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1화 〉 세계수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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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르웬의거부를듣고나서야 조금안심할수있었다.
그녀가'태어날때부터'느꼈던운명에의해나를사랑하는것보다,그냥지금까지그랬던것처럼나를혐오하는게낫다.
그래야 나도아무거리낌없이그녀를혐오할수있을테니까.
위험한임무를수행하다죽는 편이 낫다.결국네르웬이내심기를건드리다가,내손에죽는편이차라리낫다.
그녀에게복수할권리는나에게있다.그녀가자아도뭣도전부잃어버린인형이된다면,내모든행동이무의미해질테니까.
"싫다고하는데,어쩌실겁니까?"
"네르웬,다시생각해봐요.이건우리모두의..."
"헛걸음을하게되었네요.조건을바꿀수는없겠죠?"
늦어진다.집으로돌아가는여정은,다시처음부터시작할수밖에없다.
"가능하다면,그'오류'로제가받은피해를보상하는차원에서정보를주셨으면합니다만...거부하시겠다면어쩔수없죠."
모든엘프와싸워,살육을벌여봐야내가원하는정보를얻지는못할것이다.
애초에 이길가능성도희박했다.엘프와숲에서싸우는건어리석은일이다.게다가그세계수안이라면,승산은거의없었다.
파시어의마법이라면어떻게든길을만들수도있을테지만,얻는게없는불확실한도박에인명을희생시키고싶지는않았다.
"가자."
등을돌렸다.
엘레노어와셀리아는각자자신의검과지팡이를들고나를따랐다.
"뭐해."
네르웬은아직정신을차리지못한듯,주저앉은채일어나지못하고있었다.나는그녀에게다가가 얇은팔을억지로잡아끌었다.
"...미안하다.바로일어나겠다."
잠시휘청거렸지만,엘프답게몸의균형을잃지는않았다.
"안돼요.이대로돌아가면,저희는..."
"슬프지만,제가신경쓸바는아닌것같습니다.그쪽의요구를받아들일수없을것같네요."
가해자가되고싶지않다.
철저한피해자로남는편이낫다.엘레노어를무자비하게구타하기는했지만,그건내안에서인정할수있는수준의폭력이었다.
하지만네르웬을만들어낸이들과한편이되어,네르웬을써새로운생명을만들고그녀의존엄을짓밟으라니.
그건 내가당한일과비교해봐도조금이나마마음의빚이남는행동이다.지구인인내가인정할수없는방식이다.
"안내에는감사했습니다.그럼이만..."
몇걸음걸어간나는,뒤에서들려오는경쾌한소리에잠시멈췄다.
살갗이살갗에 흔들리는 찢어질 것 같이 강렬한 소리.
"무슨..."
에이린을돌아보니,뺨이붉어진그녀가고개를숙이고있었다.
그녀는고개를숙이고있었다. 하지만, 그 앞에 있는 사람은 내가 아니었다.
"어리석다."
그녀의뺨을때린것은한엘프였다.몸에는흉터로범벅이되어있었고,체구는다른엘프보다훨씬컸다.
그아름다움이가시지는않았지만,한쪽눈을가리고있는안대와나무로만들어진의수는그녀가얼마나거친싸움을헤쳐나갔는지보여주고있었다.
"말로설명할수있다고하지않았나?"
"대화로해결해야해요.적어도,지금'외부장로'중으뜸은저라고요!"
"네가그를여기에데려온이상,더이상세계수외부의일이아니다."
온몸에서찌릿찌릿한기운이느껴진다.
괴물이다.저것과적대해서는안된다.어떤강대한마물이라도저것과비교하면작은새끼고양이나다름없을것이다.
얼마나많은세월을살아온건지,그동안얼마나강해진건지짐작조차 할 수 없는 엘프가있었다.
"...흰나뭇가지."
네르웬이나지막이입을열었다.
"우리엘프들의,전설의영웅이다.티탄을사냥했다고전해지는...살아있을줄은상상도못했는데."
파시어가인상을찌푸렸다.
"말그대로신화에서나나올법한영웅이군. 작명법을 생각하면 적어도제국이생겨나기전에활동하던엘프다.그리고,그리호의적인것같지는않은데."
아득하다.
그녀의말에따르면,단순히'건국설화'에나올법한간극이상의무언가가그녀에게있었다.
이곳의역사와신화에대해서잘모르는나도그무게감을느낄수있었다.현지에살았던다른여자들은,나와비교도안되는중압감을느낄것이다.
"힘으로해결하면그만아닌가.세계수외부에있다면모를까,내부에들어온이상빠져나올방법은없다."
우리가들어왔던문은어느새겹겹이쌓인나무줄기들로막혀있었다.바로빠져나가지는못할것이다.
물론나무줄기가강하다해도,파시어의마법이라면돌파할수있다.내가어떻게든검기를뽑아낸다면잘라낼수있을것이다.
하지만그다음은?엘프들의엘리베이터가,과연우리를 위해 움직여줄까.
아니,그녀의존재감을생각해보면그것조차과도하게희망찬생각으로보인다.파시어가저문을태워버리기위해손을드는순간, 엘프의화살이손을꿰뚫어버릴것같았다.
