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3화 〉 세계수13
* * *
"셀리아!"
곧바로검을휘둘렀다.셀리아의상처는,파티원전부를긴장시켰다.
성녀의 치유가 있는 한, 치명적이지 않은 피해는 견디고 싸울 수있었다.평범한성직자보다압도적으로우월한신성력으로,죽기직전의상처까지순식간에치료해낼수있는그녀였으니까.
그래서그녀가먼저쓰러졌을때는,파티의기본전략이무너진다.엘레노어를앞세워최대한버티고적을쓰러트리다가,마법사의대마술로약한적들을정리하고길을뚫는다는기본적인전제가사라져버린다.
"음,이건좀아팠구나."
셀리아에집중하느라잠깐빈틈이생겼는지,내검은그녀의등을깊게가르고내려왔다.완전무결해보이던그녀의몸에도상처가생겼다.
베인다.피를흘린다.아무리강한엘프라고해도 검에직격당하면타격을입는다.
하지만그걸다행이라고말할수는없었다.비명조차지르지못하고쓰러진셀리아의등에는 셀수없는상처가그려져있었으니까.
"흐읍!"
최대한강하게검을휘둘렀다.놀랍게도,그녀의단검은내성검을막지못했다.
아니,그녀가막지않은것이었다.마치엘레노어가그랬던것처럼,그녀는내힘에억지로저항하려들지않았다.
그저그유연하고재빠른몸을비틀어느릿해진검을피한다음,다른손에쥔단검으로내팔을긁었다.
"크읏..."
화끈거리는감각에잠시몸을떨었다. 하지만 머뭇거리기에는그녀의속도가너무빨랐다.
"엄호하겠다!"
네르웬이화살세개를연이어쏘았다.
분명피할곳이없다고생각했지만,흰나뭇가지는거기에힘이실려있지않다는사실을깨달았는지단검으로가볍게튕겨냈다.
"그만항복해라.나는다른이를죽이는것에는능해도,제압하는것에는능하지않다."
"절대..."
그녀는이해할수없다는눈빛으로나를바라보더니,다시검을휘둘렀다.
그녀의단검과내검이부딪혔다.속도를따라잡기어려웠다.
잠시대치가이어졌다.하지만대치라고부르기에는부끄러울수준의싸움이었다.
셀리아의지원과치료는사라졌고,파시어와네르웬의장거리공격은충분하지않았다.
결국빈틈이생길수밖에없었고,그때마다흰나뭇가지는꼬박꼬박내몸에상처를만들었다.
하나둘씩옷이찢어진다.얇고예리한칼날이내몸에 흔적을남긴다.
몸에서피가빠져나가는게느껴진다.그녀의속도를따라잡지못하고있다.
시간이 흐를 수록 정신이 흐릿해진다.
"거기까지...하십시오!"
하지만,그상태가계속이어지지는않았다.
언젠가부터그녀의공격이덜치명적으로다가왔다.
엘레노어의검이,어느새그녀를묶고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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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나뭇가지는어느순간,그녀의검이막혔다는것을느낄수있었다.
아직최선을다하고있는것은아니다.한명도죽이지않기위해,죽을힘을다해노력하고있는그녀였으니까.
극단적으로는 용사외의전원이죽어도상관없다.하지만여기서씻을수없는원한을사버린다면,결국에이린이원하는평화는이룩해내지못할것이다.
등의일격을허용한것도그때문이었다.단지성녀의목숨만을취하고자했다면,단검을휘적거리며많은상처를만들필요가없었다. 충분한 피를 흘리고 다시 일어나지 못하되, 죽지는 않을 정도로 힘 조절을 한 것이었다.
하지만 아무리그녀가손대중을해줬다고해도,성녀의목숨은경각에달해있었다.저상태로몇시간,혹은몇십분만더피를흘려도죽게될것이다.
그런상황인데도고집을굽히지않는그를보았을때는,한숨이절로새어나왔다.다친사람이그가아니었기에오기를부리는거라생각했다.
하지만그의팔과다리,등과얼굴에붉은선이그어진지금도 그는포기하지않았다.
"하아아아!"
그리고저황녀의검술은,말그대로달인의경지에닿아있었다.
아무리'강하게 태어나는 법'을알고있는엘프라고해도,안정성과자원을생각하면강함의한계는존재한다.
하지만인간은그탄생을혼돈속에맡기는대신 때로는감히상상하기어려울만큼뛰어난천재들이등장하곤한다.
재능이달랐다.노력과경험도인간치고는엄청났다.
분명,그녀보다빠른적이나힘이강한적과맞서싸운경험이많았을것이다.
적응하고있다.그짧은시간동안,그녀의검에익숙해지고 있었다.
이대로는 대치가 길어질 게 뻔했다. 성녀가 쓰러져 있으니 결국 이 상태를 유지하기만 해도 흰 나뭇가지가 승리하겠지만, 싸움이 길어지면 어떤 변수가 생길지 모른다.
"음?"
성녀는쓰러졌고,지금적은엘프하나와마법사하나,검사와용사네명이다.
하지만순간,흰나뭇가지는섬뜩한기색을느꼈다. 시선이 느껴졌다.
"피...났잖아요.우리남작님,아니용사님이..."
