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3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해피 엔딩
(173/173)
173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해피 엔딩
(173/173)
173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해피 엔딩
2023.02.25.
벨레드리안 제국이 연일 들썩였다.
사람들은 이 전대미문의 사건에 대해 끊임없이 이야기를 나누고, 또 제각기 주워들은 정보를 공유하기 바빴다.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진 황태자가 돌아왔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게다가 그 자리에 다른 사람도 아닌 에르헨이 앉아 황제 노릇을 하고 있었다니.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을까.
아무리 이성적으로 생각해 보려 해도, 그럴 수 있을 리 없었다.
일부 심약한 사람들이 곳곳에서 기절하는 일까지 속출했다.
이 기묘한 현상의 해답을 찾기 위해 제국의 저명한 학자들과 내로라하는 마법사들이 밤잠까지 잊은 채 연구에 몰두했지만, 그 누구도 정답을 말하지 못했다.
대신 사람들 사이에서 가장 신빙성 있게 느껴진 가설은 ‘황실에 몸담고 있던 에르헨이 황위가 탐난 나머지 흑마법사와 손을 잡고 위너드 황태자와 그를 기억하는 모든 사람에게 저주를 걸었다’는 것이었다.
다만 그 저주를 어떻게 풀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당연히 주변 국가들도 조용할 리가 없었다.
특히 위너드 황태자를 알고 있던 타국의 고위 귀족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모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진짜 후계자를 되찾은 벨레드리안 제국은 앞으로 더욱 강대국이 될 거라는 전망에 따라, 외교 정세가 어떻게 변화할지 연일 수많은 의견이 오고 갔다.
게다가 이번 일로 은밀하게 신관을 불러 미리 액막이를 하는 황실들도 있었다. 행여나 같은 저주가 일어나진 않을까 두렵기 때문이었다.
그 후 시일이 지났지만, 황태자에 대한 관심은 사그라들긴커녕 더더욱 불타오르기만 했다.
얼마 후 치러질 그의 즉위식과 그 후 곧바로 이어질 성혼식에 관한 소식 덕분에 더더욱 그러했다.
예비 황후가 벨레드리안 출신이 아닌 이웃 세실리카 제국의 귀족 영애라는 점이 두 나라 국민의 이목을 더더욱 끌었다.
예비 황후의 국적뿐만 아니라, 그녀가 위너드의 목숨을 구한 일등 공신이라는 소문 또한 은밀히 퍼졌다.
오늘도 빈자리를 찾기 힘든 레아의 디저트 가게에서는, 모든 손님이 그 화제로 이야기꽃을 피우기 바빴다.
“위너드 황태자께서 정말로 우리 제국에 온다는 거지? 로렐라 메이레드 님께 청혼하기 위해서 말이야!”
“즉위식을 앞두고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텐데 친히 이곳까지 오신다니? 보통은 황궁으로 신부를 부르잖아. 이리 극진하게 대우하는 걸 보면 로렐라 님이 목숨을 구했다는 소문이 사실인가 봐.”
“어쨌거나 대단히 영광스러운 일일세. 이 아우레아에서 벨레드리안 제국의 황후가 탄생하다니!”
“영광은 무슨. 난 반대야. 로렐라 님은 황제 폐하께서 특별히 아끼실 만큼 대단한 인재라고 들었어. 그런 분을 왜 남의 나라 황후로 보내야 하지?”
“저도 동감입니다. 기사 훈련소에 가 있는 제 동생이 그러는데…….”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던 한 남자가 일행에게 은밀하게 속삭였다.
“성기사단은 이 결혼을 결사반대하는 모양입니다.”
이 결혼이 탐탁지 않은 것은 비단 에크레투스 성기사단뿐만이 아니었다.
세실리카 황제의 집무실 앞.
“끄으응……. 고야안! 정말 괘씸…… 괘씸한지고…….”
등 뒤에서 들려오는 황제의 앓는 소리에, 브라운베르크 백작이 남몰래 한숨을 푹 내쉬고는 밖으로 나왔다.
복도에 하얀 정복을 입은, 긴 금발을 하나로 묶은 남자가 서 있었다.
“……황제 폐하는 좀 어떠십니까?”
레어넌의 물음에 백작이 고개를 살짝 가로저었다.
“충격이 크신 듯합니다. 게다가 위너드 황태자의 방문 날짜가 다가오면 다가올수록 노여움은 더욱 배가 되어…….”
