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화 〉 복기1
* * *
"어서 오십시오!"
"그래. 수고하려무나."
마탑의 주인이 두 발로 아장아장 걷는 모습은, 영 보기 힘든 진풍경이었다.
평소의 그녀는 공중에 둥둥 떠다니며, 자신의 마력과 권위를 과시하곤 했으니까.
마왕 퇴치를 나서기 전에 몰래 걷기 연습을 해야 했을 정도로, 그녀의 걸음은 어설펐다.
하지만 지금은, 겨우 권위를 세우기 위해 마력을 쓸 정도로 여유로운 상황이 아니었다.
공방에 들어온 마법사는, 시체처럼 누워 있는 새들을 쭉 훑어보았다.
"1번, 2번, 3번... 5번은 돌아오지 못한 모양이구나."
클리버를 집어 든 파시어는, 나란히 누워 있는 새의 목을 하나씩 내리쳤다.
"이것도 오랜만이네..."
마법과 관련된 일이라도, 이런 사소한 잡무는 휘하에 있는 마법사들을 통해 처리하던 그녀였다.
하지만, 이 일은 중요도가 달랐다. 용사의 생각이 대체 뭔지 제대로 파악하기 전까지는, 이 일을 알고 있는 사람이 최대한 적은 게 좋았다.
"복습부터 해 볼까..."
수직으로 솟아오른 연못에 그림들이 그려진다. 에네렐과 엘레노어가 말다툼을 하고 있는 장면이다.
"소리는 제대로 안 들리지만... 그래도, 결혼이라 판단하는 편이 옳겠지."
입의 모양과 대화의 맥락을 고려해 보면, 확실하지는 않더라도 어느 정도 그들의 대화를 추측할 수 있다.
공책을 꺼낸 마법사는, 마법으로 펜 여러 개를 동시에 움직여 메모를 시작했다.
"황녀 정도면... 외모는 꽤 봐줄 법하지 않나?"
복수가 목적이라면, 결혼을 가장하고 제국을 안에서부터 집어삼키는 것도 방법 중 하나가 될 수 있었다.
그걸 거부했다는 것은, 철저하고 잔인한 복수를 원하고 있다는 걸까.
적의가 없다고 판단하는 건 지나치게 안일한 생각이다. 실제로 그는, 파시어와 다른 이들에게 혐오를 숨기지 않았다.
대화 내용은 애매할지언정, 황녀의 무례한 태도는 눈에 쏙쏙 박혔다.
한 번 본 내용이지만, 볼 때마다 암담한 한숨이 늘어가는 장면이었다.
"대체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냐, 미련한 놈들아..."
마법사들에게 여신이란, 영 애매한 존재였다.
그녀의 실존 자체를 의심할 수는 없었다.
가끔 마법이나 신성력만으로는 이룰 수 없는 기적을 힘을 합쳐 이뤄내야 할 때도 있었고, 여신의 힘을 빌리는 것이 효율적이고 놀라운 일이라는 생각은 하고 있었다.
하지만, 여신은 지나치게 변덕스럽고, 위험하고, 예측할 수 없는 존재였다.
용사는 여신의 사랑을 받는다. 이건 수십 번의 용사 소환과 수천 개의 사료에서 공통적으로 드러나고 있는 사실이었다.
황제의 총애를 받아 명검을 하사받은 이가 있다면, 그의 진짜 힘은 명검 따위가 아니다. 황제의 총애가 그의 진짜 힘이다.
역사 속, 전설 속 성자 중에서도 극히 드문 몇몇을 제외하면, 여신을 살아서 만나는 이는 없다.
하지만, 용사는 이곳에 오기 전부터 여신을 직접 만나 대화를 한 후 소환된다.
"기도라도 한다면, 어쩔 셈이냐..."
용사의 힘 따위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여신의 저주를 받는 것이 두려운 것이다. 자칫하다간 이 세계 전체를 흔들 수도 있다.
이제 와서 달라지는 건 없습니다.
믿을 수 없군요.
