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7화 〉 선수치기7
* * *
"그렇다면...받아들이겠습니다."
윌리엄은침을꿀꺽삼킨채사제의주문을기다렸다.
"많이아픕니까?'
"당신이아팠다면그렇겠죠."
사제의손끝에서붉은빛이아름답게새어나오고,다시흩어졌다.
그빛은윌리엄을감싸며,서서히그의의식을깊은곳으로떨어트렸다.
"이건..."
윌리엄의표정이구겨졌다.잊고있었던기억들이서서히떠오른다.
잔악무도한용병무리가보이는모든것을불태운다.왜죽어야하는지,저들이우리를왜죽이는지도모른다.
분명어제까지만해도함께웃고떠들며놀던사람들이마치장작처럼타들어가고있다.
두다리가잘린사람이엉금엉금기어가다가쓰러진다.그때는이해하지못했지만,아마너무많은피를흘렸기때문일것이다.
깔깔대며웃는자들은그게마치조롱거리라도되는것처럼,죽어가는이들의처절하고고통스러운비명을즐기고있다.
건물들이타오른다.저창고가완성되었을때,마을어른들과부모님이행복하게웃던기억은,어렸을때의윌리엄에게도선명하게남아있었다.
그노력의산물이,성실하게일하던사람들의피와땀이산산이조각나고있다.
하지만,윌리엄은떠올려버렸다.아직가장고통스러운기억은시작조차하지않았다는것을.
"안돼."
그의부모님이견디지못하고뛰쳐나온다.죽이기위해서도아니고,살기위해서도아니다.
윌리엄의친구한명이얼어붙은채아무것도하지못하고있자,그를숨기기위해집밖으로뛰쳐나와그를데리러나온것이다.
숨어있던윌리엄은아무것도하지못한채,그걸지켜보고있었다.
용병하나가그모습을발각했다.잠시멈춰그들을바라보던용병은,뒤에서들려오는목소리에다시검을들었다.
"이건안돼..."
소리치고싶었지만,입이열리지않았다.다리는얼어붙어움직이지않았다.
어머니를지키기위해앞서나온아버지의배에칼이박힌다.어렸을때는너무나도거대해보였던그의뒷모습이,너무나도허망하게무너진다.
어머니는도망치는대신그용병의멱살을잡았다.당황했는지용병은쓰러졌지만,이내검을들고어머니의목을찔렀다.
피가잔뜩묻은검이생명을관통한채솟아오른다.
"..."
죽이고싶다.으깨버리고싶다.이더러운용병들을,그녀의부모와마을을죽인이모든것들을없애버리고싶다.
이감정이,그때느꼈던감정이었다.
그때숨어있던그는,에리니스에게기도했다.복수를이룰힘을달라고.저들을모두죽일수있는능력을달라고.
하지만그때,야속하게도에리니스는응답하지않았다.지금은어쩔수없다는생각만머릿속을맴돌았었다.
하지만지금은달랐다.
기도하는윌리엄의머릿속에,에리니스의따뜻하고잔혹한목소리가울린다.
잘참았구나,강해졌구나,견뎌냈구나.따스한말들이그의행동을긍정하고있다.
소란이끝난뒤,살아남은윌리엄은도망쳤다.근처마을로도망간그는,어떻게든몸을단련하고기술을익혀모험가가되었다.
쉬운일은아니었지만,좋은사람들을만났다.천천히실력과경력을쌓아올린그는마왕군과의전투에서공을세웠고,그걸인정받아작위와영지까지받을수있었다.
이제그의앞날은창창했다.위험한곳이라고는하지만,슬기롭게대처하면그자신의목숨이위험할가능성은적었다.
이제와서복수따위에연연할필요는없었다.그는이미많은것을가지고있었다.새사람들,친구,가족같은파티원까지.
하지만다시처음으로돌아가보면,그렇게노력했던이유는단지살아남기위해서가아니었다.
그때봤던그용병이너무나도강인하고거대하고위협적으로느껴졌기때문에,복수하기위해서는강해질수밖에없다고여겼기때문이었다.
"그랬군요..."
환상은끝났다.윌리엄의눈앞에는그의집무실과늙은사제가있었다.
하지만눈이그것들을비출지언정,윌리엄의머리는그걸보고있지않았다.너무나도강렬한감정들이그의뇌를뒤흔들었다.
"어찌하시겠습니까?"
윌리엄은깊은한숨을쉬었다.
"이건...어쩔수없네요."
차라리이걸알지못했다면.기억속에잠재워두었다면더편했을것이다.
기억해버린순간,알아버린순간더이상행복해질수없었다.
현실에만족하며복수를포기한다면부모님의얼굴과그날의불타는광경이눈앞에아른거릴테고,복수를시작한다면지금가진모든것을내려놓아야할테니까.
"제가괜한짓을한걸지도모르겠군요."
