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화 〉 거절8
* * *
"거기, 멈추세요."
"...저 말입니까?"
기분이 좋지 않았다. 용사와 대판 싸운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다.
말 한마디를 뱉는 데도 시간이 필요했다. 나는 평정심을 유지할 여력이 남아 있지 않았다.
"당신이 황녀 폐하와 독대했던 날,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나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여기사였다. 어려 보였으니, 미성년이거나 성년이 된 지 몇 년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왜 당신과 만난 후 황녀 폐하께서 언짢아하셨는지, 이유를 설명해야 할 겁니다."
"별 이유 없습니다."
그녀의 계획대로라면, 나는 비밀을 지켜 줘야 했다. 어디까지나 추잡하게 달라붙는 나를, 황녀. 그때는 황제가 되어 있을 여자가 마지못해 받아 줘야 했다,
하지만 그런 문제들을 모두 고려하기에는, 내가 너무 지쳐 있었다.
내가 진짜 용사라는 것 따위는, 당당하게 꺼낼 수 있는 말도 아니고 이미 지키겠다고 약속했던 일이다.
하지만, 황녀가 무엇을 생각하든 내 알 바 아니었다. 기한이 지났다.
"그저, 그녀의 청혼을 내가 거절했을 뿐입니다."
여기사는 코웃음을 쳤다.
"레오드린 가문이라고 자기가 뭔가 된 것 같은 감정이 드는 모양인데... 어림없습니다. 황녀 폐하는 당신 같은 무뢰배에게 모함을 받아야 할 분이 아닙니다."
그저, 황녀를 과하게 좋아하는 것 같았다. 여기저기서 인기가 많은 그녀였으니, 그렇게 말해달라고 해도 이상하지는 않았다.
"아, 그래요. 그래서, 제가 어떻게 하면 되는 겁니까?"
"황녀 폐하께 목숨으로 사죄드리십시오."
그건 할 수 없었다. 애초에 내가 잘못한 일이 아니었다.
용사 파티원들은 모험 도중에 말도 못 할 정도로 나를 괴롭혔지만, 왠지 모르게 모험이 끝난 뒤로는 저자세를 보였다.
화해를 원하는 성녀나, 이해할 수 없는 이유로 내 냄새를 원하는 궁사까지.
아무리 내가 그들을 싫어한다 해도, 당장 벌벌 기고 있는 상대에게 해를 입힐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저 방 안에 나타난 역겨운 벌레를 보는 것처럼, 손을 휘휘 저어 내보내는 것이 고작이었다.
하지만, 황녀는 그러지 않았다. 마치 내가 제국이 결정한 일이면 무조건 따라야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한 것처럼, 뻔뻔할 만큼 당당했다.
"용사의 모험도, 헌신도 알지 못하는 당신 따위가..."
검술에 능한 것 같지는 않았다. 아직 몸도 제대로 만들어지지 않았고, 살기도 부족했다.
비교 대상이 기사 중 가장 강한 이라는 것은 정상 참작의 여지가 있겠지만, 그걸 감안해도 능력 있는 기사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제가, 그걸 모른다고요?"
'짐꾼'의 존재 자체는 어쩔 수 없이 이곳저곳에 퍼져 있었지만, 그게 레오드린 에네렐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매우 적었다.
"당신 같은 사람이 유언비어를 퍼트려 봐야, 금세 진실이 밝혀질 겁니다. 그때는, 단순히 제 경고가 아니라 형장의 이슬로 끝나게 될 겁니다."
이해할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내 말을 듣지 않는 사람에게 말을 더 하는 것은 낭비라고 생각했다.
그대로 그녀를 지나쳐 가려는 찰나, 그 기사가 내 어깨를 잡았다.
"어딜 도망치시려는 겁니까?"
그녀는 강한 악력으로 내 어깨를 잡았다.
