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화 〉 복귀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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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노어의 기억 속에, 황제는 항상 따뜻하고 자상하며, 근엄하고 당당한 존재였다.
하지만, 그런 그라도 화를 낼 때가 있었다.
그렇다고 분노를 터트리거나 욕을 하는 건 아니었지만, 엘레노어는 구분할 수 있었다.
그녀가 명확한 잘못을 했을 때, 그는 엘레노어의 감정에 신경 쓰기보다 사태 해결에 집중하곤 했으니까.
하지만 아주 어렸을 적을 제외하면, 그가 그녀에게 화낸 적은 없었다.
그녀가 황제의 분노를 살만큼 어설프게 일을 처리하는 것도 아니었고, 일정 수준의 실수는 그녀 선에서 처리할 수 있었으니까.
"대체 무엇을 걱정하시는 겁니까?"
하지만 그녀는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깨달을 수 없었다.
"내가 어디부터 실수한 건지 생각해 보고 있었다."
"모두 끝났습니다. 황제 폐하의 뜻대로 마왕은 토벌되었습니다. 저는 자리를 굳혔고, 제게 도움이 될 사람들과 인연을 쌓는 데도 성공했습니다."
세계수의 대전사와 쌓은 인연은, 엘프들과의 관계에 큰 힘이 되어 줄 것이다.
제국에 비하면 한없이 작은 나라지만, 그들의 저력은 무시할 수 없다.
살아 있는 마법계의 전설이자 마탑의 주인과 함께 역경을 헤쳐나갔다. 마녀들은 이제 제국에 해가 될 마술을 부리지 않을 것이다.
성녀와 친밀한 관계를 쌓았으니, 성직자들도 엘레노어를 함부로 대할 수 없다. 교회 몇 개를 부수고 성직자들을 학살하지 않는 이상, 그녀의 즉위식은 신의 축복을 받으며 진행될 것이다.
이미 기사와 군인들의 지지는 넘치도록 받고 있었다. 나이가 차지 않았을 때부터 그들과 함께 훈련받고, 함께 싸우며, 같은 음식을 먹고 같은 곳에서 잠을 청하던 그녀였다.
"저는, 다음 황제가 될 겁니다."
그녀를 위해 준비된 자리였다. 엘레노어는 그 자리에 걸맞은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고 또 분투했다.
용사의 힘까지 있는 이상, 누구도 그녀의 정통성을 의심할 수 없다.
"한 명이 빠졌지 않느냐."
엘레노어의 머릿속에 짐꾼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그녀는 표정을 약간 굳혔다.
"...저는 노력했습니다."
"무엇을?"
"그가 죽지 않게 하려고 강제로라도 단련시켰습니다. 제가 그를 방치했다면, 분명 모험 중 죽었을 겁니다."
마나를 쓰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다소 가혹한 훈련일 수 있었지만, 그녀는 더 어린 시절에 더 약한 여자의 몸으로 그 훈련을 견뎠다.
"적어도, 너에게는 너를 지탱해 주는 사람들이 있었다. 저 사람이 그걸 견딜 수 있을 거라 생각했나?"
"성인입니다. 자신을 지탱하지 못한다면, 그저 본인의 무능을 증명하는 꼴입니다."
황제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어떻게 이 난관을 수습해야 할지 상상조차 가지 않는 사람처럼, 그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무엇을 두려워하십니까. 이미 그는 제게 용사의 힘을 넘겨주었습니다. 그 책임도, 시련도, 영광도 전부 제 것입니다."
"그 힘을 가진 자만 책임을 진다고 생각하나?"
"용사의 검을 얻은 자는 백금 기사단의 우두머리인 접니다. 시련을 통과한 이는 그 짐꾼이 아니라, 당신의 여식입니다."
황제의 눈앞에서, 그의 감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공포스러운 일이었다. 다른 모든 평민과 귀족들도 그럴 것이고, 그의 딸인 엘레노어도 다르지 않았다.
