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화 〉 복귀4
* * *
이 세계가 역겨운 것은 역겨운 거였고, 지루한 건 지루한 거였다. 나는 얼마 되지 않아 새로운 할 일을 찾아내야 했다.
그래도 사람을 만나고 싶지는 않았다. 누군가 만날 때마다 내가 누구인지 어렵게 설명하는 건 싫었다. 심지어 그마저도 진실이 아니었고, 내가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을 할 때면 어떻게든 둘러대야 했다.
게다가, 지나가던 사람들이 전부 용사 파티의 업적을 칭송하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분명 대단한 일을 하긴 했다. 하지만, 내게는 그냥 잊고 싶은 기억이었다.
누구의 인성이 좋니, 예의가 바르니, 착하니 하는 말들도 다 공허하게 들렸다.
그렇다고 그런 말을 하는 사람 앞에서 대놓고 그 새끼들이 무슨 짓을 했는지 하나하나 설명할 수도 없었으니, 나만 답답해질 따름이었다.
결국, 내가 찾은 곳은 도서관이었다. 황실 도서관은 외부 출입이 금지되지만, 정식으로 궁성에 방문한 손님에게는 언제나 열려 있었으니까.
그냥 별 내용 없이 정보만 서술된 책도 재미있었고, 이전 용사들의 영웅담도 그럭저럭 볼 만 했다.
하지만 오늘은, 불청객을 만나고 말았다.
"여기 계셨네요, 짐꾼 씨?"
성녀였다. 그래도 몇 년 동안 목소리를 들었던 사이니, 나를 부르는 소리만으로 구분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답하고 싶지는 않았다. 얼굴을 보고 있으면 안 좋은 기분이 들 것 같아, 억지로 고개를 숙였다.
"축하연에도 안 오시고, 좀 서운했어요!"
"있었습니다."
"있었어요? 음, 아무래도 짐꾼이라 같이 있긴 좀 힘드셨던 건가... 그래도 수고 많으셨어요."
그녀의 표정을 볼 수는 없었지만, 아마 생글생글 웃고 있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가장 싫어할 때도 최소한 말은 예쁘게 하던 그녀였다. 행동이 싫었을 뿐이지.
살짝 시선을 올려 보자, 성녀의 하얀 사제복이 눈에 들어왔다. 힘든 전투를 마친 다음에도 기도 한 번 하면 다시 새하얗게 돌아오는, 신비한 옷이었다.
"그래도, 혼자 있으면 외롭지 않아요? 다 같이 모여서 식사라도 한 번 해요. 네르웬 씨도 아직 여기 있고, 엘레노어 씨도 우리가 부르면 분명 와 줄 거예요!"
"제가 있으면 더 불편해질 테니까요."
"에이, 아무도 그렇게 생각 안 할걸요? 그분들이 짐꾼 씨에게 좀 험하게 대하긴 했지만, 다 마음속으로는 짐꾼 씨를 생각해서..."
그 많은 일들을 겨우 '수고 많으셨어요.'나 '마음속으로는' 같은 어설픈 말로 넘기려는 태도가 싫다.
"제가 불편합니다."
"에? 아직 몸이 불편하세요? 그러면 제가 회복 주문을 걸어 드릴 테니..."
"아니요. 제가 싫습니다."
더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 이 정도 했으면 알아먹었겠거니 하고 다시 책에 집중했다.
하지만, 그녀가 떠나가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왜... 왜요?"
"..."
내가 무슨 일을 겪는지 눈으로 본 사람이다. 가해자이기도 하다.
그걸 직접 보고 들으면서 느끼지 못한 사람에게, 내가 왜 힘들었고 왜 그들이 싫은지 구구절절 설명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책을 덮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언뜻 스쳐 지나간 그녀의 얼굴은,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아쉽게도, 이 도서관에서는 대출이 불가능하다. 나는 조용히 책을 자리에 꽂아 놓았다.
"화난 일이 있으셔도 대화로 푸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대화로 풀 수 있는 문제였다면 진작 풀렸을 것이다. 몇 년간 시도했고, 나는 실패했다.
"제, 제가 엘레노어 씨에게 얘기해서, 짐꾼 씨도 정당한 대가를 받을 수 있도록 해 볼게요!"
나는 돌아갈 사람이다. 제국의 준비가 충분했다면, 이미 이 엿 같은 세계에 머무르지 않았을 사람이었다.
산더미 같은 금화를 받아도, 미녀와 영약을 받는다고 해도 내겐 어떤 쓸모도 없다.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 화를 내지 않은 시점에서, 나는 잘 참았다고 생각한다.
멀리서 뭐라 뭐라 소리치는 그녀를 도서관에 내버려 두고, 나는 다시 내 방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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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테인드글라스 사이로 형형색색의 빛이 아름답게 비치는 신비한 장소 가운데서, 한 소녀가 기도하고 있었다.
수도에 있는 대성당의 중앙. 평신도라면 일생에 한두 번 가 볼 수 있는 곳이고, 고위 사제라 한들 제집처럼 지나들 수 있는 곳은 아니다.
여신께 가장 가까운 자리이며, 이 자리에서 하는 기도는 반드시 듣겠다고 신이 약조한 자리.
하지만 그 소녀를 막을 사람은 없었다. 용사가 마왕을 무찌른 지금, 신께 가장 가까운 이라고 하면 단연 그녀였을 테니까.
"여신님..."
성녀, 셀리아는 찬란하게 빛나는 여신의 신상 앞에서 무릎을 꿇은 채 공손히 기도하고 있었다.
"짐꾼 씨가 화가 많이 나신 것 같아요. 어떻게 하면 될까요..."
처음에는, 분명 화기애애한 사람들이었다. 그중 가장 선한 사람은, 성녀가 보기에 그 짐꾼이었다.
