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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별을 앞둔 용사 파티가 내게 집착한다-80화 (80/217)

〈 80화 〉 세계수­10

* * *

네르웬의손에잡힌활이부들부들떨렸다.

그녀에게허락된역할은 그저그의아이를낳는것이었다.용사파티에들어가세계를구하거나,세계수의대전사로서나무어머니의의지를대변하는것은부차적인문제였다.단지그녀가모르고있었을뿐.

그를보는자신의감정이부자연스럽다는것은착각이아니었다.하지만, 그렇다고해도그녀는자신을인정할수없었다.

그에대한혐오는 누구의것도아닌온전히자신의감정이었다는뜻이었으니까.

그부자연스러운냄새,익숙하지않은감각은처음부터느꼈었다.하지만참지못할정도는아니었다.

그가용사가아니라마법사였다면,특이한마술의냄새라고생각하고넘겨버렸을것이다.

여정이험난했다고,쏘아죽여야하는적이너무많았다고,시간이촉박했다고변명할수는있었다.

그럼에도불구하고 편한길을선택한건그녀였다.

그에게냄새에대해물어볼생각도하지않고,그를수도없이모욕해가며씻기지않을냄새를씻어내라고강요했던것은네르웬이었다.

이해할생각도없었다.배려할생각도없었다.그저마왕퇴치라는위업을달성하는데방해되는짐으로만생각했을뿐이다.

그녀가그를이렇게만들었다.

"안돼요.정말죄송하지만,그렇게는못할것같네요."

그리고결국,그결과가이꼴이다.

차가운물에그를수도없이빠트리고,말끝마다멸시와혐오를담아했던말들이이렇게그녀의목을조른다.

'어떡해야...하지...'

지금의 그녀는 뭐든할수있었다.

그때는제정신이아니었지만,지금다시그가황제에게화살을쏘라고명령한다면쏠수있었다.

몸을바치라는말에도흔쾌히응할것이다.하다못해죽으라고요구해도,그저힘없이고개를끄덕일것이다.

하지만,상황은이제그녀의손을떠났다.

그의눈은이미네르웬을여자가아니라,증오스럽고흉측한무언가로보고있었으니까.

에네렐을위해봉사하는것도무의미하다.남은인생을모두바친다해도,그에게짐만될것이뻔하다.

차라리그가조금만더모질었다면,약간만더냉철하게그녀를대할수있었다면.

다른여자에게서뽑아낸정액을그녀에게 버리듯 건네주고, 그저아무일없다는듯이세계수에그녀를내버려두고자신의여행을떠날수있었을것이다.

하지만지금은알수있다.그는,이런상황에서까지그녀를동정하고있다.역겨움과혐오가가득찬시선사이에실낱같은동정이엮여있다.

그가어떤선택을내리건,그건자신을행복하게만드는선택이아닐것이다.

네르웬은이미그에게짐이다.저주다.

그녀를죽이거나쫓아낸다해도에네렐은짊어져야할필요없는죄책감을등에질것이고,살아서그를보필한다면얼굴을볼때마다분노에사로잡힐것이다.

이미,끝나있었다.

귀환의식이실패로돌아갔을때부터,아니어쩌면네르웬이그에게달려들었을때부터.

혹은마왕퇴치가끝났을때,아니면더이전부터였을지도모른다.

네르웬은엘프에게도 그에게도필요없는존재가되었다.

"다시생각해보세요."

"애초에,꼭그녀여야합니까?"

"당신이이곳까지오는길에봤던,아직태어나지않은엘프들은수십년을그열매속에서살아요.지금당장새로운엘프를만들더라도 당신의삶이끝나고나서야그들이태어나겠죠."

아무리엘프의오만과자부심이있더라도,그에게그렇게대할필요는없었다.

그녀자체가실패한엘프였다.마치세계수에들어왔을때그에게화살을쏜엘프처럼.

그저그실패를조금더길게,그리고돌이킬수없을만큼크게했을뿐이었다.

서서히네르웬의다리에힘이풀렸다.

깨달아버렸다.그녀는무슨짓을하더라도,사랑하는사람에게필요한존재가될수없다.

/////

이들이그렇게살아간다면,나는그들을존중하는것이옳다. 외부자인 내가 이들의 삶에 대해 왈가왈부할 자격은 사실 처음부터 없었을지도 모른다.

네르웬이아무리증오스럽다고해도,집으로돌아가고싶은마음이더크다.그게아니었다면그녀를받아들여주지도않았을것이다.

하지만그저,나는이상황자체를받아들이지못하고있었다.머리가아니라가슴으로.

"내가네르웬에게당했던일들이...그냥오류였다고요."

"불운한사고였습니다.그점에대해서는,엘프를대표해서진심으로사과드립니다."

네르웬의말에진심이담겨있을줄은몰랐다.무질서속의선택에의한감정이아니라,'태어날때부터'정해진마법에따라내게관심을보였을줄은몰랐다.

