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5화 〉 세계수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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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일이...일어난거예요?"
어리둥절해진셀리아가고개를갸웃거렸다.하지만,나는파시어를믿고있었다.
그녀의인성이라면모를까,실력이라면의심할이유가없었으니까.
"왜이렇게늦어졌던거지?"
"싸움터가이런곳이라고는생각도하지못했느니라.밖에서전개해둔주문에연결할방법이없었으니...뭐,지금은해결했지만."
안도의한숨을쉬는엘프들도있었지만,흰나뭇가지의표정은펴지지않았다.
마법은대가없이만들어지지도않지만 대가없이사라지지도않는다.
당장 눈에 보이는 변화가 없다고 해도, 그녀가실패했을리가없었다.
"큰일났습니다!하늘위에,거대한..."
이소란을구경하고있지않은엘프중하나가다급하게다가왔다.
"역시,이안에서도밖을관측할수단정도는있는모양이구나."
파시어의자신만만한웃음에 흰나뭇가지의얼굴이더욱찡그려졌다.
"무슨짓이냐..."
"나무안에너무오래살아서잊고있었던거냐?그럴나이가되긴했지...설명해주마.이건불덩이라는거다.나무를태우지."
어린 놈취급당한게여간분했는지,파시어는히죽거리며승리의미소를지었다.
"세계수에그런저급한불은먹히지않는다!"
"그래.불덩이가있는곳은,저위다."
마법은정상적으로작동하고있었다.그저,세계수밖에만들어졌기에안에서확인할방법이없었을뿐이다.
"이주먹을펴는순간,이거대한숲에화염이비처럼내릴거다.어디 그잘난세계수의내열성을시험해 보겠느냐? 이 숲이 얼마나 불에 버틸 수 있는까... 궁금하구나. 어디부터타고,어디부터타지않을지."
"수많은엘프가죽게될거다!"
"그러니까,그렇게하지않을수있지않으냐.에네렐을보내 주거라.우리가무리한요구를하는것은아닌것같은데?"
처음부터이걸믿고있었다.엘프의전력이이정도일거라고는생각하지못했지만,일이수틀렸을때앞에보이는모든사람을죽이면서빠져나갈생각은없었다.
"불로엘프들을위협하려했던사람이,네가처음일거라고는생각하지마라!"
"물론그렇겠지.그들중나정도의마법사가 마을안에들어와서시전한마법도있었나?"
이제상황을주도하고있는쪽은우리였다.
흰나뭇가지가혼자싸우겠다고한것은그녀의자비혹은오만이었겠지만,이제여기있는모든엘프가달려들어도우리의협상력이사라지지않는다.
"대비는꽤잘되어있는것같지만...내부에서의공격이다.완벽하지는않을 테지."
그저불을쏟아내는것보다,그걸필요한순간에떨어지도록억제하는것이더어렵다.
그걸드러내면서도,통제권을유지하고있는것은더욱어렵다.
파시어가 아니면 생각조차 할 수 없는 거대한 마법이었다.
"지금나를죽인다해도불은떨어질거다.우리를보내주면 이마법은적당히치워두도록하지."
"엘프가,협박에굴할것같으냐..."
그리고시간이필요한건,파시어뿐만이아니었다.
그녀가꽤많은시간을끌어준덕에,나도숨을돌릴수있었다.
"그래.처음부터완전히무의미한짓을하고있었으니까."
선택의문제가아니다.현실은트롤리딜레마가아니다.
"인간따위가우리의고뇌를이해할수있을거라고는,처음부터기대도하지않았다!"
"너희들의고뇌를이해하고말고할것도없어.용사파티는우리고,그힘에대해잘알고있는사람도우리야."
정보의차이다.
저엘프들이조금이라도더대화를시도했으면생겨나지않았을정보의차이.
"끝까지...우리연구원들이얼마나많은용사를보아왔다고생각하나?"
"어떻게그런자료를가지고도틀릴수있는거야?"
"그럴리없다!"
가치의문제가아니라,사실의문제다.세계수안에틀어박혀있는엘프들은 아주중요한사실하나를듣지못했다.
"너희들은용사의몸의...수용능력을조사하고싶다고했었지."
"그렇다만."
"애초에,그게존재하는개념이기는해?용사가무언가특별한힘이있어서,신이내리는힘을더쉽게받을수있는게맞아?"
"나는연구원이아니기에정확한답을내려줄수는없다.하지만,그가설이굉장히유력하게받아들여지고있다는사실은안다."
"그러면 나말고저친구를조사해봐야할것같은데?"
나는엘레노어를가리켰다.
"무슨소리냐?"
"나는용사의힘을제대로써본적이없었어.소환되자마자모든힘을그녀에게넘겨주었지."
엘프들이이걸백퍼센트알고있었을거라고는생각하지않았다.
네르웬이어느정도이야기를해둔것같지만,그래도깊게받아들이지않았을것이다.
"그녀는마왕을잡을때까지용사처럼힘을썼어.지금의나보다몇배는강했지.그러면,용사인내가아닌엘레노어쪽을조사해보는게맞지않나?"
에이린이사색이된얼굴로주저앉았다.
"요,용사의힘의일부라면..."