어떤 궂은일을 맡겨도 내색하나 하지 않고 처리한다. 전투에는 도움이 되지 않지만, 파티를 따라다니는 것만으로도 일반인인 그는 힘들었을 것이다.
모험 초기에는, 웃음을 잃지 않은 사람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피폐해지는 그의 모습을 볼 때마다, 성녀의 마음은 아파졌었다.
그녀 대신 짐을 들어 주고, 그녀가 기도하는 동안 뒤를 지켜 준 사람이다. 모두 행복해지기를 바라는 것은, 당연한 소망이었다.
"다 같이 행복하게 지내려고... 그렇게 열심히 싸웠는데."
모험이 끝난 뒤, 다른 사람들과는 만날 기회가 있었다. 네르웬도, 엘레노어도, 파시어도 긴장을 풀고 승리와 행복을 즐기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경계를 설 사람이 필요하지 않았다. 당연히 그도 같이 이 자리에서 연회를 즐겨야 할 텐데, 그는 사라진 듯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오늘 만났는데, 다른 사람들이 싫나 봐요. 어떻게 하면 화해시킬 수 있을까요?"
하지만, 그녀의 머릿속에서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성녀는 이질감을 느꼈다.
"제발 대답해 주세요..."
여신의 목소리를 직접 듣는 일은 드물지만, 성녀인 그녀는 최소한 여신의 감정이나 의사를 미세하게나마 알아챌 수 있었다.
신성력은 정상적으로 차오르고 있다. 애초에, 이 신성한 장소에서 신과 단절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그런데, 여신은 아무런 대답을 주지 않은 채 그저 그녀를 방치하고 있었다.
그저 자신의 진심이 부족한 것이라 생각한 성녀는, 다시 자세를 고쳐잡고 기도를 이어나갔다.
/////
도서관에서 성녀와 마주친 것 때문에 내 기분은 많이 가라앉아 있었다.
아직 바깥이 어두워지지는 않았지만, 머리는 지끈지끈 아파오고 눈은 감겨왔다. 불을 끄고 침대에 들어가 누웠다.
거친 모포 대신 푹신한 이불이 눈을 가려 주는 것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안락했다.
"계속, 이렇게 기다릴 줄 알았는데..."
처음에는, 모험에 내가 참여할 필요가 없을 줄 알았다.
하지만 용사가 모험을 떠난 지 일주일쯤 지나자, 갑자기 황제가 나를 불렀다.
자네가 직접 싸울 필요는 없지만, 적어도 문은 열어 줘야겠어. 이렇게 될 줄은 몰랐지만... 어쩔 수 없네.
대륙에 강자들은 많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은, 마왕을 쓰러트리기 직전의 용사라면 모를까 막 모험을 시작한 용사는 몇 초 만에 쓰러트릴 수 있을 만큼 강하다.
하지만 여신이 용사를 위해 준비해 둔 시련은, 용사 본인이 아니라면 개방할 수 없다.
마왕이 직접 세운 결계도, 마찬가지로 여신의 가호를 받은 용사 본인이 아니라면 해제할 수 없다.
그 때문에 나는, 계속해서 불려 다니며 문을 열어야 했다.
그나마 제국 근처에 있는 던전을 정리할 때는 파티를 따라다닐 필요가 없었지만, 우리는 금세 마왕의 세력권 안으로 들어갔다.
그 뒤로는, 내가 파티에 모든 잡일을 도맡아 해야 했다. 간단한 요리나 정리는 물론이고, 짐을 들거나 불침번을 서는 모든 자질구레한 일들.
반쯤은, 내가 원해서 시작한 일이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그녀들이 싸우는 것을 멀리서 바라보고 있는 것은,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일이었으니까.
일도 감당할 만했다. 다른 사람들도, 어느 정도는 그런 일을 맡은 나를 존중해줬다.
하지만 싸움이 격해지고 마음속의 여유가 없어지자, 가장 먼저 공격받는 것은 나였다.
마법사는 효율적인 방식을 선택하려 하고, 성녀는 여신의 교리에 맞는 방식을 선택하려 했다.
내가 성녀의 지시를 받아 일을 하면 마법사는 쓸데없는 짓을 하는 우둔한 자라며 비난했고, 마법사의 뜻에 맞는 일을 하면 성녀는 여신의 분노가 있을 거라며 화를 냈다.
궁사는 처음부터 내 냄새가 맘에 들지 않았던 것 같지만, 그래도 처음에는 그걸 부드럽게 돌려 말할 여유 정도는 있었다.
하지만 전투가 길어지고 함께 있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그녀는 나를 마치 오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멸시했다.
좋아할 수 없었다. 주위에 사람이라고는 그들밖에 없었으니, 다른 곳에서 위로를 찾을 수도 없었다.
어느 순간부터, 성녀는 당연한 듯이 그녀의 불침번 시간에 나를 깨우고 대신 기도했다.
소모된 신성력을 보충하기 위함이었으니, 뭐라 지적하기도 힘들었다. 싸움은 그만큼 아슬아슬했고, 내 수고로 파티가 안전해질 수 있다면 거절할 수 없었으니까.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내가 희생하는 건 당연해졌다. 그저 일상이라는 것처럼, 모두가 내게 희생을 강요했다.
걷는 것조차 힘든 나였다. 실수가 나오고, 집중이 깨지는 건 피할 수 없었다.
조금이라도 일이 늦어지면 마법사가 화를 냈고, 마물의 공격에 흠집이라도 나면 용사가 '훈련'을 통해 나를 구타했다.
그리고 나는, 참았다. 늘 그랬던 것처럼, 그게 옳은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잘 모르겠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생각하기에, 너무 지쳐 버렸다는 생각이 든다.
오늘 밤에도, 지구로 돌아가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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