"마족과의 전투에서 승리하고, 마왕을 쓰러트린 자는 다른 누구도 아닙니다! 차기 황제가 될 저라고요!"
황제는 그 말에 바로 대답하는 대신, 신중하게 말을 고르며 침묵을 지켰다.
그리고 자신의 기사를 보는 눈빛이 아닌, 딸을 보는 눈빛으로 엘레노어를 바라보았다.
"시간이 필요해... 하지만, 모르겠구나. 이게 상태를 악화시킬지도, 우리 모두에게 더 큰 상처를 줄지도 모르겠어... 그래도, 아직 희망을 포기하고 싶진 않아."
엘레노어도 황제의 말에 반응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저 고개를 숙여 예의를 표할 뿐이었다.
"마음에 둔 사람은 있나?"
"한낱 정 따위에 휘둘릴 정도로 약하지 않습니다. 제국에 필요한, 황제 폐하가 원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상관없습니다. 그저, 명을 따를 뿐입니다."
그녀만의 일은 아니었다. 황족이나 귀족은, 특히 여자는 동맹에 쓸 수 있는 훌륭한 자원이다.
현 황제의 유일한 딸이자 차기 황제인 그녀는 원한다면 결혼 상대를 정할 수 있겠지만, 그건 결국 국가의 역량을 자신의 욕망에 끌어 쓰는 꼴이다.
"정말... 너만큼은, 원하는 사람과 맺어지게 해 주고 싶었거늘..."
황제의 침통한 감정이 허탈한 웃음에 섞여 방안을 가득 메웠다.
"레오드린 에네렐. 네가 결혼해야 할 남자다. 어떻게든 그를 묶어 두고, 그와 너의 아이를 제국의 후계자로 만들어라."
"레오드린? 그 가문에 남자가 있었습니까?"
"너와 여행을 함께했던 남자다. 곧 정식으로 가문의 일원이 될 사람이지."
레오드린 부인은 가문의 대를 이을 권한이 없고, 정통성 있는 가문 구성원은 딸 하나에 불과한 가문.
그 가문의 이름값에 비하면 초라할 정도로 망가진 가문이었지만, 명문이라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
다른 왕국의 왕족과 피를 섞어 정통성을 굳히는 것만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제국 내의 명문가나 타국의 왕족과 피를 섞는 것은 위험을 감수하는 일이다.
혹여나 엘레노어가 여자라는 것을 만만히 보고 제국 정치에 관여하려 든다면, 다시 그를 막기 위해 수를 써야 할 것이다.
세력은 약해서 고분고분하지만, 이름값은 높은 귀족과 결혼하는 것이 꼭 나쁜 일만은 아니었다.
그런 면을 고려하면, 그 짐꾼은 위협적인 상대가 아니었다. ‘레오드린’의 남자가 그런 남자였다면, 이 결혼은 나쁜 선택이 아니었다.
만약, 그 신분이 진짜이기만 했다면.
"위험합니다. 단순히 황궁에 머물 손님에게 가짜 신분을 주는 것과, 황제의 반려가 될 이에게 가짜 신분을 주는 것은 다릅니다."
황제의 스캔들을 캐려는 사람은 한도 끝도 없이 많다. 만일 그중 한 명이 짐꾼의 출신 성분을 캐내어 황실을 위협한다면, 대응할 수단이 마땅치 않다.
“어쩔 수 없다. 만일,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지금 말해라. 그게 아니라 제국의 미래를 추구한다면, 내 판단을 믿어라.”
황제가 완고하게 그녀의 말을 막았다.
"알겠습니다. 날짜는 언제쯤으로 잡으면 되겠습니까?“
엘레노어는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바로 황제의 명령을 받들었다. 하지만 그는 기뻐하는 대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니, 틀렸다. 먼저 해야 할 게 있잖니."
"무엇입니까?"
"상대의 동의를 구해야지."