브라운베르크 백작은 이야기하다 말고 급히 입을 다물었다.
그 이름을 꺼낸 순간, 레어넌의 눈빛이 무겁게 가라앉았기 때문이었다.
조금 수척해진, 그러나 여전히 눈부시게 잘생긴 젊은 기사단장의 얼굴을 바라보며 브라운베르크 백작은 안타까운 마음을 금치 못하고 속으로 조용히 혀를 찼다.
매일매일이 축제 분위기인 벨레드리안 황실과는 달리, 세실리카 황실은 벌집이라도 쑤신 듯 발칵 뒤집혔다.
얼마 전 레어넌이 남긴 폭탄선언 때문이었다.
‘저는 황제가 되기엔 부족한 몸입니다. 이대로…… 성기사단장으로 남고 싶습니다.’
세실리카의 황제 부부에게는 아이가 없었다. 따라서 가장 가까운 가문에서 차기 황제를 선출해야만 했다.
그리고 모두가 레어넌 베르하르트가 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출신은 물론이고 성품도 완벽한 데다가, 온 제국민의 신뢰를 한 몸에 받는 인물이니까.
그런 그가, 황제가 되지 않겠단다.
황실은 물론, 베르하르트 가문, 그리고 그가 황제가 되길 바라는 모든 사람이 그를 온갖 방법으로 회유하기 시작했다.
마음을 돌리기 위해 수도 없이 많은 설득과 온갖 호소가 이어졌고, 심지어 황제는 협박까지 할 정도였다.
그러나 레어넌은 흔들리긴커녕 오히려 뜻을 더욱 굳혔다.
“조심히 살펴 가십시오.”
레어넌은 무어라 할 말이 남은 듯 입술을 달싹이는 백작에게 가볍게 인사를 건넸다. 그러고는 황제의 집무실 문을 노크했다.
그러자 얼굴이 반쪽이 된 시종이 급히 문을 열어 주었다.
그를 따라 안으로 들어서니, 뚱한 표정의 황제가 보였다.
“폐하, 레어넌 단장님이 오셨습니다.”
“…….”
평소 같았으면 웃으며 반겨 주었을 황제는, 의자에 앉아 미동도 하지 않았다.
“황제 폐하, 강녕하셨습니까.”
절도 있게 인사를 건넸지만, 이번에도 대답은 없었다. 그러나 레어넌은 꿋꿋이 말을 이었다.
“위너드 황태자의 방문에 따른, 공식 접견 행사 및 호위에 관해 상의드리러 왔습니다.”
황제의 눈썹이 삐딱하게 올라갔다.
“……공식 행사? 행사아?”
아니, 삐딱한 건 눈썹만이 아니었다.
“뭐가 좋아서 행사를 열어 주어야 한단 말이냐, 뭐가! 짐이 키운. 아니, 짐이 발견한 보석 같은 인재를 홀라당 채 가는 그 불한당에게……!”
물론 로렐라 메이레드가 벨레드리안 제국의 황후가 된다는 것은 외교적으로는 전혀 나쁘지 않은 일이었다.
아니, 나쁘지 않은 게 다 뭔가. 앞으로 두 제국의 관계는 더욱 돈독해질 테니 오히려 잘된 일이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정치적인 입장이 그런 것이고, 황제의 개인적인 속마음은 조금 달랐다.
뒤쪽에 있던 시종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레어넌은 주먹을 말아 입가에 대고는 살짝 헛기침했다.
“누가 들을까 걱정됩니다, 폐하.”
“들으라지!”
만류에도 불구하고 황제의 분노는 쉬이 식지 않는 듯했다.
한참을 씩씩거린 것도 잠시.
“레어넌, 좋은 수가 있다.”
황제가 갑자기 책상을 가볍게 내려쳤다.
“지금 당장 내 후계자가 되어라. 너 또한 그녀를 반려로 맞이하고 싶다고, 정식으로 공표하는 거야!”
그의 눈동자가 빛났다.
“그렇게 되면, 제아무리 벨레드리안의 새 황제라 해도 그녀를 함부로 데려갈 순 없겠지. 그리고 짐이 직접 나서서, 레이디 로렐라에게 너를 위해 아예 황궁으로 들어와서 일해 달라고 명령하겠다. 조금 곤란하긴 해도 거절하지 못할 게다.”
