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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별을 앞둔 용사 파티가 내게 집착한다-26화 (26/217)

〈 26화 〉 복기­8

* * *

"나는 용사의 허락을 구하고, 마음을 얻으라 말했다."

황제의 근엄한 목소리에도, 노쇠한 기력이 역력했다.

시간은 가장 강하고 가장 인자한 이의 몸에도 소리 없이 마수를 파고들어, 예정된 죽음을 유도하곤 한다.

"어떻게든, 결혼만 하면 되는 것 아닙니까?"

"아니다."

엘레노어는 입술을 꽉 깨문 채, 그녀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저항을 했다.

"그의 심기를 거스르는 건 현명한 선택이 아니야. 그가 얼마나 인내하고 있는지, 너를 위해 희생했는지 너도 알아야 한다."

"그건 희생이 아니라 도피였습니다."

"나도 가끔은 그걸 혼동하곤 했지.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그는 처음부터 어떤 의무도 지지 않았어. 마왕이 죽은 지금은 더더욱 그렇고."

엘레노어는 마물들에게 달려들어 전과를 취하고, 산보다 거대한 마수를 쓰러트린 지난날을 떠올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녀가 책망받을 이유는 없었다.

"그러면, 이제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명령한 대로. 그의 마음을 얻게."

"...알겠습니다."

그녀는 황제의 말을 한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모든 명령이 이해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설령 그게 정이나 인간적인 연민 같은 사소한 이유에서 내려지는 명령일지라도, 황제의 명령은 곧 제국의 명령이었다.

가장 충실한 기사인 그녀는, 아무리 비합리적인 명령에도 따라야 한다.

"말씀하신 대로, 강압적 수단은 일절 쓰지 않겠습니다. 결혼에 집착하지도, 그의 귀환에 집착하지도 않겠습니다."

용사의 혈통만이 목적이라면, 더 걸맞은 방법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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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끄럽네..."

그 사건들이 일어난 이후, 메이드가 밖에 나가자고 해도 한사코 거절했다.

그녀가 좋은 의도로 나를 내보내려는 것도 이해했다. 제일 큰 위험이었던 궁사가 지하 감옥에 들어갔다는 것도, 거짓말은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정말 얼마 남지 않았다. 혹여나 변수가 더 생기는 것은 사절이었다.

"당신들, 네르웬의 앞을 막아선 건 좋았어요. 하지만, 실패했다는 건 전부 알고 계시죠?“

메이드는 의기소침해진 호위병들을 괴롭히며, 그들을 단단하게 준비시키고 있었다.

”앞으로도, 누가 이 방에 들어오든 절대 통과시키지 마세요."

그녀가 왜 화를 내는지는 알 것 같았지만, 될 수 있으면 살살 해 줬으면 한다. 야단치는 소리가 복도 밖에서 방 안까지 들릴 정도로 시끄러운 데다, 더 이상 누군가가 마음 상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조용히 하라고 소리치는 것보다는, 메이드를 이쪽으로 데려오는 게 더 나을 것 같았다. 이유가 무엇인지는 몰라도, 그녀는 내게 호감을 느끼고 있는 것 같았으니까.

하지만 이내, 호위병을 야단치는 것보다 더 커다란 소리가 복도에서 들려왔다.

"절대 안 됩니다! 황녀님이 명하셔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겁니다!"

"내 아버지의 왕궁이고, 내 아버지의 명령이다. 내가 이 궁에서 들어가지 말아야 할 곳이 있나?"

듣기만 해도 화가 치미는, 용사의 목소리였다. 저걸 듣고 계속 독서를 이어나갈 수는 없을 것 같아, 나는 조용히 책을 덮었다.

"그러면, 황제 폐하께 직접 말씀드리겠습니다! 아니, 명령으로 오신 거라면 명령서라도 가져와 주십시오!"

메이드의 까랑까랑한 목소리가 황녀의 진입을 막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황녀가 이곳에 오는 건 반쯤 포기하고 있었는데.