싫다. 용사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것도 싫고, 멋대로 쳐들어와 제멋대로의 요구를 하던 그녀 때문에 다른 사람들과 싸워야 하는 것도 싫다.
"놓으시죠."
"듣지 않으실 거라면... 결투를 신청하겠습니다."
용사가 이 사람을 보냈을까. 아니, 그 사람이라면 차라리 직접 나를 찾아와 나를 괴롭히면 괴롭혔지, 이런 어설픈 사람을 보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기사 복장을 하고 있을 뿐, 속 알맹이는 영락없는 귀족 영애였다. 여기사가 존재하지 않는 세상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내 앞에 있는 그녀는 아니었다.
"말하세요! 대체 황녀님께 어떤 무례를 저질렀는지, 그리고 사죄하세요!"
다 포기하고 싶어졌다. 마음이 느슨해진다.
나는 어쩔 줄 몰라 하는 호위병에게 다가가, 허리춤에 있는 칼을 뺏었다.
"잠깐 빌릴게요."
"네, 죄, 죄송합니다!"
머릿속에서 휘몰아치던 생각들이 사라진다.
실전에서 검을 집은 적은 그리 많지 않았다. 대부분, 용사의 샌드백이 될 때 검을 집었다.
이걸 집었을 때는, 생각이란 걸 해본 적이 없었다. 내 어설픈 뇌로 그런 걸 했다간, 곧이어 몸에서 느껴지는 고통 말고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못하는 몸이 될 테니까.
싫다. 검에서 느껴지는 그립감이 싫다. 이걸 잡는 것만으로도 온몸이 부들부들 떨린다. 앞으로 일어날 일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온몸이 후들거리는 것 같다.
"하시죠. 결투."
나는 아무 표정 없이, 그녀에게 검을 내밀었다.
/////
호위병은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채, 검을 겨누고 있는 두 사람을 보고 있었다.
'큰일났다...'
본래라면, 남작의 안전을 위해 검을 들어야 할 쪽은 호위병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상대가 만만치 않았다. 검술 실력은 그저 그런 수준이었지만, 그녀의 가문은 만만하지 않았다.
물론, 레오드린 가문도 누구에게 격에서 밀릴 가문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가문에 정식으로 소속된 것도 아닌 호위병은 섣불리 저 여자를 막아서다가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진 격이 될 수도 있었다.
'위험한데...'
레오드린 남작은 황제의 총애를 받고 있었으니, 어떻게든 다른 사람을 불러야 한다. 하필 황성 내부에서 일어난 일이라, 호위가 두 사람이 아닌 게 문제를 키웠다.
그녀의 실력이 그저 그런 수준이라 해도, 어디까지나 기사로서 그저 그런 수준이라는 의미다. 훈련받지 않은 귀족 자제라면, 검을 들었다고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와라. 황녀님 앞으로 끌고 가 무릎 꿇고 사죄하게 해 주마."
"지금이라도, 대화로 풀지 않겠습니까? 되도록이면 그... 사람은 좀 빼고."
"황녀님께 예의를 지켜라, 미련한 놈!"
그녀의 수준을 넘어서는 일이었지만, 진짜로 남작이 죽을 위기에 처한다면 하다못해 그녀의 몸이라도 던져야 할 테니까.
/////
검이 날아온다. 사선이었다.
내가 보던 검에 비하면 하품이 나올 정도로 느린 속도지만, 그걸 보고 인지하는 것과 눈으로 피하는 것은 달랐다.
잠시 머뭇거리던 나는, 뒤늦게 검을 들어 그녀의 검을 받아쳤다.
"흐, 흐아앗!"
기합을 지르며 검을 내리치는 그녀였지만, 내 검을 뚫고 지나가기에는 완력이 부족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녀는 기사가 아니다. 기사인 척을 하고, 적당한 검술을 익힌 영애일 뿐이다.
내 몸도 단련되었다고 말하기는 부끄러운 수준이지만, 적어도 저 체격의 여자에게 힘으로 밀릴 정도는 아니었다.