황제는 청산유수로 말을 이었다.
“세실리카의 황실은 물론, 전 국민이 모두 네 편이 되어 줄 것이다. 여론이 그리 형성되면 레이디 로렐라도 고민할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
이건 기회였다. 로렐라 메이레드를 타국에 보내지 않아도 될뿐더러, 황위에 조금도 관심을 보이지 않는 레어넌의 마음을 돌릴 절호의 기회.
기세등등한 황제를 바라보던 레어넌이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왜 진즉 이 생각을 하지 못했을……!”
“황제 폐하……. 아니, 숙부님.”
레어넌의 낮은 목소리에 황제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둘이 있을 땐 친근하게 부르라는 요청에도 불구하고, 늘 깍듯하게 존칭을 하던 조카였기에 더더욱.
“저는…… 그녀가 누구보다 행복하길 바랍니다.”
“말에 어폐가 있구나. 나 역시 레이디 로렐라가 불행하기를 원하는 게 아니다.”
황제가 억울하다는 듯 두 눈을 크게 떴다.
네가 행복하게 해 주면 되잖아, 네가!
위너드 황태자가 꽤 훌륭한 인재이긴 하지만, 내 조카도 어디 가서 빠지는 남자가 아닌데!
하지만 레어넌은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말을 받았다.
“그녀는 혼인…… 후에 벨레드리안 제국에서 생활하게 되겠지만, 외교 행사를 위해 가끔 세실리카를 방문할 기회가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때는, 타국의 황후이니만큼 예우를 다해 맞이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곳에 계시는 동안 우리 기사단이 호위를 맡아야 함은 물론이고요.”
“…….”
“유사시에는 지체 없이 검을 들 수 있는 자리에 남고 싶습니다. 언제까지나…… 그녀를 지켜 주겠다고 다짐했으니까요.”
“……잠깐.”
가만히 이야기를 듣던 황제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그, 그건 처음 듣는 이야긴데.”
“…….”
“기사단장으로 남겠다는 이유가 설마 그것이었나? 황제가 되면…… 호위고 뭐고 나설 수 없으니까……?”
레어넌은 침묵으로 답을 대신했다.
황제는 눈도 깜빡이지 못하고 그저 레어넌을 뚫어져라 바라볼 뿐이었다. 거친 숨을 몰아쉴 때마다 그의 어깨가 크게 들썩였다.
“끄어어억…….”
이내 황제의 입에서 괴상한 신음이 흘러나오더니, 눈이 까무룩 뒤집혔다.
“폐, 폐하……!”
목 뒤를 잡은 채 의자에서 미끄러지려는 그를 시종들이 달려와 급히 잡았다.
“의, 의사를 부르겠습니다!”
얼굴에 부채질해 주고, 입에 찬물을 흘려 넣는 등 한바탕 소동이 일었다. 하지만 황제는 좀처럼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 * *
세실리카 황궁과는 조금 떨어진, 수도의 한적한 외곽.
여기에 눈이 뒤집힌 사람이 또 한 명 있었다.
“으아아아아!”
주위에 있는 건물들과 비슷한, 얼핏 보기엔 그저 평범해 보이는 건물에서 한 남자의 다급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바로 검은 뱀 길드의 본부였다.
“저놈 잡아! 빨리 잡아!”
시드가 내지른 비명 같은 큰 소리에 길드원들이 창가로 우르르 뛰어갔다.
“길드장님!”
“카셀 님! 이, 이러시면 안 됩니다!”
그야말로 간발의 차였다. 창문을 통해 잽싸게 빠져나가려던 카셀이 부하들의 손에 붙잡혀 질질 끌려왔다.
검은색 복면을 두른 채로.
“이거 놓지 못해?!”
그가 씨근덕거리며 연신 거친 숨을 토해 냈다.
루비색을 띤 예쁜 눈동자가 희번덕였다.
“그 자식……. 내가 죽일 거야.”
“카셀, 지, 진정해. 응? 자, 일단 천천히 심호흡하고…….”
“기필코 죽여 버릴 테다!”
시드가 어떻게든 카셀을 달래려 노력해 보았지만, 그는 조금도 듣고 있지 않았다.
“이 미친놈이 진짜……!”
결국 시드도 폭발했다.
