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화 〉 거절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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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해라. 왜 지금까지 용사인 척을 했지?"
마법사는 가슴께까지 오는 크고 무거운 나무 지팡이를 황녀에게 겨눈 채, 그녀를 심문하고 있었다.
평소의 그녀라면 절대 하지 않을 무모한 짓이었다. 황족에게 무기를 겨누는 건 반역죄로 재판 없이 처형당할 수 있었고, 통상적으로 마법사의 지팡이는 무기로 취급받았다.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어설픈 호위병 따위는 마법으로 금세 제쳐 버리고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겠지만, 그녀 앞에 있는 황녀는 용사다.
마왕을 죽였을 때의 힘을 그대로 가지고 있으며, 어지간한 적은 눈치채기도 전에 목을 벨 수 있는 검사였다.
하지만, 파시어는 화를 낼 수밖에 없었다.
"어디서 그 얘기를 들으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사실입니다. 저는 그 짐꾼에게서 용사의 힘을 양도받고, 마왕을 죽였습니다."
"왜. 대체 어째서 그런 미련한 짓을 한 거냐? 적어도 나에게는 알려 줬어야지!"
"많은 사람이 비밀을 알아서 좋을 게 없었으니까요."
황녀의 뻔뻔스러운 태도를 보자, 파시어는 얼굴을 구길 수밖에 없었다.
이 여자는, 정말로 아무것도 모른다.
"어쨌든, 용사는 이제 접니다. 더 이상 여신의 은총을 받을 필요도, 마왕을 쓰러트릴 필요도 없습니다. 용사의 힘은 제게 있고, 마왕을 쓰러트린 것도 저와 당신, 그리고 다른 동료들입니다."
"황제는 어디 있지? 그놈하고 대화를 좀 해야겠다!"
"말씀을 삼가십시오. 황제 폐하는 한가하신 분이 아닙니다. 아무리 마탑의 당주라 한들, 정식으로 약속을 잡고 만나지 않으면..."
"그놈이 옹알이를 하고 있을 때 보호 마법을 걸어 준 사람이 나다! 헛소리하지 말고, 어서 안내해!"
마탑의 주인이자 마법사 중 한 사람으로서, 파시어가 황제에게 가지고 있던 이미지는 굉장히 좋았었다.
쓸데없는 분쟁에 힘을 낭비하지 않고, 제국을 발전시키는 데 집중한 사람이었으니까.
그렇게 모인 부는 마탑과 성당, 신민들과 기사들이 함께 나누고도 남는 양이었다. 곳간이 차니 싸움은 줄어들었고, 마법사들은 쓸데없는 일에 투입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파시어는, 그렇게 차곡차곡 쌓인 점수를 한 번에 깎아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그럼 하다못해, 만나게라도 해 주게! 황제는 그렇다 치고, 용사를 만나고 싶다고 소식을 넣은 지도 벌써 며칠이 지났어!"
"그건, 그 짐꾼의 의사입니다. 아무하고도 만나고 싶지 않다고 하더군요."
"뭐?"
"깊이 생각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기껏해야 안에 넣어 준 메이드와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정도겠지요."
엘레노어는 살짝 얼굴을 찌푸렸다. 자신의 남편이 될 사람이 여자관계가 문란하다는 것은, 좋게 받아들이기 어려웠으니까.
하지만, 그걸 고려해도 나쁘지는 않았다. 애초에 남자의 성욕을 그녀가 독점하고 싶지는 않았다.
아이를 낳을 때까지만 동침하고, 그 다음부터는 서로 떨어져 살 생각이었다. 그가 메이드를 가지고 놀건 말건, 대수로운 일은 아니었다.
어쩌다 정이 지나쳐 진짜 첩으로 받아들이겠다거나, 정실인 그녀의 위치를 위협한다면 가차 없이 쳐내겠지만, 당장은 용인할 수 있었다.
"그럼 하다못해 그 메이드로 나를 넣어주게! 어떻게든 만나야 한단 말이야!"
