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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화 〉 프롤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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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로... 끝날 거라 생각하지 마라!"
인간의 언어가 아닌 듯한 목소리라고 한다면, 그건 저 목소리에 대한 지나친 호평일 것이다.
생물이 내는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흉폭하고 역겨운 목소리다. 듣는 것만으로도 정신력이 깎여 나가는 것 같은, 이 세상에 있어서는 안 될 이질적인 음성.
하지만 우리 중, 그 목소리를 두려워하는 사람은 없었다. 성녀가 당당하게 그 괴성에 맞서 소리쳤다.
"사악한 기운이 약해지고 있습니다! 더 이상 싸울 수는 없을 거예요!"
조금 전까지 숨을 쉴 수조차 없이 뿜어져 나오던 기운이, 서서히 약해지고 있었다.
"크아아, 아아, 으아아아아아!"
마왕은 강했다. 하지만, 용사 일행은 더 강했다.
황실의 피와 용사의 힘을 함께 이어받은 기사가 있었다. 세계수 곁을 떠나 악을 섬멸하겠다고 맹세한 궁사가 있었다.
수백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진리를 추구한 마술사가 있었고, 여신에게 모든 것을 바치겠다고 맹세하고 신자 중 가장 깊은 신앙을 가지고 있다고 인정받은 사제가 있었다.
그들의 몰골도 멀쩡하지만은 않았다. 용사의 축복받은 갑옷은 어린아이가 가지고 논 종잇조각처럼 갈기갈기 찢어져 있었다.
당연히, 후열에 있어야 할 이들의 몰골도 멀쩡하지는 않았다. 전투가 주는 피로에 주저앉은 궁사와 마법사였지만, 그들의 눈에는 승리의 기쁨이 아른거리고 있었다.
이들이 공격을 멈춘 이유는 절망과 포기가 아니었다. 모든 힘을 다 써 버려 탈진한 것도 아니었다.
"으어, 크윽, 아아아아아!"
마법사가 마지막에 발동한 궁극의 마법이, 지금도 공간과 함께 마왕을 구겨버리고 있기 때문이었다.
"아아아아!"
꽤 많은 말을 했던 마왕이었지만, 마지막에는 결국 상투적인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이내, 그것도 사라졌다. 마왕은 사라졌다.
"해, 해냈군요, 엘레노어!"
성녀의 밝은 목소리에, 마법사가 싱긋 웃었다. 용사의 표정은 비교적 흔들리지 않았지만, 그녀의 굳은 표정에도 약간의 행복이 섞여 있었다.
"여러분들이 함께 해 주신 덕분입니다. 마지막까지 수고 많으셨습니다. 네르웬, 셀리아, 파시어."
"이 중 가장 많은 수고를 들이고, 가장 명예로운 일을 행한 건 너다, 용사. 돌아가면 네 공훈을 시로 남길 것이다. 너와 같은 업적을 세운 이는 엘프 중에서도 흔치 않아."
네르웬이 저런 말을 하는 건 흔치 않았다. 아마 그녀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칭찬 그 이상일 것이다.
"나는 적자다만... 뭐, 여기서 쌓은 경험이나, 마왕군이 날뛰어서 생길 리스크까지 고려하면 아슬아슬하게 본전은 건지겠네. 아, 그래도 마탑에 약속된 지원을 포함해서 말한 거지만."
비교적 기쁜 기색이 덜한 마법사였지만, 아무도 그녀에게 따가운 시선을 보내지 않았다. 방금 우리가 본 것은 가히 현세에 일어난, 인간이 만들어낸 기적이라고 볼 수 있을 법한 광경이었으니까.
"끝났군요. 돌아갑시다."
"이제 황녀 나리라고 불러야 하나. 뭐, 우리끼리는 계속 이대로 불러도 괜찮지?"
"당신이 저희 할아버지보다 연장자라는 것을 그렇게까지 강조하고 싶다면야, 뭐라고 부르시든 상관없습니다."
가벼운 농담과 함께, 주저앉아 있던 파티원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긴 모험이 끝나고, 이제 돌아갈 시간이었다.
하지만 내 일은 끝나지 않았다. 허겁지겁 땅에 떨어진 화살과 흩뿌려진 마도구들을 줍던 나는, 진짜로 마왕의 방에서 나가려 하는 파티원들을 급하게 불러세웠다.
"자, 잠시만요!"
"뭐냐, ‘악취 나는 가방’? 쓸데 없는 말로 우릴 멈춰세운 건 아니겠지?"
궁사의 차가운 시선이 내게 꽂혔다.
"아직 화살을 주울 시간이..."
"멍청하긴, 마왕도 죽었는데 그렇게 필사적으로 화살을 주워서 어디 쓰겠다는 거냐? 헛소리하지 말고 따라와라."
마법사의 말은 언제나처럼 퉁명스러웠지만, 그래도 오늘만큼은 반가웠다. 팔에 끼고 있는 화살까지만 잡고 돌아서는 도중, 궁사의 차가운 눈초리가 쏟아졌다.
"엘프의 귀중한 화살을, 네까짓 가방 놈의 어리석은 판단으로 방치하겠다는 거냐?"
또 이 지랄이다. 자기들끼리 의견이 갈린 건데 내 탓으로 돌리는 것.
스트레스가 많이 쌓였거니 이해는 할 수 있었지만, 당했을 때 짜증이 치솟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럼, 다 주울까요?"
"명령이 필요하다니, 말 그대로 노예의 본능이군. 하지만 주제를 아는 건 맘에 든다. 그래, 주워라."
나는 한숨을 쉬며 다시 허리를 굽혀 화살을 주웠다. 하지만, 다른 네 명은 나를 기다리지 않았다.
"아니, 그러니까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마왕이 죽었으니, 남은 놈들은 그저 잔당에 불과하다. 나와의 훈련을 거친 네놈이니, 겨우 이 정도에 패하지는 않겠지."
용사의 냉랭한 목소리가 내 목을 조였다.
훈련이라고는 하지만, 전문적으로 훈련한 기사에 더해 용사의 힘까지 얻은 그녀가 일방적으로 나를 두드려 패는 구타에 불과했다.
곧 흩어질 잔당이라고는 해도 일단은 마왕성. 여기서 하급 마물에게라도 잘못 걸리면 그날로 죽을 것이다.
"이 모험에 짐꾼으로나마 따라올 수 있는 게 얼마나 큰 영광인지 모르는 건가?"
나는 희망을 접었다. 저런 상태가 된 용사를 설득하는 건 불가능했다.
"내 기사단의 가장 게으르고 무능한 이조차, 너에 비하면 노력하는 천재라고 부를 수 있을 거다! 그런 이들도 보지 못한 업적을 네 눈으로 보고 있는 거다!"
"하..."
나는 깊게 한숨을 쉬고, 용사 일행이 나가는 것을 그저 지켜보았다. 황녀인 엘레노어가 결정한 일은 바뀌지 않는다.
다른 파티원 두셋이 달려들어 설득하면 가능성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 목소리는 반 사람분의 가치도 없었다.
늘 그랬던 것처럼, 목숨을 걸고 어떻게든 피할 수밖에 없었다. 방금 마왕과의 전투에서도 살아남았는데, 하급 마물이라면 어떻게든 피할 수 있지 않을까.
나는 한숨을 한 번 깊게 쉬고, 땅에 떨어진 화살들을 줍기 시작했다. 아까 마왕에게 당한 상처들이 쑤셨다.
텅 빈 마왕의 방 안에는, 바스락거리는 화살 줍는 소리만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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