“옆 나라 황태자를 암살하겠다니, 제정신이냐? 엉? 제정신이냐고! 네놈이 지금 길드 말아먹으려고 작정한 거지?!”
시드가 카셀의 멱살을 잡고 마구 흔들었다. 하지만 카셀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감히 누나한테 청혼을 해? 그 새끼가 누구 맘대로……!”
이를 부드득 가는 그의 눈은 반쯤 풀려 있었다. 도저히 말로 해서는 안 되는 상태가 분명했다.
시드는 한숨을 푹 내쉬며, 억지로 의자에 눌러 앉힌 카셀의 어깨를 힘껏 잡았다. 그러고는 길드원들에게 명령했다.
“……묶어라.”
길드원들은 머뭇거리긴커녕, 우르르 달려들어 재빨리 밧줄로 카셀을 의자에 꽁꽁 묶기 시작했다.
“이거 놔! 이거 놓으라고오오!”
카셀은 마구 난동을 부렸다. 어찌나 힘이 센지, 길드원들이 몇 명이나 달라붙었는데도 애를 먹을 정도였다.
언제나 사람을 홀리는, 아름다운 악마 같은 눈동자에 살의가 불타올랐다.
시드는 절망 속에서 또다시 한숨을 쉬었다.
평생을 바쳐 온 길드지만, 지금만큼은 오로지 탈퇴하고 싶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메웠다.
* * *
물론 제국의 모든 곳이 전부 소란스러운 건 아니었다.
세실리카 제국 북부는 오늘도 조용하기 그지없었다.
특히 펠리어트 공작이 살고 있는 저택은 조용하다 못해 을씨년스럽기까지 해, 소동이 일어난 곳과는 마치 동떨어진 세계인 듯했다.
“공작님.”
서류를 손에 든 집사가 서재로 찾아와 조용히 노크했다. 이윽고 들어오라는 허락과 함께 문이 열렸다.
안쪽으로 한 발자국 들어선 순간, 집사는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렸다. 훈훈한 복도와는 달리 코끝이 시릴 정도의 한기가 온몸을 휘감았기 때문이었다.
집사는 재빨리 몸을 움직여 펠리어트의 책상 쪽으로 다가갔다. 그 옆에는 커다란 벽난로가 있었지만, 불을 피운 흔적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일전에 말씀드린…… 부지 정비에 관련한 서류입니다.”
말을 할 때마다 집사의 입에서 허연 김이 미약하게 피어올랐다.
이곳에 놓인 각종 집기와 값비싼 장식품들이 아니었다면, 지금 서재가 아니라 정원 한가운데에 서 있다고 해도 믿을 정도로 추웠다.
펠리어트는 말없이 손을 내밀었다. 그러고는 그대로 서류를 검토하기 시작했다.
춥지도 않은지 그는 가벼운 셔츠와 베스트 차림이었다.
내내 공작의 곁을 보좌하는 수하가 두툼한 털 망토 차림인 것과는 무척이나 대조되는 모습이다.
“이대로 진행하도록.”
그의 입술을 비집고 낮은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아무런 고저도 느껴지지 않는, 그저 얼음장처럼 차갑고 무감한 목소리였다.
마치 지금 그의 마음을 대변하기라도 하듯이.
“저, 공작님…….”
서류를 받아 든 집사가 잠시 머뭇거리다 큰 용기를 내어 입술을 열었다.
깊게 가라앉은, 차가운 검은 눈동자가 집사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한파가…… 몰아치고 있습니다. 이렇게 지내시다간, 몸이 크게 상하실까 걱정됩니다…….”
집사는 거의 울먹이고 있었다.
북부의 기나긴 겨울.
매서운 추위는 겨울이면 늘 찾아오는 단골손님이었다. 한파에 대비하기 위해 미리 장작과 식량을 비축하는 건 북부 사람들에겐 연례 행사와도 같았다.
공작저도 예외는 아니었다. 특히 올해는 예년에 비해 지독한 추위가 몰려올 것 같았기에 하인들은 평소보다 넉넉히 준비를 마쳤다.
하지만 공작저는 그 어느 때보다도 한기가 맴돌았다. 특히 펠리어트가 내내 틀어박힌 서재는 들어가기만 해도 손끝이 시려 올 정도로 유독 추웠다.
온기를 찾아볼 수 없는 건 비단 서재뿐만이 아니었다. 그가 가끔 이용하는 응접실은 물론, 침실조차도 얼음 같았다.