"저기에는용사도있고,황녀도있어요.섣불리관계를악화시킨다면..."
"에이린.세계수안에서,진실을왜곡하여개인적인감정을집어넣는것은용납되지않는행위다."
"저는진실만을말했어요!"
"그렇겠지.하지만,네가진정세계수의편에서상황을판단하고있는가?엘프의눈으로그들을보고있는가?"
흰나뭇가지의목소리도엘프답게아름다웠지만,조금탁한무언가가섞여있었다.상처나,혹은저주일지도모른다.
"평화는유용하다.네가만들어낸제국,그리고다른국가들과의외교는분명유의미한성과를거두었다."
엘프는본래평화로운종족이라고생각했던나로서는좀의외였다.
하지만,엘프의시간감각을생각하면이상할건없었다.
에이린이정확히언제장로가되었는지는몰라도,혼자서몇백년동안엘프의대외정책을주물렀다고생각하면엘프에대한시선이달라지기에는충분한시간이다.
"우리는과도한전사를양성할필요가없어졌고,그힘을번성과연구에쏟을수있었다.하지만,너는거기에집착하게되어버린것아니냐?"
"아니에요.저는,가장효율적인..."
에이린의몸이떨렸다.두려움때문인지말이제대로나오지않는것같았다.
이상하지는않았다.흰나뭇가지의살기를멀리서느끼고있는우리들도제대로서있기힘든상황이었으니까.
전사가아닌에이린이그걸눈앞에서버티고있는것이오히려기적적인일이었다.
"아니다.에이린.너는무력이가진강제성을너무쉽게포기했다.네가이뤄낸성과에,그방법에매몰되었어."
"아닙..."
"더이상말을꺼내지않겠다.네지위를건드릴생각은없다.하지만 적어도이세계수안에서는,내권위를존중해라.그리고내가일을처리하는방식을보아라."
순식간에살기가사라졌다.하지만그건용서나포기가아니었다.
흰나뭇가지가더이상살기가필요하지않다고생각한것뿐이었다.에이린이쓰러지듯주저앉았다.
그리고흰나뭇가지는고개를돌려내쪽을바라보았다.
이름처럼하얗게빛나는머리카락이아름답게흔들렸다.
"용사여."
"..."
"나는 무의미한 다툼을 좋아하지않는다.협조해주지않겠는가?"
"힘들것같은데요."
"오랜만에들어온세계수의손님이다.나무어머니안에서화살과검이부딪치는건상서롭지못해."
압도적인자신감이느껴졌다.
말에티끌만큼의절박함도느껴지지않는다.그녀는내의사를묻고있는것이아니다.
팔과다리가화살에꿰뚫린채억지로협조할지,혹은순순히그녀의말을들어줄지선택하라는것이다.
"슬프군."
한걸음씩앞으로다가오며,흰나뭇가지는고개를흔들었다.
엘프가전선에서는것은현명하지못한일이다.그희귀성에비하면,그들의완력은절대적이지않다.
당연히엘프들은그날렵하고정교한궁술을발휘하기위해적과의거리를벌려야한다.
하지만그녀는그런상식따위는우습다는듯이,점점걸어오며우리를압박했다.
"이기적이고,철이없다.이시대의인간들은얼마나타락한건가."
그녀의하나밖에남지않는눈이서서히불타오른다.
"과거에는인간도난쟁이도엘프도희생을당연시했다.뒤에남아있는후손과친구,가족을위해그들이죽는걸당연하게여겼다."
"자신이죽는걸당연하게여기는것과,남을죽이는걸당연하게여기는건다릅니다."
"애초에희생을스스로선택했다면그걸강요할일도없었겠지."
다르다.살아온세월이,거쳐온전장의깊이와시간이다르다.
"그리큰희생을바라는것도아니다.몸을팔라하지도않았고,스스로목숨을끊으라하지도않았다.그저맺어지면될뿐이다."
그녀는활을뽑았다.아무장식도없고,매끈하지도않고깨끗하지도않은,그녀만큼이나상처입은활을.
"그대도,우리네르웬도외형은그런대로볼만한이들이다.서로를안는것이그렇도록역겹단말인가?"
"그건...아닙..."
네르웬이힘겹게말을꺼냈지만,눈이마주치자입을다물수밖에없었다.
"그같잖은자존심때문에,세계의위기에눈을돌리고희생을거부하는것이."
파티원들도하나둘씩무기를뽑아들었다.하지만이게얼마나효과가있을지우리도알수없었다.그정도의격차가있었다.
"회의감이들게한단말이다.겨우이런이들을지키려고그렇게많은전쟁을거쳤나?티탄을땅구덩이에파묻고,저주받은화염에몸을던져지켜낸자들이,이런나약하고이기적인이들이란말인가?"
엘프의기술로도치유받지못한상처다.흉터하나하나에말로다표현할수없는감정과희생,사연과전투가있었을것이다.
그래도,물러나고싶지는않았다.
"가르쳐주도록하마.우리가어떤싸움을해왔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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