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4화 〉 실패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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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리아가그의눈을보고처음느낀감정은,그아득하고깊은슬픔이었다.
그의고통은,그녀가생각했던것이상으로거대했다.
둘은서로눈을마주친채,아무것도하지않고서로바라보고있었다.
그녀는두려웠다.당장이라도그가이거리를달려와,방금전에쓰러진네르웬처럼그녀를짓이길것만같았다.
하지만,그보다더자책감이더컸다.다른사람은몰라도,적어도성녀는그가얼마나선한사람인지알고있었다.
지금도,맞고있는사람들이상으로괴로워하고있다.그를이지경이되도록몰아붙인건,온전히그녀의잘못이었다.
"미안해요..."
무슨일이일어난건지미치도록묻고싶었다.돌아간다는건무엇인지,어떻게황녀와파시어를쓰러트릴수있었는지,이제뭘어떻게할건지.
하지만그건질문은그녀가원하는일이었지,그녀가해야하는일이아니었다.
"저도...죽어야,할까요?"
누가누굴좋아하고있었다느니,숨겨진관계가있었다느니하는것은전부그녀의망상이었다.
모두가죄인이었다.모두가공범이었고,모두책임이있었다.
신성주문으로다른이들을회복시킨다면전투가이어질지도모르겠지만,에네렐의담담한표정을보면이길수있을것같다는생각도들지않았다.
만약그게가능하더라도,하고싶지않았다.
바보같지만,몰랐었다.그는견딜수있을줄알았다.
누구에게싫은소리한번하지않는그였다.이런분노가터져나오기까지,얼마나큰고통을느꼈을지상상하고싶지도않았다.
그는멍하니주위를둘러보았다.쓰러진사람들과엉망진창이된마법진이있었다.
잠시정적이흘렀다.하지만,점점가까워지는다급한발소리가그작은평화를깨트렸다.
셀리아는,자신이할수있는일을깨달았다.
"네이놈!여기가어디라고!"
늙은기사와황궁수비대가지하실로들이닥쳤다.황녀를뒤에두고도망친병사들이다시모였다.
"먼저황제폐하와황녀전하를모셔라!내기사들은내옆에붙어!저놈을막는다!"
귀한갑옷과절도있는자세로 수비대는진열을만들었다.
"웬도둑놈이여기들이닥쳤나했거늘,이렇게성대한짓을벌이고있었을줄이야."
선두에선늙은기사가검에서마력을꺼내들었다. 엘프와 성녀를 추적하던 호위대였지만, 여기 있는 위험은 훨씬 더 강대하고 흉악했다.
"라인하르트...경...피하십시오.어서..."
엘레노어는마지막힘을짜내그들에게돌아가라애원했지만,그들의긍지를꺾을수는없었다.
마치황궁에출현한마물이라도되는것처럼,잔뜩긴장한시선들이에네렐을덮쳤다.
"조심하지마라.목숨은포기해.용사를압도할만한힘이있는존재다.마신의재림인지고룡의폭거인지는몰라도,우리가살아나갈수는없을거다."
늙은기사는흔들림없는눈빛으로에네렐을노려보았다.
"성녀님,여긴저희가막을테니어서피하십시오."
경비병이셀리아를안고나가려했지만,그녀는고개를세차게저었다.
"아,안돼.안돼요.지금피를보면,그때는정말돌이킬수없어..."
성녀는어떻게든경비병의손길을뿌리치려했지만,두팔을쓸수없는그녀였기에쉬운일이아니었다.
그녀의오른손검지는,자신의피로물든붓이되어왼손이라는도화지에쉴새없이기도문을써내려가고있었으니까.
"다른사람들은저희가어떻게든보호하겠습니다!황녀님도,네르웬경도,파시어님도어떻게든데리고나올겁니다!"
그들은셀리아가나가지못하는이유를남은동료때문이라고생각했다.모두를안전하게대피시킬수 있다고약속하기만한다면,그녀도순순히따라나올거라생각했다.
실상은조금달랐다.물론그들도성녀에게소중한친구들이었지만,진짜이유는다른곳에있었다.
바로저기서흉흉한기운을뿌리며모두를쓰러트린저남자야말로,그녀가발걸음을뗄수없는진짜이유였다.
"더는안돼요.정말,지금은안돼..."
기회는수도없이많았다.
그에게조금이라도더따뜻한말을해줬다면,마법사의지시를무시하고그가편안해할만큼신성주문을걸어뒀다면,다른파티원들과맞서싸울각오를하고그를지켰다면조금달라졌을까.
그걸로도부족하다면,신성한물건과여신의계율에서다소눈을돌리더라도그를지켰다면조금달라졌을까.
전부 늦었다. 에네렐은 이미 무너졌고, 사람들은 쓰러졌다. 하지만, 이게 끝이 아니라면.
그러면 정말로, 이게 마지막기회일지도몰랐다. 셀리아는더이상기회를놓치고싶지않았다. 설령 자신이 죽는다 해도.
늙은기사가검을뽑아겨누었지만,에네렐은성검을축늘어뜨린채아무것도하지않았다.
