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1화. 내 남주 구하러 (171/173)


171화. 내 남주 구하러
2023.02.18.


올해는 유독 눈이 일찍 찾아왔다.

로렐라의 저택이 있는 세실리카의 아우레아에도 밤새도록 함박눈이 내렸다.

새벽녘까지 소리 없이 펑펑 쏟아지던 눈은 아침이 되어야 비로소 그쳤다.

구름 한 점 없는 청명한 하늘 아래 온통 새하얗게 빛나는 세상이 눈부시기 그지없었다. 아침부터 눈싸움을 하려고 몰려나온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여기저기서 즐겁게 울려 퍼졌다.

어른들도 제각기 뱅쇼나 따뜻한 차 등을 들고 테라스로 나와 오랜만에 따사로운 겨울 햇살과 눈 내린 풍경을 만끽했다.

하지만 메이레드 저택 정원의 산책로에는, 눈이 소복이 쌓여 있긴커녕 모두 말끔히 정리되어 있었다.

아침부터 계속 정원을 서성이는 로렐라와 세이블 때문이었다.

대체 무슨 일 때문인지, 두 사람의 얼굴은 자못 심각했다.

게다가 함께 허공을 멍하니 쳐다보면서 무언가를 중얼거리는 모습도 똑같았다.

그런 사람이 하나에서 둘로 늘어나니, 저택 고용인들의 근심도 배가되었다. 하지만 분위기가 워낙 심상치 않아서 그 누구도 섣불리 말을 건네지 못했다.

그저 아가씨들이 정원을 걷다 미끄러지지 않도록 주변의 눈이나 깨끗이 쓸어 주는 수밖에.


“확실해.”

멍하니 화면을 들여다보던 로렐라가 다시금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주주들의 반응으로 보건대…… 징계에서 벗어난 게 틀림없어.”

비록 긴장한 기색이었지만, 로렐라의 눈만큼은 맑고 힘차게 빛났다.

주주들을 선동한 이후, 그녀는 잠도 제대로 자지 않고 화면에 실시간으로 올라오는 반응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지켜보았다.

그런데도 로렐라는 피곤한 기색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분명 다시 살아난 거야.”

로렐라는 확신에 찬 표정으로 다시 한번 힘주어 이야기했다.

그녀의 눈가가 어느새 붉게 변해 있었다.

세이블 역시 로렐라와 함께 화면을 들여다보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그 의견에 동의했다.

하지만 여전히 석연치 않은 부분이 있었다.


“그런데 어째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걸까요?”

로렐라에게 그 갈색 머리 안내자가 없어선 안 될 사람이 된 것처럼, 그에게도 로렐라가 둘도 없이 소중한 존재일 터.

살아났다면 틀림없이 제일 먼저 그녀를 찾아왔을 텐데.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그는 나타나지 않았다.


“제 생각인데…… 어쩌면 다시 살아났으니, 더 이상 안내자가 아닐지도 몰라요.”

잠깐 생각하던 세이블이 살짝 찌푸렸던 미간을 얼른 펴고는 차분히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예전처럼 자유자재로 공간을 넘나드는 특수한 능력을 쓸 순 없겠죠. 그러니 아마 조금만 더 기다리면…….”

지금 가장 기다리기 힘든 사람은 아마 로렐라일 것이다. 세이블은 그런 그녀의 불안감을 조금이나마 덜어 주고 싶었다.


“아니.”

그러나 로렐라는 세이블의 말이 미처 다 끝나기도 전에 고개를 저었다. 그러더니 곧 이렇게 말했다.


“나를 만나러 오기 위해, 마지막으로 마무리 지어야 할 일이 있는 거겠지.”

마무리 지어야 할 일?

세이블의 의문이 더더욱 깊어져만 갔다.


“공간을 넘나드는 능력이라…… 그래, 어쩌면 나도 가능할지도.”

하지만 로렐라는 그런 세이블은 아랑곳하지 않고 홀로 무언가를 중얼거리기 바빴다.


“세이블.”

그게 대체 무슨 말이냐고 묻기도 전에, 로렐라가 몸을 돌려 세이블의 어깨에 두 손을 얹었다.


“네.”

“나 벨레드리안 제국에 좀 갔다 와야겠어.”

“……네?”

세이블은 두 귀를 의심했다.


“어딜…… 가신다고요?”

“벨레드리안 제국. 지금 당장.”

로렐라는 마치 레아의 가게에 다녀오겠다는 듯 가벼운 말투로 말했다.

벨레드리안 제국은 릴리 후작가가 있는 서부와 국경이 맞닿아 있다.

다만 국경 근처까지 가려면 수일을 쉬지 않고 달려야만 했다.

세이블 릴리는 혼란한 와중에도, 자신이 가진 튼튼한 말 몇 필을 떠올렸다.