"아니요.이건...필요했어요."
신의다.불타고있는마을의어린윌리엄과약속했던자는,에리니스가아니라미래의윌리엄이었다.과거의윌리엄에게빚을진지금의윌리엄.
"하죠.제가어떻게하면되는거죠?"
늙은사제는미소지었다.윌리엄의몸이신성한붉은빛으로은은하게빛나고있었다.
자신이겪은부당한일앞에서침묵하지않는자의눈이다.자신의감정을있는그대로받아들이고,다른무언가를희생할수있는각오가된사람의얼굴이다.
드디어그는에리니스안에서존재하는객체가되었다.사람이되었다.
"아니,그놈이어디있을지같은건직접찾아야하는건가요?뭐,너무많이바라는것도염치없긴하죠."
그러면서도구하지않는겸손함과의지까지.에리니스의사랑을받을자격이충만한사람이다.늙은사제는밝게웃었다.
"이미시작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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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리없어요."
애런이내말을믿기어려워하는것처럼,나도그녀의말을믿기어려웠다.
"영지의병사들은다여기에있습니다.제가아무리멍청하다고는해도,대규모병력이움직였다면알아챘을겁니다."
"처음부터제가맡은이들은용병이었답니다."
"저는레오네의소개를받고당신을방문했습니다.그들과먼저접촉했었어요!"
하지만자신만만하게웃을수는없었다.개인의압박감은세력의압박감을이길수없다.
"그렇군요.그럼어디한번보시겠습니까?그들이웨더가문의지시를우선시할지,당신의부탁을우선시할지."
레오네는말이통한다.울프도그럭저럭돈만있으면얘기를들어줄만하다.독전갈용병단의인간들은아예대장을갈아치운다는격한방법을썼으니어느정도는내영향력이먹힐것이다.
하지만이미의뢰가떨어진다음이라면,모든것은확신할수없었다.
"레오네는이걸원하지않는것같았는데..."
"책임질것없는사람이나할수있는안일한생각이에요.그녀는아름답고능력있고고귀하지만,섬기는주군은없죠.현실에서떨어진채용병놀음이나하고있으니까."
"친구인데,꽤신랄하시군요."
"그녀처럼순수한사람은악행을저지르지않는것이올바른귀족의능력이라생각하지만,현실은조금다르죠.악행을저지르고도그걸덮을친구들과명분을만들어두는게귀족의능력이랍니다."
나는침을꿀꺽삼켰다.여기서그녀가저지를악행이란단하나밖에없었다.
"우리가저지를습격에대비해미리그이유를준비하고그걸묵인해줄사람들을중앙에만드는일...저는그걸하고있었지요.용병에게돈을줘어디를습격하라는명령을내리는것보다훨씬중요한일을."
"하지만,당신이말한것처럼레오네는그걸꺼리고있습니다.방법이아예없다면모를까,잠깐기다리는것정도는..."
"무슨소리.저는,처음부터레오네를설득할생각따위는없었어요.그래서도안되고요.백조용병단을버림패로쓰는것은너무아까우니까요."
함정이다.그녀가이렇게자신의계획을세세하게털어놓을리가없다.
하지만,나는어느새애런의이야기를듣고있었다.그녀의이야기를반박하기에는정보가너무부족했다.
"습격은독전갈용병단과붉은늑대용병단의일부가하고,그혼란을막기위해영지병들과백조용병단이출전할거랍니다."
아.
생각해보니,좀이상했다.
울프에게다가갔을때는어떤용병단과함께움직여야한다고찍어주기까지했는데,다른두용병단은서로가작전에참여한다는것을모르고있었다.
백조용병단은그렇다치고,독전갈용병단의반응은너무이상했다.백조용병단과대화한번나눴다고바로나를죽이려했던극단주의자들이,아무리귀족이뒤에있다해도그들과협력할리없었다.
아예몰랐던거다.독전갈용병단이라는거대한인간들전부가버림패였으니,누구와협조해야한다는등의자질구레한사실을알려줄필요가없었던거다.
"이게...필요한일입니까?꼭?지금현실을살아가는사람들의목숨을버릴정도로?"
"당신도이상주의자인것같군요...반대로제가묻고싶네요."
긴장될때마다들이킨찻잔은어느새텅비어있었다.
"과거의일이기때문에넘어가야한다면,먼저잘못한사람이지나치게유리해지는것아닌가요?"
"..."
"이건저희들의정당한영토를되찾기위한노력이기도하지만,멸문당한가문의선조를위한복수이기도해요."
차마그렇다고말할수없었다.그녀가그들의선조에게공감하고있다면,내가그걸어리석은행동이라고말할권리는없다.
애초에,나부터누군가에게훈계를할수있는사람이아니었다.
"단지알드길드가먼저잘못했다는이유로그들을용서해야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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