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화 〉 거절7
* * *
"...실례했습니다."
나는 황급히 옆에 있는 손수건을 꺼내, 그녀의 옷을 닦아 주었다.
그녀가 내게 좆같은 건 좆같은 거지만, 일단 지금 실수를 한 사람은 나였으니까.
딱 봐도 귀해 보이는 옷인데, 괜히 침 냄새라도 배어들었다간 큰 손해를 볼 것이다.
"상관없습니다. 갑작스러운 상황이니, 당황해하실 거라는 생각도 하고 있었습니다. 부디, 잘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생각..."
다시 안정을 찾은 나는, 그녀의 말뜻을 곰곰이 곱씹어 본 뒤, 헛웃음을 흘리며 용사를 노려보았다.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내가 실수한 건 실수한 거고, 용사의 말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애초에, 청혼하게 될 거다? 바라는 게 뭡니까?"
"레오드린 남작은 아직 인지도도 낮고, 급도 높지 않습니다. 황실에서 먼저 결혼을 청하기에는 무리가 있으니, 다른 사람들이 이 결혼을 이해할 수 있게..."
"먼저, 나부터 이해시켜야 할 텐데요."
나는 역겨움도 잊고 용사의 눈을 노려보았다.
"설명을 좀 많이 하셔야 할 겁니다. 대체 왜 제가 이 결혼을 승낙해야 하는지..."
"황제 폐하의 명령이라는 것은 제게 더할 나위 없을 정도로 확실한 이유지만, 레오드린 공은 그 정도로는 만족하지 못하실 테니."
"명령?"
내 헛웃음이 비웃음으로 보였는지, 용사의 눈매가 매서워졌다.
"태도를 주의하십시오."
"다짜고짜 와서 '결혼해 주세요.'라고 말해도 싫어했을 겁니다. 이제야 말을 꺼내는 거지만, 저는 당신이 싫어요."
마왕 퇴치만, 끝났다. 어떻게든 예의를 지켜보려 했지만, '모두에게 친절하고 따뜻하게' 대하기에는 안 좋은 기억이 너무 많았다.
“다행히, 예비 부부간에 공통점이 하나 생겼군요. 저도 당신이 싫습니다.”
"그런 사람과 결혼하라는 말을 당신이 하고 있는데, 말을 곱게 할 수는 없잖습니까."
"필요한 일입니다."
용사는 내게 조금 화가 난 것 같았지만, 분노로 자신을 잃을 정도로 어리석은 여자는 아니었다.
"저는 거의 확실한 차기 황제입니다. 하지만, 여자의 몸은 어찌할 도리가 없는 약점. 제 몸으로 후사를 이어야 하고, 임신했을 때 권력이 흔들릴지도 모릅니다."
저 몸으로 임신을 하는 건가. 아무리 생각해도, 아기가 불쌍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제국 안에 기반이 있는 가문과 혼인을 하게 되면, 어쩔 수 없이 그들 가문의 세가 강해지겠지요. 그렇다고 이름 낮은 가문과 결합하게 된다면, 황권 자체가 약해질 겁니다."
"그래서 접니까?"
나는, 대외적으로 레오드린 가문의 남자 하나가 실종되었다가 기적적으로 돌아온 것으로 취급받고 있다.
지지 기반이 없는 내가 무슨 짓을 하든, 황권이 위협받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다. 꽤 일리가 있었다. 하지만.
"그래서, 제가 그걸 받아들여야 하는 이유는 뭡니까?"
"...완고해졌군요. 모험을 다닐 때는, 좋게 말로 타이르면 잘 듣지 않으셨습니까?"
용사는 나를 겁주기라도 할 생각인지, 살기를 뿜어대기 시작했다.
솔직히, 무섭다. 무서워서 무언가 잘못된 행동을 할 것만큼 무섭다.
두려운 감정, 몸에 각인된 위축, 그녀의 위엄있는 외모에 대한 순응. 하지만 그 모든 것을 덮어 버릴 정도로 커다란 감정은, 그녀에 대한 증오였다.
"그때는, 우리가 마왕을 퇴치하고 있었지요? 저는 거기 동의했습니다. 그때 당신들이 했던 입바른 말과는 상황이 좀 달랐지만, 어찌 되었건 받아들였다고요."
"당신이 선택한 일입니다."
용사는 조금의 동요도 없이, 책임을 내게로 떠넘겼다.
"알아요. 그래서, 다 했지 않았습니까."
마왕을 죽이는 것은, 당장 막지 않으면 안 될 일이었다. 내 대우가 부당하다고 느껴도, 적당한 사명감으로 버틸 수는 있었다.
버텼다기보다는, 타락하지 않았다고 보는 편이 맞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런데 이 일은 아무리 생각해도, 마왕 퇴치와는 관련이 없는 일 같아 보입니다?"
"황제 폐하의 명령입니다...!"
최고의 기사는, 그저 살기만으로 민간인들을 제압할 수 있다고 한다.
그게 사실인지는 모른다. 보통 기사들은 검을 쓰는 데 진가를 보이는 이들이고, 위압과 살기로 해결될 일이라면 보통 장난치지 않고 검을 뽑아서 해결하니까.
반쯤은 뜬소문이었지만, 용사를 눈앞에서 본 나는 그 말을 신뢰하게 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지금 그녀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다는 것이 신기할 정도로 칼날 같은 살기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나는 멀쩡했다.
아마 그녀가 미처 가져가지 못했던 용사의 힘이 남아 있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몬스터를 뚫고 나가며 용사 파티를 따라다니는 동안 담력이 늘었을지도.
혹은, 조금 더 비현실적인 상상을 하자면.
"그걸, 제가 들어야 할 이유가 없네요?"