하인들이 사용하는 공간이 몇 배는 더 훈훈하니, 더 이상 말해 무엇 할까. 그 탓에 저택 사람들의 걱정은 극에 달했다.
하지만 다른 사람도 아닌 그 펠리어트 공작이다. 아무리 사정하고 애원해 봐도, 그는 이 얼음장 같은 곳에서 나올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 이유가 대체 무엇 때문인지 모르는 사람은 없었지만, 차마 그 이야기까지 공공연히 입에 담을 순 없는 노릇이었다.
“이만 가도 좋다.”
집사의 애원에도 불구하고 펠리어트는 오로지 이 말뿐이었다.
아무리 사정해 봤자, 오늘도 공작님의 서재에 벽난로 불을 피우기는 그른 듯싶었다.
집사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고는 한발 물러섰다.
그가 나가고 난 뒤, 서재에 남은 건 수하와 펠리어트 공작 두 사람뿐이었다.
수하는 펠리어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마를 단정히 덮은 검은 머리카락, 깊고 그윽한 눈매, 여전히 수려하지만 평소보다 훨씬 야윈 턱선까지.
“……왜 그러지?”
“아닙니다.”
순간 날아든 날카로운 눈빛에 수하는 얼른 헛기침하며 몸을 바로 했다.
“올해 겨울엔 유독 지독한 추위가 찾아온 것 같습니다.”
수하는 무심코 이런 말을 입에 올렸다. 하지만 곧바로 후회했다. 다른 사람도 아닌 펠리어트 앞에서 결코 해선 안 될 이야기기 때문이었다.
“그런가?”
하지만 펠리어트의 표정은 아무런 흔들림이 없었다.
“북부의 겨울은 원래 춥고 외로운 법이지.”
그는 무감한 눈빛으로 램프 끝의 희미한 불꽃을 바라보았다. 책상 앞을 밝히는 그 램프만이 서재 안의 유일한 온기였다.
“하지만 북부를 제외한 다른 곳은 오히려 평년보다 일찍 봄이 찾아온다더군.”
붉게 타오르는 불빛을 유심히 바라보던 그가 나직이 말했다.
“네. 덕분에…… 봄을 맞이하는 축제 또한 일찍 열린다고 하더군요.”
수하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도록, 말 한 자 한 자를 무척이나 신중하게 꺼냈다.
펠리어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나직이 말했다.
“……아름답겠지.”
행복할 테고, 틀림없이.
수하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로 조용히 속삭이는 그의 입술에, 어느새 희미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 * *
척 보기에도 높으신 분이 타고 있을 것 같은, 화려한 마차 여러 대가 아우레아 도심으로 향하는 성문을 빠르게 통과했다.
새파란 하늘 아래, 보랏빛 깃발이 나부꼈다.
마차를 호위하는 기사들의 등 뒤에도 금술이 달린 보랏빛 망토가 휘날렸다.
꽤 오랜 시간을 쉬지 않고 빠르게 달려왔건만 행렬은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었다. 고급스러운 안장을 얹은 말들도 지친 기색을 보이긴커녕 더욱 힘차게 발을 움직였다.
아침 일찍부터 이 장관을 구경하기 위해 모여든 시민들의 눈이 일제히 휘둥그레졌다.
“보인다, 저기 벨레드리안 황실 마차다!”
“저, 정말로 황태자님이 행차하셨어……!”
그들은 발을 동동 구르며 도롯가로 모여들었다.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마차의 차창 안으로, 혹시라도 황태자의 얼굴을 볼 수 있을까 싶어 잔뜩 고개를 빼는 자들도 있었다.
“오! 혹시 저분이 황태자님이신가?!”
“어, 어디?!”
“얼굴은 제대로 못 봤는데, 엄청나게 화려한 옷을 입고 계셨어. 웬만한 귀부인은 저리 가라 할 정도던데?”
“오늘을 위해 특별히 차려입고 오신 건가?”
기다린 시간에 비해, 마차는 바람처럼 빨리 사라져 버렸다. 하지만 사람들은 쉬이 자리에서 떠나지 못하고 저마다 이야기꽃을 피웠다.
마차는 성기사단이 호위하고 있는 메이레드 저택 안으로 들어섰다.
