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6화 〉 세계수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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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나뭇가지는 인간이라면 욕망을 가지고 있다고생각했다.
누군가를지배하고싶다는욕망은본질적인욕망이다. 인간이 그걸 버릴수 있을 리 없다고생각했다.
엘프가아름답게태어난것처럼,인간은그욕망을가지고태어난다.바뀔수없을거라고믿었다.
하지만,그남자의말은흰나뭇가지를충격에빠트렸다.
마법사의재주는놀라웠지만,정말엘프에게그가필요하다고생각했다면그피해를 감당해낼 수있었다.
악과의협상은없다. 엘프의목숨을쥔사람하나하나를상대로허리를 굽혔다면 세계수가남아나지않았을것이다.
엘프노예를가진자도,잡은자도그리적은수는아니었으니까.
하지만그는한걸음넘어서서 당당하게 엘프의오류를지적했다.
그렇다 한들 그게전부였다면 다른엘프장로들의반발을피하지못했을것이다.
엘프의가설이처음부터잘못되어있다고해도,용사인그가가장훌륭한실험대상이라는사실은변하지않는다.
이후에일반적인인간이나왕가의후예에대한연구를진행할지언정,당장세계수안에들어와엘프들의비밀을알아낸그를보내줘야할이유는없었다.
하지만흰나뭇가지가 관심을 가진 사실은, 엘프의 실험이 잘못되었다는 사소한 정보 따위가 아니었다.
"...정말괜찮은거맞아?"
무덤을파면서도그는꺼림칙함을감추지못했다.불사조의유해대신,귀중한부장품들이딸려나오고있었다.
"괜찮다."
"친구라며?왜나한테이렇게까지해주는거야?"
딸려나오는엘프의귀중품들에눈이멀법도한데,그는나쁜짓을하는어린아이처럼안절부절못하고있었다.
세계수앞에서수많은엘프들의앞에섰을때담대하고겁없이맞섰던남자라고는생각하지못할정도였다.
"나야말로묻고싶군.무슨생각이었나?네힘을그녀에게넘겨주었을때."
"싸울래?"
"질문에질문으로답하는것은미안하지만,꼭들어야하는이야기였기에어쩔수없었다."
흰나뭇가지는흙을어루만졌다.찌릿한저주의감촉사이로,치열한저항의흔적이느껴졌다.
"황제가설득했었어.막여기왔을때는...지금도그렇지만,나같은사람이용사여도되는건지몰랐으니까."
마왕이얼마나강한지,군단장이나거대한마수들이얼마나거대한지말로들을수밖에없었다.
"내가할수있을거라는생각이들지않았어."
이세상에서오직그만할수있는일이라면,에네렐은어떻게든해내기위해서노력했을것이다.
하지만그보다더적합한,준비된사람이있다면얘기가달랐다.자신이용사직위를유지하기위해노력하고집착하는것조차옳지않은행동이될수있었다.
"그리고,결국에는그힘없이여정에참여하게된건가?"
"용사의힘이라는게 한번에다들어오는식은아니었거든.여신이준비한공간에서추가로힘을얻는?파시어는봉인을푼다고표현했지만... 어쨌든그런절차가있었어."
"그건들어본적이있다."
"그때는내가필요했던 모양이더라.그것말고도 용사만깰수있는저주나봉인같은게있었고...결국,나도따라가게되었지."
흰나뭇가지는천천히끄덕였다.
"내친우는희생당했다.나대신저주에직격당해천천히죽어갔지.세계수가아니라이곳에묻힌것도,그저주를나무어머니께넘길수없었기때문이다."
"위대하신분이네."
"남겨진자들은모두그런희생속에서살아가는거다."
그녀는파헤쳐진부장물들을한곳에가지런히정리하며,지긋이에네렐을바라보았다.
"네가희생했던것처럼."
"그렇게까지말하기에는..."
"인간이힘을포기한다는것이얼마나어려운일인지잘알고있다."
그제서야에네렐은왜흰나뭇가지가그렇게갑작스레태도를바꿨는지이해할수있었다.
그녀에게자신은,더이상타인의희생에빚진목숨으로유세를떠는이기적인존재가아니었다.
다른상황에서다른방식으로희생한존재일뿐이었다.
"힘과권력에대한욕망을모두포기하고,그걸돌려받은지금도지배가아닌귀환을택했지.인간에게는분명쉽지않았을희생이다."
얼마전까지서로죽일듯이싸우던엘프가이런식으로자신을대하는것이,에네렐에게는영어색한상황이었다.
그런상황에서도묘한차별이남아있는것같았지만,적어도거기에는증오가남아있지않았다.기대치가낮으니 더작은선행에도크게반응하는느낌이들뿐이었다.
"분명 그녀가살아있었더라도기꺼이자신의몸을,친우를내주었을거다."
"불사조도그렇게생각할까?"
"누구보다그녀를잘이해하던영물이다.그녀와 다른 판단을 하는 일은 없었겠지."