내 증오가 더 강하기 때문일 수도 있지 않을까.
"황제 폐하의 명령이란 말입니다! 제국을 위한 겁니다!"
"내 알 바 아니에요!"
나와 용사는 잠시 서로를 노려보았다.
"애초에, 이제 곧 떠날 사람에게 결혼은 무슨 결혼입니까. 아, 내가 가면 하세요. 내 이름을 어떻게 팔든... 어차피 내 이름도 아니지만, 결혼을 하든 양자로 들이든 신경 쓰지 않을 테니까요."
"본인이 필요합니다."
"아쉽네요. 본인은 이미 없을 텐데."
"그렇다면, 귀환을 늦춰야겠군요. 몇 년 정도 여기 더 머물러 주셔야겠습니다. 황권이 안정되면 적당히 사망했다고 하고 집으로 돌아가면..."
나는 잠시 눈을 감고 생각했다. 용사는, 내 안에 그어진 선을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넘어서고 있었다.
용사 파티에 대한 증오를 숨기고 참을 수 있던 이유는, 내가 떠날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내게 뭘 하든 용서할 수, 아니 잊을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부터 내 귀환을 막는다면 화를 낼 수밖에 없다.
"몇 년을 기다렸는데, 이제 와서 더 참으라고요?"
나는 마지막 남은 이성을 끌어모아, 그녀의 양심에 호소했다.
한 달도 미칠 노릇이지만, 그래도 이해할 수 있었다. 내가 생각해도, 용사 파티는 비정상적인 속도로 임무를 완수했다.
하지만 자기 좋을 대로 이유를 붙여 내게 희생을 강요하는 모습은, 이미 용사를 충분히 싫어하던 나에게도 색다른 혐오를 불러일으켰다.
원래 용사는, 이렇게 비이성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맞는 말을 아주 더럽고 기분 나쁘게 해서 사람을 불편하게 만드는 사람이었지. 처음부터 틀린 말을 하지는 않았다.
어쩌면, 원래 이런 사람이었는지도 모른다. 마왕 퇴치라는 목적이 그녀의 목적과 일치하기에 '옳지만 기분 나쁜' 말을 한 것이고, 정치를 하는 그녀의 본모습은 이것일지도.
"당신, 꽤 당당해지셨군요. 황제의 친절을 등에 업으니, 자신이 마치 뭐라도 되는 것처럼 느끼셨습니까?"
"하..."
용사 파티에서는, 참았다. 마왕 퇴치라는 목표는, 무리 없이 잘 이루어지고 있었으니까.
괜히 내가 짐꾼이 아니라 용사라는 것을 드러내서 팀워크를 망치고 싶지 않았다.
마도구를 줍는 일이나 주민들과 대화하는 일, 불침번을 서는 일이나 여타 잡일을 하는 것도 다 내가 효율적이라는 대의 앞에 참았다.
"지금은 참을 이유가 없어진 것 뿐입니다."
"지금은 당신을 존중하며 대하고 있지만... 황제 폐하의 호의가 끝나는 순간, 당신은 원치 않아도 제게 청혼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이야기가 너무 세서 잊고 있었다. 청혼, 그래. 그 빌어먹을 결혼이었다.
"절대 그럴 생각은 없습니다."
"제국이 당신을 그 세상으로 보내길 거부한다면, 당신이 뭘 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이제 협박인가. 안 그래도 충만했던 그녀에 대한 증오가, 쌓이고 더 쌓여 진득하게 눌어붙는 느낌이다.
"노력도 하지 않고, 그저 여신에게 용사의 권한을 부여받았었다는 것 외에는 내세울 것 없는 당신이? 책무를 포기하고, 힘을 모두 제게 넘긴 당신이?"
그 순간,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말을 삼가세요."
나는 끓어오르는 내 욕망을 억지로 눌렀다. 순식간에 이성이 돌아왔다.
"제가 틀린 말을 했습니까, 짐꾼 나리?"
나를 비꼬는 용사의 말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래, 이성을 찾아야 한다.
"...뭐, 틀린 말은 아니죠. 그런데, 그 때문에 제가 느껴야 하는 감정이 문제거든요."
'어떻게든' 한 달 안에 돌아갈 거라는 결심은 변함없지만, 그 외에 딱히 이 세상에서 무언가를 빼앗아 가거나, 해악을 끼치고 싶지는 않았다.
용사가 뭐라 하든, 개가 짖는다 생각하고 넘어가는 편이 좋았다. 다음에 나를 만나러 올 때는, 황족이고 뭐고 자리를 피해야겠다.
"제게도 감정은 있지만, 황실의 일과 제 책무를 감정이 억누르는 일은 없습니다. 감정에 휘둘린다는 거, 부끄러운 일 아닙니까?"
수련 중 몇 번이고 들었던 말인지라, 이제는 그녀가 다음에 무슨 말을 할지도 예측할 수 있었다. 이걸 존댓말로 듣는 느낌은 좀 색달랐다.
"초라함을 느낀다면 수련을, 불명예를 느낀다면 공적을 세워야 하는 것 아닙니까? 아무것도 하지 않고 비열한 감정만 키워 간다면, 결국 자신을 열등하고 저열하게 만들 뿐입니다."
"그런 문제가 아니에요.“
"그런 문제가 아니면 대체 뭡니까?"
"그 말은, 제가 돌아가기 위해서는 마치 '용사의 힘'이 필요하다는 것처럼 들리잖아요."
나는 남은 차를 전부 마셔 버리고, 그녀가 나가는 것을 보기도 전에 침대에 누웠다.
들을 가치도 없는 말, 고려할 필요도 없는 생각일 뿐이다. 자고 일어나면, 아마 잊어버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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