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5화 〉 흉터8
* * *
초록빛물결이,이토록위협적으로느껴진적은없었다.
잔뜩부풀어오른녹색살덩이들은초원을밟고또밟으며움직이고있었다.대지에솟아오른종기처럼흉측스러운덩어리다.
"온다."
어젯밤까지힘겹게목책과함정을만들었지만,저거대한오크무리를보면턱없이모자라보였다.
"생각보다많네..."
여급,아니다리잃은모험가가침을꿀꺽삼켰다.
나름대로자기실력에자신있는모험가들의분위기도좋지않았으니,징집병들의사기는바닥까지떨어졌다.
"위치를지켜라!흩어져봤자개죽음이다!목책옆에서떨어지지마!"
영주가고래고래소리를질렀지만,그의목소리에도불안이섞여있었다.
대열이라는것은,좀가혹한구조다.아무것도없는농부,대장장이,여관주인이창을들고거대한마물에맞서위치를지켜야한다.
그렇다고,죽음을두려워해대열이깨지고사람들이흩어지면,결국모두가죽게된다.너무작고많은사람들에게지나친책임이부여된다.
그나마,다리잃은모험가는이전파티원과다시뭉칠수있어서조금즐거워하는것같았다.아마저어리숙해보이는남자가연인이겠지.
잠시기다리자,본대에서전령하나가다급하게달려왔다.
"유인하라고하십니다!"
네르웬은그말을듣고,단상위에올라가거대한오크무리에게화살을겨눴다.
"알겠다.준비해라."
엘프는사람이많은것을싫어했고,나도네르웬과함께싸우는게마음에들지않았다.
하지만,개인적인호오를앞세우기에는상황이여의치않았다.
아무리인간의뒤엉킨냄새가마음에들지않아도네르웬은전장에투입되어야했고,나도네르웬을멀리떨어트려놨을때돌발상황에대처할자신이없었다.
"그래도,진짜엘프궁사가있어서다행이긴하네.저거끌어오려면또별동대를써야했을텐데.”
"진짜엘프궁사?"
다리잃은모험가는생각보다아는게많은지,신나게떠들었다.
"이전에아는엘프한테들었는데,엘프중에서도전사는생각보다드물다고하더라고.워낙오래사는친구들이니조경사나재단사가교양으로배워둔궁술도엄청나지만..."
"대전사라고했으니강하긴할거야.최소한,저기쌓아둔화살이없어질때까지는버텨주겠지."
그녀의컨디션도아슬아슬했다.밤새도록나무의가지를파내화살을만드는일은,누가도와주려해도도와줄수없는작업이었다.
하지만한눈에보기에도,오크의수는화살에비할바없이많다.상황이좋지않았다.
"첫사격,실시하겠다."
어제준비해둔나무단상위에오른에네렐은,알게모르게사람들의사기에도움이되고있었다.
엘프는고귀하지만,계산적이고비겁하다는평가를하는사람도많았다.어쩔수없는인식차이였다.
아무리고양이를사랑하는사람이라도고양이의목숨과인간의목숨을같게생각하지는않는것처럼,선한엘프라도위험한상황에서는엘프의목숨을우선시했다.보통,자신의목숨을.
그러니그이기적이고위험한일을하지않으려하는엘프가이전장에있다는것만으로도,사람들은승산이있다고느꼈다.
혹은,조금이나마높은곳에올라선그녀의아름다운외모를보고위안을느꼈거나.
"간다."
네르웬의화살이바람을갈랐다.대지에나있는거대한초록빛종기에그녀의얇은침이박혔다.
첫화살은,아무변화도만들지못했다.하지만그녀의표정을보면분명그화살도명중했을것이다.
그녀는조금도흔들리지않고두번째,세번째화살을쐈다.여섯번째화살을쐈을때,그거대한무리가흔들렸다.
서서히,거대한함성이커져갔다.
"으,으어어,쿠와아아아아!!!"
고함소리는익숙했지만,저런무리앞에정면으로서본적은없었다.
대지가쿵쿵울린다.녹색살덩이들이불규칙적으로흔들리다가,점점이쪽으로다가온다.
"크아아아아아!!!"
서서히발소리가가까워지고,심장소리가커진다.오크의흉측하게일그러진이목구비가눈에들어오자,나는성검을뽑아양손으로쥐었다.
싸움이시작되었다.
/////
"뭐냐.내게는시간이많지않으니용건만간단히말하고꺼져라."
오만한말이었지만,이작은마법사의공방에들어온귀족들은이걸로만족해야했다.
애초에,귀족의방문을쉽게허락하지도않는그녀다.얼굴을보고마주할수있다는것으로만족해야했다.
"용사에대해논의하러왔습니다."
"그건당연한일이고,용건을말하란말이다."
하지만마법사의눈은그들을향하고있지않았다.그고사리같은손은마법재료들을쉴새없이주물럭거리고있었고,대화가멈출때마다꽉다문입안에서주문을중얼거리고있었다.
"당연히대마법사님께서는이사항에대해모르고계셨겠지요."
"그래."