셀리아가 그녀를보고있었다.
그녀는 엉금엉금기어가는것같더니,어느샌가무릎을짚고일어나섰다.
"이런."
흰나뭇가지의경험상,성직자는그들이믿는신이누구냐에상관없이죄다미쳐있는자들이었다.
그리고, 좀더많이미쳐있는성직자일수록위험했다.
"여신이시여,도와주소서..."
그녀는신을부르고힘을얻었지만,저힘에는신이개입되어있지않았다.
하지만성녀의몸을타고흐르는막대한신성력은 불길할정도로거대했다.
"필요한자에게안식을!"
감정의크기가다르다.기쁨의감정이든슬픔의감정이든,고통이든연민이든그녀가느끼는감정이더크고강렬하다.
그리고신성주문은 그감정의영향을받는다.
"왜,왜에네렐을가만놔두지못하는거야?"
마치지금까지힘을숨겼다는것처럼 미친듯이신성력이뿜어져나온다.
그녀의몸에붙어있던피가말라붙었다.에네렐의몸이곳저곳에생긴상처들이순식간에아문다.
"이제야,겨우다시..."
필사적이다.
이들이단순히자존심이나취향때문에싸우는것이아니라는사실을,흰나뭇가지는인정해야했다.
"왜냐?"
엘프들의영웅이다.신화속에서만듣던전설적인엘프다.
그녀와눈을마주치는것만으로도네르웬은주눅들수밖에없었다.
하지만 다시고개를든다.
"에네렐이인정하지못하는일을,제가인정할수는없습니다."
사랑이라는것은가볍게다루어질감정이아니다.그걸강제로주입한결과, 엘프의본분마저누를수있을정도로강렬한고집을만들었다.
"그렇다면그대에게묻겠다.무엇때문에싸우는가?"
용사의눈을똑바로바라본흰나뭇가지는,그가불타고있다는것을알았다.
의식을잃지않는한포기하지않을것이다.한쪽팔이나다리를날려버린다해도,끔찍한고통을안겨주어도멈추지않은사람의눈이다.
"그건,안되는일이니까."
"무엇이?"
"전부다!사람에게감정을부여해서누군가를사랑하게하고,그마저도실패해서증오하게하고!"
그는똑바로서있었다.조금의흔들림도없이 발을 디디고 서 있었다.
"미래를위해누군가를희생시키고,희생시키기위해누군가를만들고,희생하지않았다며비난하는것전부가!"
"너는저엘프를싫어하던것아니었나?"
"그딴것과는상관없이,일어나서는안될일이라고!절대,절대인정할수없어!"
빛을잃었다고생각했던성검이 아주잠깐파랗게반짝였다.
"그런가.한사람의전사로서 그대를존중하겠다."
흰나뭇가지는손에힘을풀어 두자루의단검을떨어뜨렸다.
"하지만,나또한인정할수없다."
살아있는존재라면,결국누군가를희생시켜야한다.
인간이그들보다열등한짐승들의고기를먹어더고귀한그들의삶을유지하는것처럼.
엘프는더고귀한가치를위해.이세계의운명과안녕을위해스스로를희생시킨다. 다른 이들을 희생시킨다.
수많은동료들이그렇게희생되었다.
"한순간도,세계수로돌아가고싶지않았던적이없었다."
"무슨..."
"다시흙으로돌아가,썩어,저주에고통받지않는육신에서벗어나나무어머니의품에안기는그날을.고대하지않은적이없었다."
하지만흰나뭇가지에게는안식이주어지지않았다.그녀가필요한일이있었다.아득한미래일지언정,그때그녀의쓰임을위해그녀는살아있어야했다.
삶에 고통받아야했다.곁에있던엘프들이사라지는동안슬픔을느껴야 했다.
때로는과거의모험들을떠올린다. 그 마지막에는, 그들중아무도곁에없다는사실을자각했을때느껴지는무한한고독과공허를받아들여야 했다.
"힘조절을할필요는없겠구나.목을노리지만않으면,저성녀의도움을받을수있겠지."
그녀는활을뽑아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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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다!"
네르웬이다급하게소리쳤다.
격차가너무심했다.그녀의위치를파악하고바로화살을날렸지만 그녀의움직임이더빨랐다.
"크으으으으..."
셀리아의반응도빨랐다.넘쳐흐르는신성력을이용해,무려엘프의속도에반응해방어막을둘렀으니까.
정확히는화살을보고두른방어막이아니라,활을빼드는것을보고친방어막이었지만.
하지만 그것도화살을완전히막아낼수는없었다.궤도가약간비틀어졌을뿐,화살은엘레노어를아슬아슬하게스치고지나갔다.
"파시어!아직이냐!"
"조금,조금만더있으면돼!"
참지못한에네렐이소리를 질렀다.방패를준비한파티원은없었다.지금도다리가부서지도록흰나뭇가지를쫓아가고있었지만,아직멀었다.
한발,두발,세발.
일초도되지않는순간에수많은화살이급소로날아왔다.그리고그중하나는,네르웬의허벅지를뚫고들어갔다.
"시간을..."
헐떡거리고있는에네렐에게,오랜만에듣는밝은목소리가들려왔다.
검이빛나고있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