다 알고 있었군요.
알아서들 치르시죠.
파시어의 눈이 여러 영상을 빠르게 훑었다. 동시에 흘러나오는 음성들을 몇 번이고 반복해 듣는다.
의도를 파악해야 한다. 그조차 인지하지 못한 감정의 편린들을 찾아내어, 그를 안정시켜야 한다.
무엇을 포기할지도 어서 정해야 한다. 상황을 파악하고, 그가 얼마나 분노했는지, 무엇에 분노했는지를 알아낸 후, 버릴 수 있는 건 모두 버려야 한다.
만약 그게 제국이라 해도 마찬가지다. 수천, 수만, 수억 명의 사람이 죽는다 해도 마찬가지다.
모든 것을 잃는 것보다는 나을 테니까.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것을 차근차근 분리해서, 저울에 재고 가벼운 것을 버려야 했다.
그렇다면, 당신은요?
다시는 제 앞에 나타나지 마세요
그리고, 마탑의 주인도 예외가 될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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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녀가 '어떤 남자'와 결혼을 전제로 만나고 있다는 소식은, 입에서 입으로 순식간에 퍼져 나갔다.
엘레노어도 딱히 그걸 숨기려 하지 않았으니, 남의 연애사에 관심이 많을 시녀와 여기사들 사이로 그 주제가 퍼져 나가는 건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그리고, 황궁에 드나드는 이가 많은 교회도 자연히 그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저 왔어요, 언니들!"
"셀리아!"
수녀들은 그녀를 만나자마자 달려들어, 그녀의 금발 머리칼을 힘차게 쓰다듬어 주었다.
"무슨 얘기하고 있었어요? 수도 사제님이 들으면 안 되는 얘기에요?"
신성하고 억압적인 곳이다. 한창때의 여자들을 모아 놓으니, 그들은 유흥거리에 몰두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연애사, 궁정 이야기, 용사 파티의 이야기는 모두의 관심을 끌 수밖에 없는 주제였다. 그 셋이 전부 합쳐진다면 더욱 그랬다.
"비밀은 아닌데... 음, 비밀이 맞을지도? 어쨌든, 수도 사제님은 이런 얘기 별로 안 좋아하시니까..."
얘기를 미리 들은 수녀 두 명이 음흉한 미소를 지은 뒤, 창문 밖과 문밖으로 각각 흩어졌다. 고개를 빼꼼 내맨 채, 철저한 경계를 수행하는 것이다.
"오, 정말 재밌는 얘긴가 봐요!"
"쉿, 그러니까... 들어 봐. 우리 황녀님이, 남자와 사귀고 있다는 소문이 있어?"
"진짜요?"
셀리아가 입을 틀어막았다. 동그래진 눈이, 그녀가 얼마나 놀랐는지 보여주고 있었다.
용사와 같이 모험을 떠난 그녀라서 더욱 잘 알 수 있었다. 엘레노어가 여자라기보다는 기사, 용사, 황가의 일원으로 살아왔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래. 이건 네가 더 잘 알 수도 있겠다. 혹시, 짐작 가는 사람 있어?"
"아니요. 전혀... 없어요."
엘레노어와 함께 오랜 시간을 보낸 성녀였지만, 황녀가 사랑이나 미련을 드러낸 사람은 없었다.
"진짜? 용사 파티를 따라다니던 남자라거나, 막 위험한 순간에 구해 준 기사 같은 분 없어?"
"..."
짐꾼의 얼굴이 그녀의 머리를 스쳤다. 하지만, 도무지 상상이 가질 않았다.
그 남자는 싫어하는 사람 앞에서도 억지로나마 웃을 수 있는 사람이었지만, 황녀는 아니었다.
무능에 대한 혐오, 비겁함에 대한 증오를 숨기지 않는 사람이었다. 성녀는 그 짐꾼이 그 정도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분명 그가 황녀의 기준에 걸맞은 사람은 아니었다.
"그, 벌써요? 황녀님, 황제 자리에 오르실 생각 아니셨나요?"
