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화 〉 복기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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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개를, 숙였다.
절대 부러지지 않을 전사, 세계수의 대전사이자 태어나면서부터 가장 우월한 전사였던 그가, 고개를 숙였다.
그걸 인지한 것은, 땅에 묻은 그의 냄새를 한참 동안 개처럼 킁킁거리고 난 다음이었다.
네르웬은 고개를 들었다.
항상 자연 속에서 깨끗해야 할 그의 옷은, 어느새 여러 냄새로 덮여 어지러워져 있었다.
이 정도 먼지와 냄새 따위, 한 번 손을 휘젓기만 하면 자연이 알아서 깨끗하게 만들어 줄 것이다.
하지만 그러면 옷에 남은 냄새마저 흩어질까 봐, 그녀는 차마 손을 휘저을 수 없었다.
"인정할 수... 없다."
돌아가야 한다. 더 이상 그에게 집착해서는 안 된다. 치유받아야 한다.
할 수 있는 건 전부 했다. 고개 숙여 부탁하는 것도, 그녀의 긍지와 자존심을 처참하게 땅에 버려 가며 했던 애원이었다.
그는 타협할 생각이 없었다. 그렇다면, 억지로라도 데려가야 한다.
세계수에서 태어난 그녀였으니, 어떤 문제가 있던 세계수는 그녀를 원 상태로 돌려놓을 것이다. 잠깐, 아주 잠깐만 그를 데려가면 된다.
그의 신체 일부를 뜯어 가져갈 생각도 해 봤지만, 영혼의 냄새다. 주인 잃은 신체는 오래가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눈은 흔들리고 다리는 떨렸지만, 그 냄새를 쫓아가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어느새 시간은 밤이 되었고, 그는 계속 움직이고 있었다. 그녀는 짐승처럼 그의 흔적을 쫓았다.
"으..."
만약 성공한다 해도, 그녀의 앞날은 어두웠다.
남작을 납치하는 일이다. 아무리 세계수가 위대한 존재고 엘프들이 우월한 종족이라 한들, 인간은 수가 너무 많았다.
정해진 인원만이 태어나는 것을 허용하는 세계수에 비해, 그들은 분별없이 쾌락을 위해 자손들을 늘려 왔으니까.
엘프 장로들 사이에서도, 인간과의 정면충돌을 원하는 이는 거의 없었다.
숲 밖에 나온 어린 엘프를 노예로 부리는 것을 금지하고 통제한 것은 제국이었다. 만일 사태가 확산되어 전쟁으로 번진다면, 그 강대한 기사들과 숲을 불태우는 마법사들과 싸워야 한다.
그래도, 지금 가만히 있는 것보다는 나았다. 엘프라고는 믿을 수 없이 느리게, 네르웬은 남작을 추적했다.
멀리서, 그가 호위병, 메이드와 함께 걸어가는 것이 보였다.
냄새는 짙어졌다. 그를 만나러 간다는 것만으로도, 쉽사리 흥분하지 않는 엘프의 심장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이전의 추적은, 들켜도 상관없다는 어설픈 마음가짐으로 이루어진 추적이다. 지금, 조금이나마 진심을 다한 그녀의 추적을 알아챌 사람은 없었다.
평소처럼 활시위에 활을 얹다가, 엘프는 그의 목적이 사살이 아닌 생포임을 떠올렸다.
직접 움직여야 한다. 저 하등 생물 사이로 파고들어, 저 냄새의 덩어리인 짐꾼을 안고 뛰어야 한다.
고통스럽고 비참한 일이었지만, 네르웬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몇 번 숨을 들이셔 이성을 찾은 다음, 그녀는 짐꾼에게 달려들었다.
"뭐, 뭐야!"
"엘프다! 엘프가 여긴 왜!"
엘프는 시민들에게도 보기 힘든 존재였다. 그저 걸어 다니는 엘프라면 동경의 대상이었겠지만, 흉흉한 움직임으로 싸우려 드는 것은 두려운 일이었다.
세 번이나 당할 생각은 없었는지, 호위병이 바로 창을 뽑아 짐꾼을 감쌌다.
"비켜라!"
하지만, 아무리 잘 훈련되어 봤자 병사다. 엘프를 따라올 수 있을 정도의 실력이었다면, 애초에 호위병 자리에 만족하고 있지 않았을 것이다.
네르웬의 짧은 검이 순간적으로 궤적을 그렸다. 창날이 부러진 호위병은 잠시 당황했지만, 한 발짝 빠지며 검을 뽑아 들었다.
하지만 그것도 헛된 저항에 불과했다. 호위병을 밀어 넘어뜨린 네르웬은, 짐꾼을 안아 들려 했다.
흉흉한 눈의 짐꾼이, 호위병의 검을 쥔 채 그녀를 노려보기 전까지는.
"...결국, 이렇게 나오신 겁니까?"
그의 차가운 눈동자를 정면에서 보자,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꼈다.
본능적인 무언가가, 그녀 안에서 소리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를 화나게 해서는 안 된다. 그에게 미움받아서는 안 된다. 지금이라도 굴욕적으로 허리를 숙이고, 그에게 자비를 구걸해야 한다.
'나는... 세계수의 대전사 네르웬이다...'
억지로 정신을 차려, 네르웬은 짐꾼의 손을 발로 걷어찼다.
"흡!"
손가락이 부러질 수도 있을 정도로 강력한 공격이었지만, 짐꾼은 버텨냈다. 아직 그의 손은 칼을 쥐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그녀를 차가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메이드가 앞장서서 소리쳤다.
"이건 정말 황제 폐하께 보고될 겁니다. 당신은 지금 제국의 귀족을 적대했어요! 당신이 어떤 종족이든, 내일은 철창 안에 갇히게 될 거예요!"