"쓸데없는 일에 집중하지 말고, 마탑에 들어갈 지원 물자 목록이나 말씀해 주시는 게 좋을 겁니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니까!"
엘레노어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그렇게까지 그가 보고 싶으신 거라면, 황궁 도서관에서 기다려 보십시오. 요즘은 잘 안 나오지만... 그가 바깥출입을 할 때는 그때밖에 없습니다."
엘레노어는, 자신의 말이 완곡한 거절이라고 생각했다.
자신도 마음 같아서는 한낱 짐꾼이 파시어의 부름을 거절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의 뒤에는 황제가 있었다.
살인이나 강간 같은 중범죄를 저지른다면 모를까, 만남을 거절하는 정도로 그에게 불이익을 안긴다면 그때야말로 황제가 격노할 것이다.
그리고 파시어는, 기다림과는 거리가 먼 인간이었다.
쓸데없는 시간이 1초라도 흘러가는 게 싫다며, 여유시간에 어떻게든 짬을 내어 명상을 하고 나뭇가지로 진흙을 파내어 새 마법 주문을 연구했다.
그런 사람이, 올지 안 올지 모르는 짐꾼을 기다리라는 말을 따를 리 없었다.
"다행이군... 일단 거기로 가 보마. 그래도 내가 연락 넣었다는 거 잊지 말게!"
하지만 파시어는 기분 나쁜 기색 하나 없이 바로 작은 몸을 일으켜 달려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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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녀린 팔다리와 아름다운 외모, 빛나는 듯한 얼굴.
누구보다 고고하고 오만했어야 할 엘프였지만, 지금은 그저 끌어 오르는 열기를 억지로 눌러야 하는 처지였다.
"내게 무슨 짓을 한 거냐..."
몸이 이렇게 반응할 이유가 없었다. 고작 냄새, 그것도 진짜 냄새가 아니라 영혼에 새겨진 냄새일 뿐이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얼굴은, 기억나는 냄새는 그 짐꾼의 것밖에 없었다.
사악한 마술이나 저주를 썼다고 생각하는 게 합리적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풀리지 않는 의문이 많았다.
마법을 썼다기에는 파시어가 있었다. 최소한 마법에 한해서는, 그녀의 묵인 없이 다른 용사 파티원들에게 해를 가할 수 없다.
저주도 마찬가지다. 그녀는 진짜배기 성녀고, 저주를 쓰기는커녕 짐꾼이 저주를 쓸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기만 해도 신성 주문 한 번으로 태워 버렸을 것이다.
"어떻게 해야..."
그를 죽여야 이 고통이 끝난다면, 어떻게든 기회를 봐 그 짐꾼을 죽였을 것이다.
하지만 만일, 그가 죽은 뒤 그 냄새를 맡을 가능성이 영영 사라져 버린다면?
네르웬은 두려움을 느꼈다. 이유 없는 거대한 무언가가 그녀를 짓누르는 것 같았다.
아무런 이유도, 징조도 없다. 그저 짐꾼 하나에게서 특이하고 역겨운 냄새가 나던 것뿐이었다.
그래도, 이대로 있을 순 없었다.
일단 그를 만나야 한다. 만나서 냄새를 맡고, 정신을 차리고 상황을 확인해야 한다.
그에게 문제가 있다면 그를 죽여야 하고, 그게 아니더라도 해결할 수 있는 열쇠를 찾아야 한다. 이도 저도 안 된다면, 적어도 그의 냄새라도 맡아야 한다.
그녀는 대지를 박차고 달려나갔다. 조금 전까지 휘청거리고 비틀거리던 그녀였지만, 이제 그녀는 이성으로 몸을 억지로 누를 필요가 없었다.
그의 냄새를 맡기로 결심한 순간부터, 네르웬은 엘프다운 가벼운 발걸음으로 거침없이 달려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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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작님, 가끔은 바깥바람도 좀 쐬고 그래야 해요!"
