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2화 〉 세계수12
* * *
잠깐정신을차린순간,흰나뭇가지는내앞에있었다.
마치 처음부터그곳에있었던것처럼.아무런전조도,거친움직임이나바람소리도없이.
"큭!"
반사적으로검을휘둘렀지만,제대로된자세가나올리없었다.
"이번대의용사는 이정도인가?생각보다마왕이약했나?"
그녀의단검은너무나도간단하게내검을막아냈다.
힘자체로는밀리지않았다.한번맞부딪힌검은,어느한쪽으로쉽게기울지않았다.
그건, 결국내패배다.
방금그녀가이동한속도로내게달려오는게아니라,뒤로거리를벌렸다면.
네르웬의화살이날아가는속도는경이로운수준이었다.저엘프가네르웬보다느릴거라는생각은하지않았다.
그녀에게이건필사적인싸움이아니라는뜻이었다.
"에네렐!"
네르웬의화살이그아슬아슬한균형을깨트렸다.하지만,흰나뭇가지는그저고개를슬쩍흔드는것으로그화살을피해냈다.
자세도흐트러지지않았다.내검을짓누르는단검에는조금의힘도가감되지않았다.
"결국싸우겠다는거냐,좋다.무익한싸움이지만,해보거라."
정신을차린다른일행들이각자무기를휘둘렀다.셀리아의신성주문이내몸과검에깃들어힘을보태주었고,파시어의마법이화염으로된장판을만들었다.
"하지만합의없이는서로아무것도얻을수없겠지.내기를하자."
두걸음물러난흰나뭇가지는,활을뽑을생각도하지않은채내게말했다.
"...내기?"
"나는혼자싸우겠다.다른엘프들을대동하지않고,이검과활로너희들을제압하마.내가지면너희들을보내주고,그...귀환에필요한정보도약속하겠다."
말도안될정도로관대한제안이었다.흰나뭇가지는이런협상을해야할이유가없었다.
이곳은세계수안이고,그녀외에도수많은엘프들이있다.
그녀보다강한엘프가있을거라고는상상하기어려웠지만,네르웬급의엘프가한명,아니두명만더붙어도우리들의몸에화살비가내릴것이다.
"대신너희들이제압당한다면 순순히요구를받아들여라."
마치어린아이를달래는것처럼,그녀는우리에게지나칠정도로유리한조건을걸었다.
"...그래."
"그리고,불은의미없을거다."
바닥에깔린파시어의화염은순식간에열기를잃었다.주변이조금눅눅해졌다.
"역시불로는안되는게냐..."
"그래.이곳을위협한자는너희들뿐만이아니었으니까.그정도대책은세워놓았지."
내파티는,다시자세를잡았다.
네르웬은살짝후방에서서흰나뭇가지에게활을겨눴고,엘레노어는내옆에붙어나를지킬준비를했다.
파시어와셀리아는나와네르웬사이쯤에자세를잡고,흰나뭇가지의공격에대비했다.
"다시가겠다."
"그래!"
나는싸늘한직감에몸을맡겨허공에검을휘둘렀다.놀랍게도,걸리는감각이있었다.
내검을사선에서막고있는것은,흰나뭇가지의단검이었다.
다시내앞에나타난흰나뭇가지는다시나와검을맞대고있었다.
이번에는보였다.저건순간이동이나그비슷한무언가가아니었다.
내가인지하지못할정도로빠르게,용사의힘을써서겨우느낄수있을정도의속도로움직이고있을뿐이었다.
"운인가?뭐,아무래도좋다.그걸네실력이아니라고깎아내릴이유는없겠지.하지만."
순간,흰나뭇가지가사라졌다.잔뜩힘을준내검은우스꽝스럽게허공을갈랐고,그녀의단검이내심장으로다가왔다.
"잠시,쓰러져있거라."
잠깐몸의중심을잃어버렸다. 그빈틈을막아준건엘레노어였다.
순간스쳐지나간그녀의뒷모습이,갑옷을입고검을휘두르는모습이,과거를떠올리게만들었다.
/////
엘레노어는,흰나뭇가지의생각을이해할수있었다.
힘에는책임이따른다.무언가를하는것이죄를만들기도하지만,무언가를하지않는것이죄를만들기도한다.
한사람을죽여서천사람을살릴수있는방법이있을때,그방법을몰랐거나실현할힘이없는사람은고민할필요가없다.
하지만강대한힘을가진이들은,어떤선택이라도할수밖에없다.
구백구십구명을살려낼지,한명을죽일지.
슬프고고통스러운선택이었다.하지만,힘과지혜를가진이상선택해야할의무가있었다.
그럼에도불구하고 엘레노어는 그 엘프의검을막았다.
"그렇게는안될겁니다."
"눈이흔들린다.검에진심을 담아 싸우거라."
개인적인일이었다.엘레노어는,그녀가희생시킨한사람에대해책임져야했다.