"저 양반은, 아예 숨길 생각이 없나..."

"구두 명령이었다! 황제 폐하께서는 이미 연로하시다. 이런 사소한 일로, 그분을 귀찮게 만들 성싶으냐!"

"남작님께서도 지쳐 있습니다. 섣불리 들어오게 두지는 않습니다!"

한숨이 절로 새어 나왔지만, 황녀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쉽사리 포기하는 성격이 아니다.

메이드의 고집도 만만치 않았으니, 가만 놔두면 저 밖에서 몇 시간이고 시끄럽게 말다툼을 벌이고 있을 게 분명하다.

나는 삐걱거리는 몸을 억지로 세워, 비틀비틀 문에 다가갔다.

"뭡니까."

문 앞에 있는 황녀는, 평소와 같은 기사의 옷차림을 하고 있지 않았다.

보석이 치렁치렁 달려 있는 하얀 드레스다. 평소에 이런 옷을 잘 입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어색하고 서투른 모습이었지만.

"남작님?"

"용건이 있다면 빨리 말하고 떠나시죠."

"안에서 얘기하겠다. 다른 이들을 물려라."

애초에, 그녀가 내게 해를 가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내 방에 마음대로 들어오게 하는 건 불편했지만, 일 초라도 빨리 내 곁을 떠난다면 그걸로 족하다.

내 방에 들어온 엘레노어는, 평소와 같은 감정 없는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어떤가. 매혹적인가?"

"그딴 건 제발 시녀나 다른 기사에게 물어보십시오. 제 알 바 아닙니다."

"그런가."

잠시 정적이 흘렀다.

"결혼 건은 황제 폐하께 말해 뒀을 텐데요. 이제 그만 포기하시죠."

"명령이다. 그 과정에서, 네게 강압적으로 대했던 것을 사과하겠다. 귀환 건 역시, 황제 폐하께서 약속하신 일. 내가 멋대로 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미안하다."

잠시 고개를 숙인 용사였지만, 아직 본론은 시작하지도 않았다.

"나는, 황실에 용사의 가호를 받기 위해 너와 결혼해야 한다. 하지만, 네 귀환은 절대적인 것. 깨트릴 수는 없다."

"하고 싶은 말이 뭡니까"

"내 몸, 여자로서의 매력은 없나?"

"..."

객관적으로 보자면, 아름다운 것은 사실이었다. 매끄러운 흑발과 타고난 얼굴, 끝없는 수련으로 단련된 몸, 기품이 서린 분위기.

하지만 그 모든 것을 내 증오가 덮어 버리고 있었다.

"지금은 아닙니다."

"우리의 과거를 다 잊고, 그저 여자 하나가 들어왔다고 생각한다면?"

"...그걸 제 입으로 인정하긴 싫군요."

"긍정이군. 좋다. 그렇다면, 네가 전에 한 말은 모두 잊어버리도록. 결혼도 책무도 신경 쓸 필요 없다."

용사는 숨을 깊게 들이쉬더니, 단추를 하나 풀었다.

"뭘 하시든 상관없지만, 제 방에서는 나가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결혼 따위의 예식으로 서로를 묶을 필요는 없지. 가호가 혈통으로 계승된다면, 계속 자네의 육신이 남아 있을 필요는 없으니까. 그 씨앗만 내 몸으로 받아내도 상관없다."

나는 잠시 눈을 감았다.

여자로서, 황녀의 가치는 높다. 하지만, 그녀와 몸을 섞는 것 자체가 싫었다.

"지금까지... 그런 짓, 많이 하셨습니까?"

용사는 궁사만큼은 아니더라도, 꽤 자존심이 센 편이다. 깔아보던 내가 그녀를 조롱한다면 자존심에 큰 타격을 받을 것이다.