정원을 지나, 현관 앞 연석 쪽에 일제히 바퀴가 멈췄다.
앞쪽 마차에서 고급스러운 의상을 갖춰 입은 시종들이 내렸다.
기사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가운데 길을 만들고는 양옆으로 도열했다.
“위너드 황태자님께서 드십니다!”
시종 중, 가장 앞에 선 자가 현관 앞에 미리 나와 있는 사람들을 향해 크게 외쳤다.
그 순간, 저 멀리서 불어온 바람에 로렐라의 붉은 머리가 나풀거렸다. 따사로운 햇살 속 차가운 겨울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이윽고 가장 화려한 장식을 달고 있는 마차의 문이 천천히 열리고, 늠름하면서도 아름다운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부드러운 갈색 머리카락이 이마 끝에서 부드럽게 흔들렸다.
빛을 받을 때마다 영롱한 에메랄드 보석을 담은 듯한 아름다운 녹색 눈동자가 반짝였다.
로렐라의 뒤에 서 있던 조이는 저도 모르게 벌어진 입술을 좀처럼 다물지 못했다.
한 나라의 차기 군주답게 그야말로 위용이 넘치는 모습이었다.
걸음걸이 하나하나에도 기품이 가득했고, 무엇보다 입가에 걸린 여유로운 미소가 그를 더욱 세련되게 만들어 주었다.
그녀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황태자가 몸에 걸치고 있는 고급스러운 정복에 닿았다. 화려한 옷을 저렇게나 잘 소화해 내는 사람은 처음 봤다.
황태자가 손에 들고 있는, 붉은 보석 장식이 달린 케인도 시선을 잡아끌었다.
물론 그게 벨레드리안의 적통 후계자에게만 주어지는 황실의 가보라는 것까지는 미처 알지 못했지만.
위너드는 쏟아지는 수많은 시선 속에서, 흔들림 없이 로렐라에게 다가왔다.
태양처럼 붉게 빛나는 그녀의 눈동자가 들어왔다. 아주 가까운 곳에서 타오르는, 저만의 태양을 바라보던 위너드의 마음속에 전율이 일었다.
그는 그녀의 손을 꼭 잡은 채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
“드디어 안내자로서의 소원을 빌러 왔어.”
장난스럽게 살짝 윙크를 건네며 말했지만, 긴장으로 다소 낮게 내려앉은 목소리가 귓가를 적셨다.
“내 주인공을 평생 행복하게 해 주는…… 사람이 되고 싶어.”
로렐라는 아무 말 없이 부드럽게 미소 띤 채 위너드를 바라보았다.
“사랑해, 로렐라.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만큼 아름다운 로맨스를 만들어 줄게. 그러니 나와 언제까지나 함께해 줘.”
그 어느 때보다도 진지한 사랑을 맹세하는, 자신만의 남자 주인공.
그런 위너드를 찬찬히 눈에 담던 로렐라는 가슴이 벅차오름을 느꼈다.
그가 바라는 소원은, 자신의 소원과 똑같았다.
그리고 드디어, 그 소원이 이뤄질 때였다.
“우린 언제까지나 함께 있을 거야.”
그녀는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그의 목에 팔을 감으며 예쁘게 눈웃음 지었다.
“나도 널 사랑해, 위너드.”
아찔할 정도로 아름다운 유혹에 위너드는 더 이상 견디지 못했다.
이제 곧 한 나라의 군주가 될 자리에 앉게 될 테니 조금 자중해야 함을 잘 알고 있지만, 그는 어느 때보다도 급히 입술을 내렸다.
보드라운 살갗이 닿자 기다렸다는 듯 따듯한 숨결이 닿았다.
평생토록 빠져나오지 못할 것 같은 부드러운 향기가 온몸을 감쌌다.
더 이상 안내자도 그리고 주인공 후보도 아닌, 그저 사랑스러운 연인들의 모습이었다.
띵동!
로렐라와 위너드의 귓가에 일제히 찬란한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두 사람 모두 주목하고 있지 않은 화면 또한 쉴 새 없이 번쩍거렸다.
사상 최초라고 해도 될 정도로 엄청난 주식이 팔려 나갔고, 수많은 메시지가 줄줄이 달렸지만 이젠 아무런 상관도 없었다.
두 사람의 결코 끝나지 않을 아름다운 이야기는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이니까.
그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해피 엔딩이었다.
<본편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