항상 깨끗한, 모두가 좋아할 만한 일을 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를 증오하는 눈빛마저, 그 근간에는 두려움과 공포, 경외심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녀를 보는 이들은, 더러운 바퀴벌레나 추잡한 범죄자를 보는 것 같은 눈으로 그를 보고 있었다.
"으아아아아!!!"
인정할 수 없다. 저딴 자들에게 저런 시선을 받기 위해 용사 파티에 들어온 게 아니다. 그의 냄새를 참고 수많은 사선을 넘어가며, 괴물과 마족을 사냥하고 마왕을 퇴치한 게 아니다.
네르웬이 전력으로 후려치자, 그는 결국 검을 놓쳤다.
하지만 그는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저 역겨운 것을 보는 표정으로, 주먹을 꽉 쥘 뿐.
"주, 죽이려는 게 아니다! 그저, 잠시 데려갈 뿐이다. 세계수가 있는 곳까지만!"
"그럴 거면, 점잖게 부탁을 하셨어야지... 되도록이면 편지로. 당신 얼굴 보기 싫으니까."
그는 목을 한 번 풀더니, 두 주먹을 세게 맞댔다.
"어쨌든, 안 된다는 말 외에는 해줄 수 있는 말이 없군요. 어디 할 수 있다면 힘으로..."
그의 냄새가 머리를 자극했다. 더 이상 시간을 끌면 안 될 것 같다는 불안감에, 네르웬은 거칠게 그에게 달려들었다.
"하아아아앗!"
"네르웬 양. 이 상황을 설명해 주시죠."
하지만 그녀 앞에 선 것은 에네렐 남작이 아니었다. 검은 머리칼을 휘날리며 빛나는 검을 든 제국 최고의 기사, 황녀 엘레노어가 그 앞에 서 있었다.
원정을 마치고 돌아오던 도중 소란을 느끼고 급히 달려온 여기사는, 그 주체가 자신의 친구일 거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운이 좋으시군요."
에네렐은 픽 웃으며 돌아섰다.
"당신. 그녀에게 뭔가 했습니까?"
"제가 묻고 싶군요. 제가 무언가 했었다면, 뭐든 취소할 테니 제발 저 궁사의 얼굴을 보지 않게 해 주시겠습니까?"
엘레노어는 그녀의 몸에서 검을 떼어냈다. 아무리 날랜 그녀라고 한들, 이 거리에서 검사와 눈을 마주치면 벗어날 방법이 없다. 용사라면 더더욱 그랬다.
"네르웬, 내 친구여. 이건 제가 용서할 수도 없는 사안입니다. 저는 기사로서, 제국의 귀족에게 해를 입힌 자를 구금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엘레노어..."
거친 여행 중에, 그녀의 강직하고 훌륭한 영혼의 냄새는 활력제가 되어 주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저 짐꾼의 냄새를 가리는 악취에 불과했다.
"안 돼. 제발, 제발... 날 이대로..."
엘레노어는 그녀의 몸에 검을 겨눴다. 네르웬은 순순히 병사들의 포박을 받아들였다.
엘레노어의 등 뒤로, 다시 황궁으로 돌아가는 짐꾼의 뒷모습이 보였다. 네르웬은 하염없이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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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수의 여신... 네르웬의 증상..."
파시어는 그의 제멋대로인 행동 사이로, 어떻게든 공통점을 찾아내려 했다.
"복수는 이미 이루어졌나?"
엘프의 정신을 건드리는 건 매우 어렵고도 복잡한 일이었지만, 신이 개입했다면 얘기가 달랐다.
그녀는 잠시 눈을 감고, 자신이 용사였으면 어떻게 행동했을지 생각해 보았다.
"협력자를 구하고... 당장 눈에 띄지 않게... 음.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위험할지도..."
정보를 얻을 루트는 많았다. 네르웬은 당장 감옥에 들어가 있어 심문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지만, 다행히도 경비병의 친구 중 한 명이 술술 정보를 풀어 주었다.
"네르웬이냄새에 집착하게 만든다면, 꽤 말이 되는 복수가 될 수는 있겠어."
폭식으로 다른 이들을 괴롭히던 왕에게, 모든 것을 먹어치우다 자신까지 먹어치우는 저주를 내린 신처럼.
마법이든 신성력이든 저주든, 원인과 결과의 연계는 필수적이었다.
"이미... 내가 필요 없는 건가?"
황실에 대한 복수에 미적지근했기에, 그의 목적이 복수가 아닐 수 있다는 희망적인 상상도 해 보았다.
하지만 네르웬의 행동은 분명 이상했다. 여기에 그가 개입되어 있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은, 희망적인 상상의 범주를 넘어서는 일이었다.
이미 복수는 이루어지고 있다. 고아원 봉사를 핑계 삼아 에리니스의 신전을 방문하는 것은, 지나치게 속이 보이는 핑계였다.
"최악의 경우에는... 연구 결과라도 지켜야겠군."
후계자를 정해야 할 필요성은 느끼지 못했었다.
그녀가 원하는 방향대로 이 연구에 매진해 줄 사람도 없었고, 그녀는 이미 수명의 제약을 받지 않는 상태였으니까.
천 년이 걸리더라도, 혼자서 연구를 끝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제발, 그냥 돌아가 주지 않으려나."
넋두리를 늘어놓은 파시어는, 그게 실현 가능성이 지나치게 적은 상상이라는 것을 깨닫고 한숨을 쉬었다.
그런 치욕을 겪은 남자가, 어떤 복수도 하지 않고 순순히 돌아가 줄 리 없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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