"아니,그건전부였다.너희들이정말신의힘을받아들이는능력에관해연구하고있는거라면,그건별로특별한게아닐수도있어."
그녀가용사의힘을전부끌어다썼다고는생각하지못했을것이다.아니면,네르웬이용사를괴롭혔다는사실에매몰되어진실을보지못했을수도있다.
그것도아니라면,이'용사인자획득프로젝트'가너무오랜시간동안이루어져왔기에당연히옳다고생각했을지도모른다.
"이유는모르지.그냥인간이면상관없는걸수도있고,엘레노어도황가의후손이니...용사의먼후손이기때문에그런힘을가지고있는것일지도모르고."
하지만이유가뭐든상관없다.중요한건,엘프들의생각이근본적으로틀려있다는사실이었으니까.
개입하는여신의의지가중요한걸지도모르고,조건이필요하지만그리까다롭거나희귀한조건이아닐가능성도있었다.
"어쨌든,처음부터잘못된방식으로접근하고있었던것같은데."
과거에그들이얼마나그방식으로성공했는지는모른다.정보를얻어,새로운생명을만드는엘프의방식은분명놀라웠다.
하지만,지금엘프의방식은올바른접근이아니다.
"...처음부터,용사의힘을넘겨주었다는건가?왜?"
"...싸우기싫었으니까."
흰나뭇가지는고개를숙인채,작은목소리로내게물었다.
"어째서?네게주어진힘일텐데.왜 그걸 포기한 거냐. 겁이 많은 것 같지는... 그리고, 용사의 여정에도 참여했으면서."
"나보다더잘싸울수있는사람이있었잖아."
적어도그때는,그게최선의판단이라고생각했다.
더준비된사람,더강한사람,더올곧은사람이용사의힘을가져가는것을당연하게생각했다.
"마왕을죽이기위해자신의힘을포기했다는건가?"
"...그런셈이지."
중요한얘기도아니었다.지금다시떠올리고싶은일도아니었다.
"그다음에좀...파티안에서복잡한일이있었지만."
다른파티원들의표정이천천히어두워졌다.그분위기를눈치챘는지,흰나뭇가지는고개를끄덕였다.
"그런가.너는,세계를위해서희생한사람이구나..."
"그걸희생이라고말할수있는지는모르겠지만,일단은그렇지."
용사파티가내게가한괴롭힘은내상상을넘어섰다.내인내력은귀환이실패한순간부터산산이흩어져,이제흔적조차남지않았다.
"어쨌든,세계에무슨멸망이닥치건처음부터다시생각해.다른방법이있겠지."
전의를잃은것같았다.주위의엘프들도서로속닥이며의견을교환할뿐,적의는느껴지지않았다.
"가자."
퇴로를막고있던나무줄기들이서서히줄어들어공간을만들어주었다.
"인정했다는뜻으로알겠다."
"...잠깐."
흰나뭇가지의목소리가들리자,잠깐풀어진몸에다시긴장이들어갔다.
"아직할말이남았나?"
"아니.그대를적대할생각은없다.그눈을 보면, 거짓을말하는것은아닌 것 같으니. 나는그대를존중하겠다."
"그럼뭐지?"
"기껏여기까지왔는데 빈손으로갈필요는없겠지.따라와라."
몸에박힌화살을억지로뽑아낸그녀는,비틀거리며이쪽으로걸어왔다.
"불사조의유해,찾고있던것아니었나."
"...정보를줄생각이야?"
"확실하게,불사조가묻혀있는곳을알고있다."
그녀의흐릿한눈동자가어지러이흔들렸다.마치,먼과거의일을회상하고있는것처럼.
"무덤으로,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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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나뭇가지는희미해지는의식을억지로잡아끌고,세계수밖으로나와걸었다.
걸어가는 도중, 네르웬에게서자세한이야기를들을수있었다.
여행이끝나는순간까지그들은그남자가용사라는사실을알지못했으며,괴롭힘과의견충돌속에서그는묵묵히버텼다는사실을.
"불사조는 그들이원하는한죽지않는다.타락하거나깊은잠에빠질때도있지만,죽지는않는다."
"그러면불사조의유해는대체어떻게구하는건데?"
"죽음을택하는불사조가있다.그삶의마지막이 지금 이순간이기를 간절히원하는불사조가 있다. 헤어짐을인정하지못하고,세상에남겨지는것을거부한새가 있다."
머나먼과거를떠올린흰나뭇가지는,세계수에서그리멀리떨어지지않은친우의무덤으로걸어갔다.
"파라."
잠깐얼굴을일그러트린에네렐이었지만,준비해둔삽으로천천히그녀가지목한곳을파내려가기시작했다.
"이거,새의무덤이아닌것같은데..."
"옳다.그불사조는혼자묻히지않았으니까.이건내친우의무덤이다."
"이대로파도되는거맞아?"
"스스로를희생한,내가본이들중가장숭고한엘프였다."
미래에태어날이들을위해,자기뒤에있는사람들을위해죽은엘프였다.
"너같은사람을위해희생하는거라면,아깝게여기지않겠지."
땅을팔때마다끔찍한저주가새어나왔다.흰나뭇가지의눈과팔에있던것과같은종류의저주가.
안대속에숨어있는한쪽눈에서,작은눈물이흘러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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