현 황제는 치세를 이끈 명군이었지만, 자식 복은 없었다. 직접 낳은 자식이라고는 엘레노어 하나밖에 없었으니까.
그리고 남자든 여자든, 첩이나 애인이 아닌 반려를 찾는다면 황제 자리에 오르고 난 뒤 상대를 물색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제위에 오를 이의 반려가 된다는 것은, 정치적으로 무시무시할 만큼 거대한 카드였다.
'혹시나' 그 자리에 자기 딸이 들어갈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하는 귀족들이 전부 그 후계자를 지지할 테니까.
엘레노어와 계승권 다툼을 갖출 만큼 심지 있는 황족은 없었다. 논란에 휘말렸거나, 황실의 피가 너무 옅거나, 너무 어리거나 너무 늙었으니까.
마왕을 퇴치한 용사이자 기사의 지지를 받는 엘레노어가 황제가 되는 것은 기정사실이었다.
하지만, 반대로 말하면 그런 일까지 해야 할 정도로, 여황제의 즉위가 이례적이고 힘든 일이라는 뜻이었다.
"그러니까, 엄청나게 좋아하는 사람 아닐까? 그 황녀님도 연애감정이 살아 있었던 거지!“
"그, 그럴 리..."
반대로 '원하는 사람'과 결혼하려 한다면, 지금이 그나마 가능성 있는 순간이었다.
황제 자리에 오른 다음에 격이 맞지 않는 사람과 결혼하려 한다면, 다른 가문들의 집단적 반발을 사게 된다.
대안이 없으니 다른 후계자를 앞세운 반역이 일어나지는 않겠지만, 정치적 부채는 황권에 악영향을 끼친다.
"누, 누군데요?"
"레오드린 남작. 원래 실종된 사람인데, 예전에 황궁 근처에서 찾았다고 해."
성녀도 그 이름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짐꾼을 정식으로 만나고 싶어 문의를 넣었을 때, 시녀가 '레오드린 에네렐 남작님'이라고 했으니까.
"알아?"
"아, 알긴... 해요."
가능성이 한없이 부족한 망상이었지만, 용사가 연애감정을 품을 만한 남자가 있다면 그 사람 외에 다른 남자가 없었다.
어쩌면 그와 그녀가 싸웠던 것도, 전부 연기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밤에 단둘이 하던 훈련이, 어쩌면 모의 전투로 끝나지 않았을지도.
"그, 아, 아, 아니에요! 그럴 리가 없어요! 진짜 아니에요!"
성녀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호기심에 아주 잠깐 읽어 본 야한 판화의 장면이 눈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아니면 아닌 거지. 왜 얼굴이 빨개졌어."
"그, 진짜 아니에요..."
성녀의 마음속에 침울한 감정이 어렴풋이 생겨났다.
그와 성녀는 아무 관계도 아니다. 얼마 전에 만났을 때도, 에네렐은 성녀를 단호하게 거부했다.
황녀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했지만, 정말 철저하게 비밀 연애를 이어왔다면 눈치가 부족한 성녀가 속아 넘어갔을 가능성도 있었다.
조금, 배신감을 느꼈다. 용사와는, 힘든 일이든 기쁜 일이든 전부 털어놓을 수 있는 친구가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그리고, 그뿐만이 아니었다. 이게 이기적이고 가져서는 안 될 감정이라는 것은 느끼고 있었지만, 에네렐을 생각하자 아쉬움과 슬픔을 느꼈다.
아무리 무리한 부탁을 하더라도, 어떻게든 들어 주던 그다. 당장 곧 죽을 것 같은 얼굴을 하면서도, 괜찮다고 말해 주던 그다.
여행 초반에는, 지금보다도 더 어렸던 성녀에게 환하게 웃어 준 적도 있었다.
여신의 이야기를 풀어놓으면 흥미로운 얼굴로 들어 주고, 성녀가 힘들어할 때마다 버팀목이 되어 줬다.
아직, 성녀는 자신의 감정을 자각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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