"황제께서는...계략에능하시니,어쩔수없는일이라생각합니다.누가알았겠습니까?진짜용사를감금하고힘을빼앗았을거라고는아무도생각하지못했으니까요."
"쓸데없는소리를하고있구나."
귀족의얼굴이조금찌푸려졌다.
"협조하라는말이겠다?황제와황녀를압박하는일에내힘이필요하다는말아닌가."
"그,그렇습니다."
마술사는손익을계산한다.자신에게관심있는분야가아니라면,다른많은것들을'사소한것'으로치부한다.
당연히,황제파보다는귀족파들과더밀접한관계를맺을수밖에없었다.
마술사들의음모가필요한이들은흉험한계략을꾸미는자들이었고,금전적으로더풍족한이들도황제가정한세율과규칙을따르지않는자들이었으니까.
엘레노어와파시어가친해지는것도많은시간과전투,공조와협력이필요했다.귀족들이파시어를아군이라고인식하는것은당연한일이었다.
"보류다."
"...네?지금은기회입니다.황제가살아있는한,이런사건은다시터지지않을겁니다!"
황제는많은귀족들에게눈엣가시였지만,그들을적대하고국정을유지할수있을만큼현명하고교묘했다.
언제나대의를방패삼아귀족들을관리했고,공을세운사람이라면평민에게도아낌없이귀족작위를내렸으며모험가나상인과도친했다.
하지만,이사건에서는조금달랐다.황제는시원스러운해명을하지않았고,귀족들은마음놓고나쁜소문을퍼트릴수있었다.
도덕성에타격을받은동안은,그무기를휘두를수없게된다.
"목표가뭐냐.조세권?초야권?"
"당장은둘다입니다."
황제가파견하는세금감사원은귀족들에게는증오스러운존재였다.필요이상의세금을거두지못하도록귀족들을통제했으니까.
초야권이실제로행사된적은거의없었다.영주는마음만먹으면훨씬깨끗하고아름다운창녀들을안을수있었고,시골의농촌여자들을안을비위좋은귀족은흔치않았다.
하지만상징적으로,그건귀족의권위를알려주는징표와도같은제도였다.마음만먹으면천한여자들정도는안을수있다는상징.
"됐다.네놈들이뭘하든신경쓰고싶지는않지만,나는이제행동을조심해야하는몸인지라..."
"저희와함께황녀를규탄해주시기만하면..."
"내도움은기대하지마라."
"어째서..."
"확신을잃었다.멋대로행동하고싶지않아."
기운빠진파시어의목소리는,그들이알고있던냉혹하고유능한파시어와는사뭇다른모양새였다.
작은마법사는정말로급한일이있는것처럼,그말을마친뒤자리를박차고나왔다.귀족들은마지막까지왜그녀가이렇게변한건지알아챌수없었다.
/////
기세가다르다.
수도근처에서도마물무리를상대해본적이있었지만,그건패잔병이었다.
서로다른오크는아니었으니,특별히더긴장감이드는것은아니었다.성검을휘두르면살이베여나갔고,거대한글레이문제없이없이막아낼수있었다.
당장은괜찮았다.쓰러지는모험가도있었지만,당장은전투가유지되고있었다.
"흡!"
하지만,군인들이배치된본대는더위험했다.차라리상비군으로조직된부대라면모를까,노인과장애인들까지긁어모아만든급조한군대다.
사람이쓰러지고,그뒤를다른사람이메우고있었다.전열이쓰러질때마다사람들의눈에서공포가솟아오르고있었다.
"잘버티고있다!포기하지마!"
그나마아직까지도주하는병사가없는건,양옆으로퍼져나가는오크들의늑대무리때문일것이다.
흉험한울음소리를내뿜으며측면을노리는늑대들은,'도망쳐봤자개죽음'이라는영주의말에권위를심어주었다.
하지만,전황은좋지않았다.포위되고있다.
내가앞장서서최대한오크를쓸어낸다한들,검에는한계가있었다.전력으로밀어붙이는오크를베는데몇초만소모해도,주위에서곡소리가들리는형국이다.
"에네렐!조심해라,온다!"
네르웬이다급하게나를불렀다.오크를베어넘기고있던나는,짜증에찬목소리로소리쳤다.
"대체무슨소리야!애초에,위험한놈이있으면네가처리해줘야지!"
네르웬은마왕퇴치파티에참여한궁사다.그과정에서받은가호몇몇을잃었다해도,오크따위에당혹스러워할사람이아니다.
화살의개수가모자라거나활시위를당길힘이모자라면모를까,한발로죽이지못할오크가있을리는없었다.
"있다.우리가걱정했던놈,진짜가오고있다!화살을쏟아붓고있지만,이자식,맞아도버티면서..."
그녀의말이끝나기전에,나는그실체를확인할수있었다.
일반오크보다두배는더큰덩치를가진괴물이눈앞에섰다.목에화살세발이박혀있었지만아무렇지않게움직이고있었다.
초록빛육체는근육으로가득했고,그괴물이몸에힘을줄때마다더거칠고야만적으로부풀어올랐다.
"크어어어어!!!"
오크의수를늘릴만한요인,마기를가득담은군단장급마족.
오크로드가눈앞에있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