"적의가없으면항복해라.황제폐하께이런일을저질렀으니살아돌아갈수는없겠지만,적어도공정한재판을받을수있게해주마."
"어디까지,적의를가져야할까요."
"싫다면상관없다!"
나이에걸맞지않은신속한검이에네렐을덮쳤다.그는아슬아슬한순간까지멍하니서있다가,성검을살짝들어그걸튕겨냈다.
"제길,무슨힘이..."
검을막아내는팔은커녕성검을쥔손에도힘이들어있지않았다.하지만마치그검이그에게붙어있고싶다는것처럼,성검은그의손에서벗어날생각을하지않았다.
"받아라!"
"누구까지죽여야할까요."
"당연히,우리모두다!"
라인하르트는고함을치며에네렐에게달려들었다.검과검이맞부딪혔다.
그건엘레노어의싸움보다는조금더싸움같았다.용사의힘에익숙해져있다가순식간에빼앗기고,그녀와싸우는법을몇년동안가르친엘레노어와는달랐다.
"제길,여유부리지마라!"
하지만늙은기사가그것만으로용사와싸워이긴다는건,아니시간을끈다는건불가능했다.
하지만,에네렐은그에게분노를느낄이유가없었다.
"...그냥가시는건어떨까요."
"황제폐하께,황녀전하께은혜를입지않은제국민이없다!"
지키기위해검을휘두르는사람이,겨우에네렐같은사람이자아내는우울한분위기에취할이유도없었다.
"권력싸움에휘말려처형장에이슬로살아가야했을나다!그때나를지탱해준것은황제폐하였어!"
다른수비대들이에네렐의측면과후방을노리고있었지만,쉽사리끼어들지는못했다.용기를내달려든이들은그들의싸움에휘말려튕겨나갔다.
성검은 살을 가르지 못했다. 하지만, 그게 안전하다는 뜻은 아니었다.
그는 자기보다 약한 사람과 싸워 본 경험이 없었다. 마물은 그의 전력을 휘둘러 죽이는 게 당연한 괴물들이었고, 그나마 가장 많이 검을 맞대어 봤을 엘레노어는 그가 전력으로 검을 휘둘러 봐야 상처 하나 입을 리 없었으니까.
어깨가 부서지고 늑골이 부러져 고통스럽게 땅을 기는 모습을 보면, 그건 그저 숨만 붙어 있는 시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내줄 것 같으냐!"
에네렐은아슬아슬하게그의검을피했다.전력으로맞부딪히면밀려날리가없는싸움에서도,한걸음씩뒤로물러났다.
감정이격해지고,호흡이거칠어진다.마력이잔뜩실린검이에네렐의성검을짓누른다.
"그들이누구보다위대한업적을세우고,그어떤용사보다빨리마왕을퇴치했다는소식을들었을때,얼마나안도했는데,그런데..."
라인하르트가호흡을정돈했다.양손으로집은검은곧게하늘로치솟았다.
"네놈따위가,그마지막을!죽음으로장식할수있을것같으냐!"
태산처럼육중한검이었다.한치의흐트러짐없는,오직곧은마음과정직한수련으로만얻을수있는강대한검.
라인하르트는이게빗나갈거라는생각도,막힐거라는의심도품지않았다.
그저사랑하는제자를위해,충성하는황제폐하를위해검을내리칠뿐.
"하아아아아아!!!"
하지만,그검은닿지않았다.강력한반발력에검이튕겨나갔다.
그가한번마음먹고힘을써성검을들어올린것만으로도,그의검격은무의미해졌다.
"안,되는건가..."
"저희가 돕겠습니다!"
잠깐멈칫하는그의사이로,다시새로운기사들이들어와에네렐에게검을휘둘렀다.
당연히,그들은더쉽게패배하고땅에쓰러졌다.
주위에는이미기절한병사들이많았다.좁은계단을통해전투불능상태의병사들을호송시키고,계속해서새로운병사들이들어왔다.
기사들도몇몇섞여있었지만,기사중으뜸인엘레노어와그바로밑인라인하르트마저상처를줄수없는상대였다.
가장용감하고책임감있는이들이먼저쓰러졌다.
그리고나중에는,그저황궁에가까이있었을뿐인병사들까지모여들었다.
"...이제그만하면안될까요?"
라인하르트는쓰러지지않았다.
엘레노어처럼이미쓰러진사람이진심으로성검에두들겨맞은것은아니었지만,그래도일반적으로싸울수있는상태는아니었다.
다른병사들도,끝도없이밀려들어그를보좌하고있었다.
"그만하라고?그만?내가여기서물러나면,또황녀님께같은짓거리를할생각이잖나."
늙은기사의목소리는많이누그러져있었다.아니면,호통을치기에는너무지친걸지도모른다.
"마,맞아!하,한명도물러서지않을거다!"
얼마전에공을인정받아수도로올라온귀족이맞장구를쳤다.떨리는목소리였지만,에네렐에게서등을보일생각은없어보였다.
그들의눈에는공포가서려있었지만,그게그들의발까지닿지는않았다.
다시지친마음으로성검을든에네렐은,익숙한얼굴의호위병하나를보았다.
"남작...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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