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화 〉 거절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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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사는 자신의 행동이, 문제로 가득 차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가 그저 이름 없는 짐꾼이었다면, 그녀의 행동은 효율적이고 올바른 행동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어리석게도 상대를 잘못 파악했다.
친구나 평민에게는 별문제 없을 행동이라도, 귀족에게 하면 결례가 될 만한 행동들이 있다.
중요한 건,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가 아니라, 왜 그녀가 몰랐는지였다.
"미쳤구나, 파시어. 마법사가 이리 빈곤한 상상력을 가져서야..."
모든 상황에 대처해야 한다는 생각은 하고 있었다. 하지만, 용사 파티에 참가해 마왕을 처치하는 것은, 아무리 그녀라 한들 한 번도 해보지 못한 경험이었다.
당연히 이름 모를 사람에게 차려야 할 예의보다는, 당장 그녀의 목숨을 빼앗을 수도 있는 마물을 걱정하는 게 옳은 판단이었다.
"여기... 이 부분은 그가 모멸감을 느꼈을 수 있겠구나. 내 발언도... 경솔했어."
파시어가 보기에, 그녀가 한 잘못은 대부분 참작 여지가 있는 잘못이었다. 그녀는 전후 사정을 전부 알고 있으니, 당연한 일이었지만.
하지만 엘레노어, 네르웬, 셀리아의 잘못은 그녀의 생각을 뛰어넘는 수준이었다.
"큰일 났구나."
용사로 선택받은 이가 이런 굴욕을 느꼈는데, 지금까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게 기적이었다.
하지만, 이 일은 '너만 잘못했으니 너만 죗값을 치러라.'라고 말하면 될 종류의 사건이 아니었다.
책임은 모두가 나눠 진다. 용사가 이 세상에 분노했을 때, 그들의 죗값을 세세하게 따질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으니까.
"하다못해, 만나서 얘기라도 하면 좀 속이 편하겠는데..."
그녀가 말하는 '속이 편하다.'라는 것은 사태의 호전을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끝이 다가왔다는 걸 명백하게 인지하고 삶을 정리하는 것에 가까웠다.
"도통, 언제 만날 수 있을지 감이 오지 않는구나..."
하지만 아쉽게도, 그녀는 비교적 상식적인 사람이었다. 그녀가 잘못했다는 것도 인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상식적인 루트로 그를 만나려 했다. 사람을 보내, 서로 만날 의사가 있는지 확인하고, 접대를 위한 자리를 만든 다음 조용하고 차분한 분위기에서 만남을 가진다. 귀한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 아랫사람이 가져야 할 기본적인 자세였다.
"소문으로는, 셀리아와 네르웬도 종종 진짜 용사를 만났다고 했는데..."
그녀의 상식 안에는, 성녀가 에네렐이 자주 가는 도서관을 찾아다녔다거나, 궁사가 길거리에서 그에게 달려들었다거나 하는 상황은 들어 있지 않았다.
다른 여자들은 만나 주고 파시어의 부탁만 거부당한 거라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서, 설마 그놈들보다 내게 더 많은 분노를 품고 있었던 게냐. 그런 게냐..."
파시어는 억울한 감정을 숨기지 못했다.
그녀가 심한 것은 인정한다. 용사에게 겨우 마도구 회수나 수발들기 같은 잡일을 떠넘기다니, 당장 죽어도 할 말 없는 대죄라는 것은 인정할 수 있다.
다른 세계에서 소환된 존재이니, 이 세계에 대한 상식이 부족한 것도 당연하다. 그의 무식을 다소 과다하게 비난했다는 것도 인정할 수 있다.
그래도, 다른 여자들보다는 조금 나았다고 해 줄 수 있지 않을까.
진짜 용사 앞에서 엘프의 격을 가지고 시비를 걸던 네르웬이나, 시도 때도 없이 신의 이름으로 그를 괴롭히던 셀리아에 비하면.