혹은,은인을지켜야했다.아무조건없이그녀에게힘을양도하고,그녀를믿어준사람에대한신의를지켜야했다.
약속을지켜야했다.그가자신이용사가아니라고주장하고,그명예와권리가그녀의것이되어버렸을지라도.
적어도그귀환은, 그가약속받은 몇 안 되는 보상이었다.
"질생각은없습니다."
잡념이날아갔다.그리중요하지않은사람이라고생각했는지,흰나뭇가지의단검이매섭게그녀의급소를노렸다.
전설속에서나오는전사다.태어날때부터누구보다강하도록설계된,신화속엘프의영웅이다.
하지만,엘레노어도약하지않았다.
"이건..."
힘에서는밀린다.엘레노어의검은그녀의작은검을받아내지못하고있다.
하지만휘청거릴지언정,완전히무너지지는않는다.단검의궤적을허용할지언정,그검끝에몸이베이지는않는다.
엘프의설계가처음부터완벽했을리없다.오랜시간살아왔다는것은,그들이새로태어날아이들에게적용될힘이그녀에게는주어지지않았다는것을의미한다.
한쪽팔을의수로대체하고,한쪽눈에는안대가감겨있는흰나뭇가지다.세월의흐름에따라더욱강해졌을지언정, 끔찍한 저주와 흉터가 그녀를갉아먹고있었다.
게다가네르웬의화살이 그녀의움직임을제약하고있었다.파시어의지팡이에서뿜어져나온화염구는온천장으로흩어졌다가,다시그녀를향해쏟아졌다.
흰나뭇가지가그걸맞을리는없었다.하지만몸짓한번으로그모든것들을피할수있다고해도,적어도'몸짓한번'은소모해야한다.
공세가이어지지않는다.엘레노어의검이흐트러지더라도,그기회를바로노릴수없다.
"크윽!"
그럼에도불구하고,결국주도권이있는것은흰나뭇가지였다.
엘레노어는단순히검을잡은힘에서그녀를따라잡을수없고,에네렐은그걸다루는기술과경험이한참모자랐다.엘레노어가영원히버틸수는없었다.
"하압!"
하지만,다시합세한에네렐이그녀의등에검을휘둘렀다.
"호오..."
몸을재빠르게돌린흰나뭇가지가의수로그검을막아냈다.하지만,분명히충격이있었다.
"하아아아아!!!"
엘레노어의검이그틈을타그녀의등을향해나아갔다.
깊은상처는아니었다.그녀는순식간에자리를옮겨,포위당하던위치에서빠져나왔다.
하지만엘레노어의검끝에아주약간,핏방울이묻어있었다.
"장난을치고싶은건아닌것같군.더하고싶나?"
하지만흰나뭇가지는조금도동요하지않은채,한자루의단검을더뽑아들었다.
/////
"애초에,네가이렇게강했으면마왕도..."
"무지한말이지만답해주마."
나는안도의한숨을쉬었다.
잠시숨을돌릴시간이필요했다.나뿐만이아니라모든파티원들이,흰나뭇가지의속도를따라가기위해무리하고있었으니까.
"내삶은나무어머니의힘으로유지되고있다.세계수에서벗어나도활동은할수있겠지만,여정을떠나는건무리다.그리고,결국마왕을죽이는것은용사.아무리강한이가있더라도,이법칙을뒤엎을수는없다."
단순히 힘의문제는아니었을것이다.당장내힘은위협적이지만,엘프들이사활을걸고빼앗아야할정도의가치는없다.
에이린의말에의하면,수용능력이라고했었지.
"...음?"
잠시이상한점을깨달은나였지만,흰나뭇가지가다시입을열자그녀에게집중할수밖에없었다.
"지금부터는,피흘릴각오를해둬라."
나는눈을크게뜨고그녀를노려보았다.
힘에서는압도적으로밀리지않는다.엘프와힘싸움을해서,그것도한손으로쥔단검을상대로힘싸움을해서밀리지않는다는게딱히자랑스러운일은아니었지만.
그녀의빠른속도에도어느정도익숙해졌다.검술로받아칠수있을정도는아니었고,겨우단검의위치에검을가져다대거나그녀의몸을노리는정도였지만.
"멈춰주십시오.제발..."
절망적인네르웬의표정과달리,그녀의화살은흰나뭇가지의심장을향해날아갔다.
물론,이중누구도그녀가화살에맞을거라생각하지않았다.
그화살을피함과동시에,흰나뭇가지가움직였다.
"어디냐!"
이번에는 그녀의움직임을포착했다.바로반응해서검을휘둘렀다.
하지만그녀는순식간에나를지나쳐,셀리아에게달려들었다.
몇걸음차이도나지않았다.하지만그짧은시간동안,셀리아의몸에수많은검상이새겨졌다.
그녀의하얀옷이 붉게 물들었다. 무늬사이사이로 피가스며들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