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화 〉 복귀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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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 끝에서 화려한 빛이 뿜어져 나온다.
검에 마력을 담을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특이한 것은 아니었다.
엘레노어는 이미 황실의 여식이고, 기사단의 수장이다. 수많은 결투와 전투에서 자신의 가치를 증명했고, 그녀의 무력을 의심하는 사람은 마왕 퇴치 전에도 없었다.
하지만 그들의 눈앞에서 뿜어져 나오는 아름답고 신성한 빛은, 그녀가 용사라는 사실을 무엇보다 확실하고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그런 용사가 마왕을 퇴치하기 위해 떠난 게 아니라는 사실은, 모든 이들에게 따뜻한 위로와 안식을 건네주었다.
"대단하십니다!"
"역시, 의심할 바 없는 용사 그 자체이십니다!"
엘레노어는 조금 피로한 듯 바로 검을 거뒀다.
황실의 드레스는 조금 거추장스러웠지만, 그 복장으로도 그녀는 이곳에 있는 누구보다 강할 것이다.
"마왕의 침공은 끝났고, 우리는 모두 이겨냈습니다. 비상 소집령은 해제될 것이며, 행정 절차가 마무리되는 대로 상인들이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그녀는, 이곳에 있는 귀족들이 가장 기다리고 있을 말을 꺼냈다.
마왕 침공은 거대한 재난이고, 그 과정에서 각지의 민중들과 귀족의 자유는 억압될 수밖에 없었다.
전방에 있는 영지들은 곧바로 전쟁터가 될 것이며, 후방에 있는 영지들도 병사와 물자를 지원하기 위해 막대한 희생을 치러야 하니까.
용사 파티가 마왕 퇴치에 실패하거나 늦어진다면, 특별히 내세울 것 없는 귀족들은 거리에 나앉을 수밖에 없었다.
마왕의 첩자가 어디에 들어올지 모르니 무역이 억제되고, 전세가 혼란스러워지니 천사 같은 귀족들도 영지민들을 쥐어짜야 한다.
몰락을 대비해 사병과 식량을 비밀리에 모으는 이들도 많았고, 신께 기도하는 이들도 많았지만, 그 귀족들은 지금 그들의 모든 걱정이 용사의 검 끝에서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용사 저하 만세!"
"엘레노어 전하 만세!"
미리 얘기가 끝난 바람잡이 몇 명이 손을 들어 만세를 외치자, 연회장에 함성이 울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분위기를 언짢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
당장 세상이 멸망에서 벗어났다는 거시적인 기쁨은 그렇다 치고, 내일부터 정상적인 경제활동을 이어나갈 수 있다는 기쁨에는 모두가 공감할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엘레노어는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이 검은 싸울 때는 누구보다 믿음직한 선배였지만, 싸우지 않을 때는 시도 때도 없이 종알거리는 소음 생성기에 불과했으니까.
보내줘보내줘보내줘보내줘보내줘보내줘보내줘
'머리 아픕니다. 검이면 검답게 조용히 지내십시오.'
마왕 퇴치도 끝났잖아? 언제까지 용사인 척 할 생각이야?
'용사는 접니다. 당신이 순응하십시오. 앞으로도 당신은 제 검이고, 저는 당신을 어디에도 보내지 않을 겁니다.'
여자한테 고백받을 생각은 없거든?
엘레노어의 머릿속에서 십 대 소녀 같은 목소리가 윙윙거렸다. 그녀는 검을 다시 칼집에 집어넣고, 주위에 있는 와인 한 잔을 기품있게 마셨다.
"이러면, 다음 황제는 역시..."
"조심스러운 이야기긴 하지만, 황제 폐하도 연세가 많으시고, 다른 자녀들은 없으니까."
용사의 힘을 얻고 난 뒤에, 엘레노어는 주위에서 쏟아지는 대화를 여과 없이 들을 수 있게 되었다.
전장에서는 유용한 능력이었다. 쓸데없는 소리를 할 사람도 없었고, 조금이라도 이질적인 소리가 들리면 바로 긴장하는 게 당연했으니까.
지금은 불편할 때가 많았지만, 그나마 다행인 건 그녀에게 나쁜 소리를 할 만한 인간이 없다는 것이었다.
저 시끄러운 칼을 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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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은 좀 괜찮으신가요?"
메이드의 초롱초롱한 눈과 내 눈이 마주치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괜찮아요."
"전투 후유증이 남아 있을 수도 있으니, 조금이라도 이상하면 바로 말씀해 주셔야 해요!"
걱정받는 기분이 영 불편했다. 내 상태를 신경 써 주는 사람이 있다는 건, 너무 오랜만에 봤으니까.
성녀나 마법사 정도는 형식적으로나마 걱정해 줬지만, 별 의미 없는, 말뿐인 걱정이었다.
그런 말을 해 준다고 나를 쉴 수 있게 해 주는 것도 아니었고, 만일 그녀들이 허락했다 하더라도 용사가 거부했을 테니까.
"언제 돌아가실지는 모르겠지만, 여기 남아 있는 동안 행복하게 지내셨으면 좋겠어요!"
"그럴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그냥 다 필요 없으니, 돌려보내 주기만 했으면 좋겠는데."
한탄에 찬 넋두리를 흘러내고 나니, 잠깐 의문이 들었다.
내가 짐꾼으로 활동했다는 건 비밀이고, 용사라는 것은 더 큰 비밀이다.
아무리 메이드라지만, 이런 곳에서 마구 꺼낼 수 있을 만한 화제가 아니다.
"자, 잠시, 제가 어딜 간다고 생각하시는..."
"당연히 고향의 영지죠!"
"아, 난 또."
나는 그녀를 배웅한 뒤, 다시 텅 빈 침대 위에 누워 밖의 정경을 바라보았다.