범죄를 저질러 잡혀들어가는 것을 억울해하지 앓는 죄수라도, 바로 옆에 더 큰 죄를 저지른 자가 아무 일 없이 지나가는 것을 보면 억울함을 느끼는 법이었다.
"그래도, 당장은 기다릴 수밖에 없겠구나..."
하지만 그런 사정을 전혀 모르는 파시어는, 혀를 차며 기약 없이 그의 화답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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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탑주님의 전언이 또 들어왔습니다."
호위병 중 하나가 조금 떨며 보고했다.
"그, 그분의 요청을 이렇게 많이 거절했다가, 화라도 입는 것은 아닐까요?"
"말했지만, 그 사람을 만날 생각은 없어."
할 얘기가 있으면 헤어지기 전에라도 하면 될 것 아닌가.
황성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그녀들은 일이 급하다며 어디론가 사라졌다.
마음을 정리할 틈이 없다는 건 아쉽긴 했지만, 한시라도 빨리 그녀들에게서 해방되고 싶었던 건 나 역시 마찬가지였기에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와서 관계를 회복해 봤자 무슨 의미가 있는 걸까.
나는 떠날 사람이고, 이미 마왕 퇴치는 끝났다.
내가 중요한 순간에 파티를 배신하거나 마왕의 편을 들어서 사고가 일어났다면 모를까, 나는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
"게다가, 겨우 두 번 거절한 것뿐이잖아."
"네? 다섯 번이나 거절하셨는데... 아, 혹시 메이드가 말 안 해줬어요?"
"내가 들은 건 한 번이었어. 몇 번을 들어도 거절할 생각이었지만."
호위병은 사색이 되어 소리쳤다.
"메이드가 파시어의 부탁을 무시하다니 벌을 주셔야 해요!"
"굳이?"
"남작님의 영지에 큰 화가 닥칠지도 몰라요! 어느 날 남작님이 개구리가 될지도 모른다고요! 마녀 파시어 소문 못 들어봤어요?"
"아, 그런 이미지였구나..."
어쩌다 보니 나는, 그녀와 함께 다니며 마법이란 무엇인지 아주 미세하게나마 배울 수 있었다.
마술은 그런 게 아니다. 더 이해할 수 없고, 더 잔혹하며, 더 불가해한 무언가다.
"그럴 일은 없을 거야."
불가능한 건 아니다. 사람을 개구리로 만드는 것 정도는, 마법사의 능력에 비하면 한없이 작다.
하지만, 거기에는 대가가 소모된다. 그녀는 필요와 불필요를 냉혹하고 단호하게 구분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이제 곧 떠날 나를 위해 그렇게 많은 자원을 소모할 리가 없었다. 사람을 개구리로 만드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지만, 당연히 그건 사람을 죽이는 것보다도 어려운 비술이다.
그리고 파시어라면, 목숨이 간당간당한 상황에서도 그런 끔찍한 대가를 소모하는 비술은 쓰지 않으려 할 것이다.
"나, 남작님! 큰일 났어요!"
문이 쾅 하고 열리는 소리가 나더니, 메이드가 황급히 들어왔다.
"화, 황녀님이 남작님을 찾고 있어요!"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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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손님들의 요구는, 거부 의사를 밝히는 것만으로도 메이드나 경비병 선에서 막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사람의 일이라면 어쩔 수 없었다.
충직한 시종이나 강력한 기사라면 마법사 앞에서도 당당하게 거부권을 행사하고, 허가되지 않은 엘프를 쫓아낼 수 있다.
하지만 상대가 제국 그 자체, 황족이라면 어떤 저항도 할 수 없다.
결국, 그녀를 거부해야 하는 건 내가 해야 할 일이다.
메이드가 급하게 사람을 불러 찻잔과 다과를 준비했다.
나는 자리에 앉아, 어떻게 거절해야 그 용사가 다시는 나를 찾지 않을까 고민하고 있었다.
잠시 후, 가벼운 연미복 차림의 용사가 내 방 안에 들어왔다.
눈과 눈이 마주치자, 본능적으로 온몸이 부르르 떨었다. 근육 하나하나가 긴장으로 팽팽하게 떨리고 있었다.