그게증오로발현된것은분명그녀의선택이겠지만.

그래도 나는,무관심으로 충분했을것같은데.

"말이안되잖아요..."

헛웃음이새어나왔다.

누군가를사랑하기위해태어난사람이라니,누군가를증오하기위해서태어난사람만큼이나말이되지않는다.

"그게얼마나필요했기에..."

"우리엘프들은세계의멸망을막기위해계속노력하고있었어요.마왕이사소하게보일만큼거대한파괴와멸망을막기위해서."

에이린의표정이사뭇진지했다.

"세계수의예언자들은미래의위협과멸망을예지했어요.천년뒤에있을거대한사건으로부터세계와세계수를지키려면,이건꼭필요한일이었어요."

"멀군요."

"그리멀지는않아요."

또엘프의시간관념인가.

그들의수명과시간관념이동일하다고볼수는없지만,내가생각하는것보다는훨씬작게느껴질것이다.

"지금우리가살아있는것도,이세계수가유지되는것도 공짜가 아니에요. 천년전의엘프들이우리를위해희생하고,만년전의엘프들이우리를위해준비해주었기때문이에요."

그녀의말을듣자세상이유리판처럼얇고연약해보였다.

에이린이왜이렇게절박하게내도움을구했는지,조금이해할수있었다.

"충분히이해하셨으면,이제결정을내려주세요.급하게생각할필요는없지만,적어도약속은해주셨으면해요."

"최소한 본인의의사는물어보시죠."

네르웬이예뻐서가아니었다.하지만,네르웬이내게했던일들의특수성에도불구하고나는이일을인정할수없었다.

누군가를사랑하기위해서태어나는사람을인정할수없었다.

그걸해내지못했다고비난받는사람을믿을수없었다.

"아직그아이가마음에드시나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애초에,이걸당하는사람이네르웬만아니었다면지금이렇게고민할필요도없었을것이다.

하지만,결정했다.상대가네르웬일지언정,나는인격체가이런대우를당하는것을참을수없다.

아직도그녀의혐오를기억하고있다.지금생각해도치가떨리도록분하지만,그런네르웬이나를원할거라고는생각하지않는다.

"그건아니지만..."

"달라지지는않을텐데요?잠깐실수했을뿐,네르웬은충직하고명예로운엘프입니다.의무에서도망칠리없어요."

"말을그딴식으로하면..."

그녀에게따뜻한말을하고싶지는않았다.하지만,에이린의말은네르웬을압박하고있었다.그런상태에서나온대답을원하는게아니었다.

"싫으면싫다고해라.널용서할생각은없지만,이딴식으로그값을치를필요는없어."

잠깐뒤를돌아보자,네르웬은이미혼란에빠져비틀거리고있었다.

/////

네르웬은그녀를부르는에네렐의목소리에,어디론가사라질것같은정신을잡아세웠다.

지나칠정도로친절하다.바보처럼무르다.

그가결정하면그녀는따를것이다.여기서네르웬의의사를물을이유가없다.

그럼에도불구하고,그는네르웬의눈을보고있었다.

"나는..."

그녀가원하는건단순했다.당연히,모든것을되돌리고싶었다.

이감정이거짓된감정이라해도,그를사랑하고있다.

누군가의아이를낳기위해태어났다는것은유쾌하지않은일이었지만,사랑하는사람과맺어지기위해태어났다는것은그런대로낭만적인일이다.

당연히그에게안기고싶다.

엘프의책무도,포기하고싶지않다.

세계수의대전사로서,명예속에서살았던지금의삶을놓치고싶지않다.

공동체를위해희생할수있는일이있다면,조금도망설이지않고할것이다.

하지만,그는.

네르웬은고개를들어어렵사리초점을맞추고에네렐의눈을보았다.

인정하기싫어도알수있다.그는그걸원치않는다.

네르웬은아직도,아마영원히그에게혐오의대상일것이다.그는절대네르웬을통해행복을얻을수없을것이다.

그는헌신적인사람이었다.필요한일이라면무슨일이든하던사람이다.인간에네렐이그일을기뻐하고있다면,이렇게시간을끌이유가없었다.

"에네렐..."

그도그녀가무엇을원하고있는지알고있을것이다.엘프로서장로의명령에복종하는것,네르웬이집착하고있는그와더가까워지는것.

그렇게,이번에도 자신을희생시킬생각이다.본인의의사가있으니어쩔수없다면서,천년뒤의세계를위해그의행복을포기할속셈이다.

하지만네르웬은그걸원치않았다.

마왕을퇴치하는여정에서,이미용사파티는그에게끝없는희생을강요했다.한사람의목숨이라도더살리기위해서라며,그가억지로참아내도록몰아붙였다.

더이상,그를양보하게두고싶지않았다.

"싫...다."

네르웬은그제안을거부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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