"이 몸은 아직 처녀의 몸이다. 남작이 나를 짓밟고 지배욕을 행사하기에, 부족하지는 않을 거다."

하지만 그녀는 내 말이 그저 그녀의 가치를 판단하는 말이라고 생각했는지, 가볍게 받아치며 계속 단추를 풀었다.

"역겹다고 생각하지는 않으십니까? 이렇게 남자에게 몸을 팔아, 창부라도 하지 못할 일을 하는 게?"

"역겹다고?"

그녀는 드레스를 가볍게 벗어 던졌다. 프릴로 장식된 야한 속옷이 가슴과 음부를 겨우 가리고 있었다.

"제국을 위한 일에, 책무를 다하는 일에 내가 역겨움을 느낄 리 없다!"

갑옷 안으로 감춰져 있던 가슴이 그 형태를 드러냈다. 몸매는 시원하리만치 좋아, 어떤 미녀를 가져다 놔도 그녀보다는 못할 거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객관적인 시선이 아니라 내 시선으로 볼 때는, 그저 역겨운 괴물일 뿐이었지만.

"지금도 제국의 정보요원들은 너보다 훨씬 더 역겹고, 추악하며, 의무를 지키지 않고, 법과 도덕을 헌신짝처럼 여기며, 늙어빠진 남자들에 품에 안겨 아양을 떨고 있다."

하지만 그 눈빛은, 뼈가 저릴 만큼 단단했다.

"단지 제국의 평화를 위해, 황제 폐하를 위해! 단어 하나, 단서 하나라도 찾아내기 위해 그런 일을 한다. 내가 단 한 순간이라도 그들을 역겹다고 생각했을 것 같나? 검을 쓰지 않는다고?"

"...그럴 리가 없죠."

"창부 같다고? 내가 순결을 유지한 것은, 제국을 위해, 언젠가 있을 정략결혼을 위해 내 순결이 필요하기 때문이었다. 제국을 위해 지켜 온 것을 제국을 위해 바치지 못할 이유는 없다."

야한 속옷 차림의 여자가 하기에는 어울리지 않는 말이었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진지했다.

"내 책임을 다하기 위해서라면, 황제 폐하의 명령을 받들기 위해서라면, 난 더한 것도 할 수 있어."

"...황제 폐하께서는, 제가 다음 황제가 되는 것도 고려하고 계시더군요. 그렇다면 어떻습니까?"

그녀는 잠시 머뭇거렸지만, 그 시간은 길지 않았다.

"황제 폐하께서 명하신다면, 그걸 따를 뿐이다. 네가 새로운 황제가 된다면...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지만, 그렇다 한들 내 책임을 다한다. 백금 기사단의 단장으로서, 새로운 황제의 명을 받들어야겠지."

"유감이네요. 당신의 각오는 잘 알아들었습니다만, 저는 당신을 안을 생각 따위는 없습니다."

"왜지? 본래 있던 세계로 돌아가는 데, 걸림돌이 될 일 따위는 없을 거다."

"애초에, 본래 있던 세계가 좋아서 돌아가는 게 아니에요. 이 세계가 싫어서 도망치는 거지. 그리고, 그중 가장 싫은 사람이 당신이고."

나는 눈을 똑바로 뜨고 그녀를 노려보았다.

"유린하고 싶다는 욕망은 들지 않나?"

"별로. 그냥 내 눈앞에서 사라지세요."

황녀는 입을 다문 채, 다시 주섬주섬 드레스를 입었다.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도, 내 여자로서의 가치는 이 정도인가... 알겠다. 황제 폐하의 명령이 떨어지기 전까지, 더 귀찮게 할 일은 없을 거다."

"저도, 당신을 괴롭게 할 일은 없을 겁니다. 이제 떠나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테니까요."

드레스를 전부 입은 황녀는, 문을 열고 나가며 스쳐 지나가듯 말했다.

"우둔하긴. 네놈 따위로 괴로워해 본 적은, 한 번도 없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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