"오랜만입니다. 에네렐. 마왕 퇴치 이후로는 처음 만나는군요."
차갑고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보통은, 저런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그녀가 감정이 없는 사람이라는 뜻은 아니었다. 오히려, 용사라는 이름에 걸맞게 열정적인 사람이었다.
다른 동료들과 우정을 나눌 때도 있었고, 그녀를 칭찬하는 말에 조용히 미소지을 때도 있었다.
전투에 들어서면 함성을 지르며, 평소의 냉철한 모습이 마치 가면이었다는 것처럼 적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내가 본 그녀의 모든 표정들은, 그저 '엿본' 표정들이었다.
나를 볼 때의 그녀는, 항상 저 무표정으로 일관했다.
"왜 불렀습니까?"
"앞으로의 일에 대해 상의할 것이 있습니다. 하지만, 먼저 급하게 찾아온 것에 대한 무례를 용서받고 싶습니다. 혹시 필요하신 게 있으십니까?"
마왕 퇴치에는 반말로 일관했으면서, 이제 와서 내가 뭐라도 된 것처럼 존대를 쓰는 그녀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저희가 언제부터 그런... 본론으로 들어가시죠."
나 혼자 쓴웃음을 지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그녀는 무표정을 유지했다.
"레오드린 남작의 말씀이 지당합니다. 수사적 미사여구가 필요하지 않은 사람끼리, 그걸 사용하는 것만큼 시간을 낭비하는 일이 없지요."
하지만, 이 정도라면 둔한 나도 알 수 있었다.
백 보 양보해서 성녀 정도라면, 내게 사과하기 위해 시간을 쓸 수도 있다.
마법사가 나를 만나기 위해 시간을 쓴다? 말도 안 된다. 편지가 오는 것 자체가 이상하다.
나 따위와 만나서 소모되는 시간이 10분 남짓한 시간일지라도, 경기를 일으키며 시간을 돌려내라고 소리칠 사람이 마법사였다.
엘프의 행동은 이상 그 자체였다. 누명을 씌우려는 것도 아니고, 그저 기행을 일삼았을 뿐이다.
그리고 황제, 용사까지 이런 식으로 나올 정도라면.
무언가 있다.
사람들이 무언가 내게 바라는 게 있다. 지금 당장 받지 않으면 안 될 무언가가.
불안하다. 아무 일 없이 지구로 돌아갈 수 있으면 좋겠지만, 이 분위기로는 중요한 순간에 방해를 받을 것만 같았다.
그저 잠잠히 기다리기만 해서는 안 된다. 어떻게든 적극적으로, 그들이 내게 원하는 게 뭔지를 알아내야 한다.
최소한 그것을 내 몸에서 떼어 저 산속에라도 버려두지 않는 이상, 그들은 나를 보내 주지 않을 테니까.
나는 시선을 숨기기 위해 차를 한 모금 가득 마시면서, 용사의 입에 집중했다.
함께 있을 때는 황녀다운 모습보다 기사다운 모습을 보여 준 그녀였지만, 그 유능한 그녀가 모략이라고 무능할 것 같지는 않았다.
순순히 말해 주지는 않을 것이다. 빙빙 돌려 말하거나, 달콤한 말에 진실을 숨길 가능성이 컸다.
짐꾼인 내게는 무슨 말을 해도 되겠지만, 지금 그녀는 레오드린 남작인 나를 보고 말하는 거니까.
하지만 지금 칼자루를 쥔 사람은 나다. 주도권은 내게 있다.
그녀가 원하는 것이 무언인지 파악하기만 하면, 더 이상 내 귀환은 방해받을 필요 없이...
"본론을 말하자면, 곧 당신은 제게 청혼하게 될 겁니다."
그녀의 말을 곰곰이 생각한 나는, 곧 속에서 울렁거리는 무언가를 느끼고 거칠게 숨을 내뱉었다.
유감스럽게도, 내 입에는 아직 차가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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