좋든 싫든, 몸에 근육이 붙을 수밖에 없었다. 최고의 사냥꾼인 궁사가 여행에 동행했으니, 맛이 없고 역한 것과는 별개로 대부분의 여정에서 고기는 먹을 수 있었다.
몸에 조금이라도 허점이 있었다면, 마물에게 죽기 전에 용사에게 맞아 죽었을 것이다. 그녀의 훈련은 그 정도로 가혹했다.
용사의 힘까지 얻은 기사 중의 기사가, 반쯤 살의를 품고 거의 매일 검을 휘두른다.
그녀에 비하면 이 사람의 검은 너무 얇고 약했다.
"하아아앗!"
그녀의 검에서 반짝 마나가 뿜어져 나왔다. 상단에서 내리치는 내 검을, 그녀가 올려친 검이 강철째 잘라 버렸다.
하지만, 그녀가 쥔 검의 궤도는 내 몸에 영향을 줄 수 있는 궤도가 아니었다.
"으윽!"
나는 발로 그녀의 배를 강하게 걷어찼다. 검을 놓친 채 바닥에 쓰러진 그녀는, 거칠게 숨을 잡고 헛구역질을 하고 있었다.
"제가 죄송하게 됐습니다."
나는 쓰러진 그녀에게 다가갔다.
"...뭐, 라고?"
"제 분노를 엉뚱한 곳에 푸는 것이 성숙하지 않은 행동인 건 압니다. 당신에게 해를 입히는 것이, 제 건전한 삶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도 알아요."
"내가 아니라... 황녀님께 사과해라..."
"지금부터 일어날 일은, 전적으로 제가 제 감정을 통제하지 못하고, 마음이 성숙하지 못해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내가 그녀의 말을 들을 생각이 없다는 것을 눈치챘는지, 땅에 쓰러진 여자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내 주먹이, 그녀의 명치를 강타했다.
"꺄아아앗!"
옆구리에 주먹을 박는다. 살점이 뭉개지고, 몸 깊숙한 곳에서 무언가가 부서지는 감촉이 느껴진다.
"크, 크흣, 으으읏!"
사람을 때리는 입장이 되어 본 것은 오랜만이었다. 기분 좋은 감각은 아니다.
"놔, 놔! 내가 누군지 알아?"
그녀가 우는 모습도, 이런 상황에서 자신의 가문을 사용하려는 모습도, 붉게 달아오른 피부도 전부 싫다.
그렇게 때리고 또 때려서, 그녀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할 정도로 축 늘어진 순간.
"응?"
순간, 그녀가 사라졌다.
아니, 정확히는 사라진 게 아니었다.
그녀의 몸이 있던 곳에는, 작은 개구리 하나가 놓여 있었으니까.
"무, 무슨 일이 일어난 겁니까? 대체..."
"내가 한 게 아니야."
호위병이 깜짝 놀라 비명을 질렀다. 나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이 일을 저질렀을 사람을 찾고 있었다.
내가 아는 사람 중,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한 명뿐이다.
하지만, 그 사람은 이런 불필요한 행동을 저지르지 않을 사람이다.
사람을 개구리로 만드는 것은, 당연히 사람을 죽이는 것이나 개구리를 소환하는 것보다 어렵다.
그리고 당연히, 사람을 죽이는 것보다 심장에 날카로운 무언가를 박아 넣는 게 효율적이다.
개구리를 만드는 것보다, 그냥 시종을 시켜 하천에 있는 개구리를 잡아 오라고 시키는 게 더 효율적이다.
전부 그녀의 지식이었다. 마법은 이토록 부조리와 비효율로 가득 찬 학문이라는 것은.
"선물일세. 마음에 드나?"
그리고 그 마법사는 여유로운 몸짓으로 걸어 나와, 볼을 부풀리는 개구리를 부드럽게 손에 얹었다.
파시어였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