래도로렐은괜찮은사람이라고생각해."
사람을말로속이는건쉽다.예의바른태도를연기하거나,성실한척일하는모습을보여주는건쉽다.
하지만거기있던수많은서류들과안건들은,쉽게만들수있는것이아니었다.
내가어떤사람인지제대로된정보도없는로렐이다.영지에들어오자마자여자를탐할망나니인지,복수심에불타며당장병사를징병하라고요구할지모르는상황이다.
'영지민들을위해성실히일하는그녀'에게내가호감을느낄거라는근거없는가정을위해,그렇게많은결재서류들을준비시켜두고해결책까지만들어두는것은비현실적인가정이었다.
"윌리엄이있을때그랬던것처럼,도와줄거야."
엘레노어의목소리가점점작아졌다.
"영광이나권력을원한다면...더많은것을약속할수있었다.하지만그건네가원하는것이아니겠지."
"..."
"그럼에도불구하고,묻고싶다.그리큰영지가아닐지언정,네부담이덜할지언정그건책무고,일이다.그대의책임이아닌."
"그딴게왜중요하다고생각하는지는모르겠는데.내가오늘몇시간붙잡혀있는동안한일이적지않았어.설명하자면복잡한데,일단이가문의적법한계승자를나로인식하고있는사람들이있어서..."
엘레노어는상황의심각성을모르고있겠지만,분명로렐은급박해보였다.분위기를보아하니,어젯밤에는제대로잠을자지않았을지도모른다.
단순히개인의욕심을채우기위한일도아니었고,더가난하고더절박한사람을위한일을위해노력하고있었다.
"그건그리중요하지않은일이다.황제폐하의말몇마디면,그런사소한문제는순식간에해결할수있으니."
엘레노어는깊은한숨을쉬었다.곰곰이생각해보니,그녀의말이옳았다.
아무리쇠락한가문이라고는해도,황제의말한마디로사라진가문구성원을있는것처럼둔갑시킬수있는판국이다.
그딸인엘레노어라면,아무리논란이있다해도그런'사소한'일따위는얼마든지해결할수있었을것이다.
"하지만...알았다.네가어떤사람인지.덕분에결심을세울수있었어.받아들이겠다."
"떨어지는게결심까지해야할정도로거창한일인가?"
"그얘기는아니지만...알겠다.우리는먼저수도로돌아가겠다."
엘레노어는마지못해고개를끄덕였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다른 용사 파티원들도 심각한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말없이 그들에게서 등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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