할 일이 없어도 되는 건 좋았다. 경치도 좋았고, 누워 있는 것도 좋았다.
오늘은 계속 이대로 무탈히 지내고 싶었다.
"안에 있나?"
중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무도 없는 틈을 타, 나는 얼굴을 찌푸렸다.
깊은 한숨을 쉬고 난 뒤에야, 나는 그에게 대답할 수 있었다.
"예. 있습니다."
문을 열자, 호위 기사 하나를 대동한 황제가 눈앞에 서 있었다.
"잠깐... 앉아서 얘기 좀 하지."
왜인지 모르게, 그의 얼굴에는 주름이 더 깊게 패인 것 같았다.
빨리 가 줬으면 했지만, 그가 이런 곳에 왔다면 가벼운 일은 아닐 것 같았다.
가능하다면 '역소환 의식 준비가 예상보다 빨라졌다.' 같은 좋은 소식을 가져와 줬으면 했지만, 그럴 리는 없어 보였다.
"자네 둘은 좀 나가 주게."
"하, 하지만 폐하의 안위가..."
"의미 없는 짓 하지 말게."
메이드와 호위 기사를 내 방 밖으로 몰아낸 이후, 그는 주전자를 손가락으로 살짝 눌렀다. 푸른색 빛이 줄로 이어져 반짝이고, 곧 주전자에 담겨 있던 물이 보글보글 끓기 시작했다.
마도구인 줄은 몰랐다. 나는 마력을 쓸 줄 몰랐으니, 그저 장식용으로 생각하고 방치해 두었던 물건이었다.
그는 떨리는 손놀림으로 차를 따른 뒤, 내가 앉아 있던 원형 테이블에 그 찻잔 두 개를 내려놓았다.
"메이드를 시키면 편하지 않습니까?"
"가끔은...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하거든. 차를 따르는 일은, 황제가 가지기 참 좋은 취미지."
그는 내 앞에 앉아, 차를 한 번 홀짝거렸다.
"사람은 실수를 하거든. 얼마나 좋은 의도를 가졌든, 이전에 얼마나 유능한 사람이었든, 계속 일을 하다 보면 한 번쯤 실수를 해."
그의 황금빛 머리칼과 수염이 위엄있게 번쩍였다.
"차는 실패해도 괜찮거든. 조금 지나칠 정도로 쓰거나 밍밍한 차를 한 번 마시고 나면, 실패의 대가를 모두 치를 수 있지."
차를 한 모금 마셔 보자, 장인의 것이라고 할 만했다. 이 나라의 황제는 차 타는 법에도 능통해야 하는 걸까.
"현실은 그렇지 않으니까. 실패의 대가를 치르려면, 혼자서 무언가 해내는 거로는 안 돼. 타인의 자비와 용서가 필요할 때가 있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모르겠습니다."
"실패를 만회할 기회를 달라는 말이네."
"..."
"자네는 이곳에서 많은 고난을 겪었겠지. 다른 이들도 그렇지만, 적어도 다른 이들은 그 결정에 대한 대가를 얻을 수 있네."
황제의 눈은 자상함과 배려, 확신과 위엄으로 가득 차 있었다.
마치, 처음 나를 만났던 그 날처럼.
"돌아가고 싶군요."
"나는 황제일세. 자네는, 누구도 얻지 못할 신임과 총애를 얻고 있어. 마왕의 영토라면 모를까, 제국 안으로 들어왔으면 그걸 즐길 때도 되었지."
이제 그는 황제가 아니라 마치 옆집의 짓궂은 할아버지가 된 것처럼, 친근하고 여유로운 얼굴로 나를 보았다.
"최소한 자네가 이곳에서 무슨 일을 할 수 있을지 확인이라도 하는 게 좋지 않겠나? 어차피 한 달은 이곳에 있어야 할 텐데."
마치 장난이나 신나는 모험을 권유하는 것 같았다. 그의 말을 더 듣다 보면, 무심코 수락하게 될 것 같았다.
"조금 위험한 일도, 체면이 깎일 일도 거리낌 없이 할 수 있어. 어차피 갈 생각이라면, 좀 즐기다 가도 괜찮지 않나."
"필요 없습니다."
"내 마음 같아서는, 이 세계와 국가에 헌신해 준 자네에게 더 큰 보상을 내리고 싶네. 자네는 그럴 자격이 있어. 이제 좀 쉬면서, 인생을 즐길 자격이 있단 말이야."
"저는 능력 있는 사람도, 그리 도덕적인 사람도 아닙니다. 권한을 받을 필요도 없고, 받고 싶지도 않습니다."
내 대답을 들은 황제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군... 그래도, 이 정도는 알아 둬야겠지. 레오드린 에네렐. 자네 이름일세. 레오드린 가문의 장남이고, 숨겨져 있다가 황성 근처에서 발견되었지."
"제 가짜 신분이군요... 그게 필요합니까?"
"한 달이라도, 이유 없이 궁성에 사람을 들일 순 없는 노릇이니까. 짧은 시간이지만 잘 지내게."
그는 힘없이 터벅터벅 문 쪽으로 걸어가다, 살짝 뒤돌아봤다.
"그리고... 너무 미워하지는 말게."
"저는 그 사람들을 미워하지 않습니다."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적어도 나는 그 말이 사실이라고 생각한다.
행동 없는 사랑이 공허한 만큼, 행동 없는 증오도 공허하다.
나는 그 사람들을 싫어한다는 사실을 마음속으로 꼭꼭 숨겼다. 그들을 비난하지도 않을 거고, 의도적으로 해가 되는 행동을 하지도 않을 거다.
그냥 미련 없이 이 세계를 떠나갈 뿐이다. 나는 그걸로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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