엘레노어는 잠시, 그가 농담을 하고 싶은 건지 진지하게 말하는 건지 구분하지 못했다.
"저는 차기 황제입니다. 그가 거부할 리 없습니다."
"그런가? 나는, 그라면 절대 원하지 않을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그렇다 한들 달라지는 건 없습니다. 그가... 저와 제국에 바친 희생은 물론 숭고합니다. 하지만, 제국의 국익을 뛰어넘을 수는 없습니다."
엘레노어는 너무나도 확신에 차 말하고 있었기에,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아버지를 슬프게 한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건 안 돼."
"대체 어째서입니까!"
"그냥... 그건 해서는 안 되는 일이다. 이런 대답으로는 만족하지 못하겠니?"
"최소한 이유라도 명확히 설명해 주십시오."
황제는 조용히 시선을 돌렸다.
"나는 아직 두렵구나. 자신감을 잃어버린 네가 어떤 사람이 되는지 누구보다 잘 알거든."
"다시는 그렇게 추한 모습을 보이지 않을 겁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여자아이였을 때의 엘레노어와, 수많은 업적을 달성하고 자신을 믿고 있는 엘레노어는 달랐다.
황제는, 그저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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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읏, 으으... 이건 대체... 뭐냔 말이다!"
네르웬은 그녀의 임무를 마쳤다.
이제 이 역겹고 시끄러운 도시에서 벗어나, 청량한 세계수의 공기를 맡으며 그녀의 업적을 담은 시를 쓸 시간이 되었다.
"왜... 왜? 무슨 일이..."
하지만 그녀는 아직 황궁에 머물러 있었다.
도시에 그녀가 머무르고픈 자리는 없었기에 임시방편으로 황실 사냥터에 터를 잡은 그녀는, 자신의 몸에 생긴 이상을 파악하기 위해 애썼다.
엘프는 냄새에 예민하다. 작은 냄새도 누구보다 민감하게 알아차리고, 남들이 맡지 못하는 냄새를 맡을 수 있다.
그건 단지 후각에 국한된 영역이 아니었다. 성직자가 신의 인도를 느끼는 것처럼, 엘프는 숲이 지르는 비명과 환호를 읽을 수 있다.
미세한 영역이기는 하지만, 네르웬 같은 축복받은 엘프들은 인간의 마음마저 냄새로 맡을 수 있다.
깨끗하고 맑은 사람은 정갈하고 고요한 냄새가 나고, 마음이 탁하고 어지러운 사람은 코를 찌르는 메스꺼운 냄새가 난다.
"대체 나한테 무슨 짓을 한 거냐. 그 비열한 놈, 당장 잡아 사지를 찢어 놓지 않으면..."
처음 그를 봤을 때, 이게 정말 악의 냄새인지 긴가민가했다. 이런 냄새를 맡아 본 적이 없었으니까.
강렬한 냄새였다. 노예상인이나 살인범, 동족 살해자를 볼 때도 이런 냄새를 맡아 보지 못했다.
어떻게든 참고 넘기려 했지만, 그 냄새를 맡을 때마다 머리가 어지러워졌다, 활시위를 잡은 손이 떨리고, 몸은 뜨거워진다.
버티고 버티다, 그녀는 결국 분노를 표출했다. 전투 도중, 화살이 아주 약간 빗나간 날이었다.
인간, 네 냄새가 심하게 고약하다는 걸 알고 있나? 씻어라. 당장.
영혼의 냄새였기에, 그가 아무리 몸을 깨끗이 씻어도 냄새는 잦아들지 않았다.
하지만 몸에 묻은 강 냄새가 조금이나마 그의 냄새를 중화시켜주는 것 같아, 네르웬은 시도 때도 없이 그에게 씻으라고 강요했다.
"왜, 왜, 왜..."
하지만 그동안 그녀는, 좋든 싫든 그의 냄새에 노출되어 있었다.
그래서, 그 냄새가 느껴지지 않는 상태의 자신이 어떻게 될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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