순간,그가파고있는땅에서 은은한 열기와 고통스러운 저주가 느껴졌다.
"관같은건없어?"
"본래,엘프의장례는나무어머니옆에묻혀그녀의품으로돌아가는방식이다.부득이한사정으로세계수에묻히지못한엘프들도,흙과하나가되어땅으로돌아가도록하지."
"그래도..."
그가파고있던삽에서삐걱거리는감촉이느껴졌다.단순한돌이라기에는이질적인감각이었다.
"그렇다고한들,그녀는저주를품은몸.그걸봉인하는관에담겨있다.네가원하는불사조의유해도거기에있겠지."
어느새구덩이는사람의키를넘을정도로깊게파여있었다.퍼올린흙이작은봉우리를만들었다.
"이건가. 뼈를 건드리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에네렐이 삽으로조심스레흙을걷어내자,나무로만들어진원통형의관이보였다.
"저안에있을거다.혹시모르니방패를펼쳐라.이건내가대신열어주도록하지."
"필요없어.내가필요한물건이니까."
하지만,아직도그는그녀를온전히믿을수없었다.방패형상의검기도원하는대로만들수는없었지만, 여기서 그 사실을 드러내고 싶지는 않았다.
게다가이건 그가해야할일이었다. 에네렐은 더이상그녀에게도움받고싶지않았다.
하지만조심스레관을파내고난뒤,그는아쉬운소리를할수밖에없었다.
"이거...어떻게여는거지?"
완벽하게 닫혀 있는 원통형의 나무 고치는, 단순히 힘으로 들어서 분리될 물건이 아니었다.
"당연히열수없다.이건관이아니라봉인구고,관을짤때도열리기를바라고짜는건아니니까."
그녀는아무렇지않은듯단검을꺼내,조심스레그나무고치를잘랐다.
안에서뿜어져나오는꿉꿉한저주의감촉을견뎌낸에네렐은 그안에서불이잠들어있음을느꼈다.
아니,다시생각해보면그걸볼이라고여길이유는어디에도없었다.붉은색도아니었고 타오르지도않았다.
열기가약간맴돌았지만,불이라고하기에는너무미약했다.무언가를 태우지도 않았고 손을가져다대도데일것같지않았다.
"...사라졌나."
"빈건가?도굴은아닐것같은데..."
"나도직접본것은처음이다.흙으로도,세계수로도돌아가지못하는엘프가,시간이지났을때어떻게되는지보게된것은."
엘프는 눈을 감았다. 에네렐은잠시숨을멈춰,그녀가친구를추모하도록기다려주었다.
"저주는괜찮나?버티기힘들텐데."
"조금아프긴하지만,이정도면뭐."
흰나뭇가지는조심스레그안에있는재를들어,그의손에올려주었다. 본능적으로 그게 중요한 물건이라는 것을 느낀 에네렐은 조심스레 두 손을 모아 재를 받았다.
"떠,떨어지는데?"
"굳이다담으려할필요는없다.취급에주의해라.아주작은불씨만다시타오른다면,이아이는기다렸다는듯이타오를테니."
"파시어에게맡길생각이었어."
"그거면충분하다."
흰나뭇가지가마술에전문적인지식을가지고있던건아니었지만,그래도오랜세월동안주워들은지식이있었다.
"고향으로돌아가는여정동안,이게너를지켜줄거다."
불사조의유해를마법에쓴사례는거의없었지만,만약에사용하려한다면그목적은분명했다.
어떻게봐도,이다타고남은재가의미하는상징은분명했으니까.
"어떻게?"
"재생이다.절대적인,마치세상의법칙의일부라도된것처럼조건없이이루어지는재생과복원."
"...그런의미였나."
구덩이위에서안절부절못하고기다리던파시어가,천천히마법으로불사조의유해를가져가통에넣었다.
"꽤오래나온것같은데,괜찮아?세계수밖으로나가면큰일나는거아니었어?"
"싸울수는없지만,그저이대로앉아있는것은상관없다.아니,당분간은여기머물러야한다."
"왜?"
흰나뭇가지는그흙가운데주저앉은채,조심스레나무관을쓰다듬었다.
이제는저주외에아무것도남지않은,텅빈나무관을.
"새로운봉인구...관이나올때까지이저주를억제해야하니까."
에네렐은얼굴을찡그리더니,힘겹게툭말을던졌다.
"나때문인가?"
"네가원했던일이지만 내가허락한일이다.내친구의희생을,내아픔을통해네가편안해진다면그걸로좋다."
"얼마나있어야하는건데?"
"오래걸리지는않을거다.그저사악한기운을묶을수있으면충분한물건이니까.일주일정도면되겠지."
'엘프의시간관념'이들어간답변은아니었다.그가잠시침묵하는사이,흰나뭇가지가나지막이말을걸었다.
"꼭돌아가라."
에네렐은말없이고개를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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