남작이라는 호칭은 아무리 들어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얼마 전까지는 거의 인간 미만의, 짐 나르는 노새 취급을 받았었으니까.
"꽃이 예쁘게 피었다니까요? 이번 기회에 한 번 나가야죠!"
"제가 움직이면, 많은 사람들이 불편할 텐데요."
대체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황제가 전해 준 말로는 나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들었다.
그게 아니더라도, 나는 힘이 없다.
용사 파티에 끼어들어 생존한 사람으로서 도주나 체력에 자신은 있었다. 하지만, 내게 살의를 품은 사람들이 칼을 들고 다가올 때 대응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수도의 치안이 안정되어 있다고는 하지만, 내 값비싼 옷을 보면 눈이 돌아가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몸값 요구와 인질 교환으로 금화를 벌고 도망칠 수만 있다면, 범죄자들은 다시 범죄를 저지를 필요도 없이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을 테니까.
당연히, 내가 궁성 밖으로 나가려면 적어도 네 명이 더 고생해야 한다. 굳이 그러고 싶을 정도로 밖이 궁금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멍하니 여기 앉아서,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 즐기고 눈을 감고 지구를 상상하는 것으로도 충분했으니까.
"저 때문에 다른 사람들을 힘들게 할 수는 없..."
"그럴 줄 알고, 오늘은 호위병들 서명까지 다 받아 놨다고요?"
"..."
저 사람들이 지장을 찍든, 서명을 하든, 도장을 찍든 내가 알아볼 수 있을 리는 없었다. 하지만 메이드가 내게 건넨 종이는, 꽤 그럴싸한 말이 적혀 있었다.
"여기 있는 게 심심해요?"
"그럴 리가... 없죠? 헤헤, 저는 그냥, 남작님이 여기저기 멋진 곳들을 봤으면 좋겠어요. 수도는 정말 엄청난 곳이라고요!"
메이드는 새하얀 은발을 이리저리 찰랑거리며, 내게 이 나라의 멋진 점을 설파하고 있었다.
"그리고,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온종일 여기 누워 계시거나, 도서관에 앉아 있으시거나 하잖아요. 건강에도 안 좋을 거라고요? 슬픈 일이 있어도 다 잊어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가고 싶지는 않았다. 이 세계를 더 느끼고, 더 보는 것이 행복할 리 없었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계속 이곳에 앉아 도서관과 침실만 들락날락한다고 한들 이 세계를 보지 않는 것은 아니다.
가끔 도서관에 모습을 드러내는 성녀도 있고, 얼굴은 보지 못했지만 때때로 용사도 이 근처를 지나간 것 같았다.
보기 싫은 사람을 보지 않는다는 것에 초점을 맞추면, 황궁 안에 있는 것보다는 도심지로 나가는 게 더 안전할지도 모른다.
"알았어요. 준비할게요."
"정말요?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새 옷을 가져올게요!"
이 옷을 입고 나가도 괜찮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메이드는 이미 옷장을 활짝 열고 내 몸에 맞을 법한 옷을 고르고 있었다.
협상과 타협, 강압적인 발언(이걸 입을 바엔 나가지 않겠다.)을 통해 그중 그나마 점잖은 옷을 입은 나는, 숨을 크게 쉬고 다시 황궁 밖으로 나왔다.
호위병들은 군기가 바짝 들어 있었지만, 눈이 신나 있는 건 숨길 수 없었다.
"그럼, 어디로 갈 생각이야?"
"저, 저도 사실 수도에 온 건 오랜만이라..."
숲도, 대장간에서 나오는 쇠 냄새도, 거친 여행용 빵 조각도 모든 게 트라우마 덩어리였다. 그냥, 이 정도까지만 하고 돌아가는 게 나을까.
그렇게 생각한 순간,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었다.
"잠깐... 멈춰."
목소리를 들은 내 신경이 곤두섰다. 순식간에 뇌가 스트레스로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입가에는 웃음이 사라졌고, 눈에는 활기가 사라졌다.
내 뒤에, 궁사가 있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