“좋아요. 말을 준비하라고 바로 전서구를 보내겠어요.”

아무래도 뭔가 긴 사연이 있는가 보다. 지금 로렐라는 무척이나 마음이 급해 보이니, 자세한 이야긴 가면서 들어도 늦지 않을 것이다.


“우선 후작가까지 함께 간 뒤, 거기서 말을 바꿔서 다시 길을 떠나는 걸로…….”

“아니, 나 혼자 갔다 올게. 그 편이 빠를 거야.”

로렐라는 또다시 고개를 저으며 세이블의 말을 끊었다.


“내 세계에서는 뭐든 가능하다고 했잖아? 그게, 단순히 세실리카에만 국한된 건 아닐 거야.”

“…….”

“만약 그랬더라면 ‘세실리카’의 주인공이 되었다는 칭호가 주어졌겠지. ‘이 세계’의 주인공이 아니라.”

세이블은 여전히 아무 대답하지 않고 로렐라의 말을 가만히 경청했다.


“내 세계란 나와 관련된 일이 벌어지는 모든 장소를 지칭하는 거라 생각해. 따라서 내 남주가 벨레드리안으로 향했으니, 그 역시 나와 관련된 세계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내 추측이 맞다면 주인공의 능력을 사용해 손쉽게 이동할 수 있을 거야.”

로렐라가 눈을 내리깔고는 낮게 중얼거렸다.


“게다가 거기엔 여전히 황제 행세를 하고 있는 주인공이 있을 테니, 더더욱 내가 가야 해.”

하지만 그도 잠시.

로렐라는 세이블의 손을 꾹 잡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금방 다녀올게.”

“로렐라 님. 그러니까 지금…….”

세이블이 로렐라를 급히 잡았다.

너무 갑작스러운 이야기라 잠시 정리가 필요했다.


“주인공의 능력을 써서 벨레드리안으로 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거죠? 거긴 도대체 왜 가셔야만 한다는 건가요?”

로렐라가 비장한 표정으로 답했다.


“내 남주 데리러.”

그러더니 손을 크게 흔들며 시원스레 외쳤다.


“그럼 뒷일을 부탁한다, 친구!”

“아, 아니. 잠깐만……!”

당황한 나머지 세이블이 말까지 더듬으며 손을 뻗었다.

하지만 이미 손끝에는 아무것도 닿지 않았다. 그저 어디선가 갑자기 불어온 바람에 비단결처럼 고운 검은 머리가 흩날렸을 뿐.

로렐라는 진짜로 바람처럼 사라진 뒤였다.


“……하.”

세이블은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정리하며 황당한 신음을 흘렸다.

언제나 계획을 중요시하는 저와는 달리, 로렐라 메이레드는 가끔 이렇게 즉흥적으로 행동하고는 했다.

세상에 둘도 없는 벗으로서 로렐라를 무척이나 좋아하긴 하지만, 솔직히 말해 이런 면은 자신과 영 맞지 않는다.

로렐라의 고용인들에게 대체 뭐라고 이야기하면 좋지?

고민을 거듭하며 현관 쪽으로 돌아간 그때였다.

어디선가 말 울음소리가 들린다 싶더니, 이윽고 정원을 가로질러 다가오는 커다란 마차가 눈에 띄었다.

금빛으로 치장된 화려하고 아름다운 마차가 세이블이 서 있는 현관 앞에서 멈췄다.

문을 열고 내린 사람은, 레어넌 베르하르트와 펠리어트 체임버스였다.

둘 다 예식용 복장을 입고, 훈장이 잔뜩 달린 새쉬까지 착용한 걸 보니 아마 황궁에 다녀오는 길인 듯했다.

그러고 보니, 오늘 두 사람이 함께 들를 예정이라는 소리를 들은 것 같기도…….

두 사람은 성큼성큼 세이블의 곁으로 다가왔다.


“어서…… 오십시오.”

제 저택도 아닌데.

세이블은 조용한 목소리로, 그러나 그 어느 때보다도 어색하게 인사를 건넸다.


“또 뵙는군요, 세이블 릴리 님. 잘 지내셨습니까?”

“…….”

레어넌 베르하르트가 정중하게 인사를 받아 주었다. 반면 펠리어트 공작은 무뚝뚝하게 고개만 끄덕였다.


“로렐라 님은 좀 어떠십니까?”

“그녀는 지금 어디에 있지?”

인사를 마친 두 사람은 곧 약속이나 한 듯이 함께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로렐라를 찾았다.

세이블은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하는 것만 같았다.


“지금 잠깐 자리를…… 비웠습니다.”

최대한 소동이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하건만, 당장 떠오르는 대답이라고는 이것뿐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두 남자의 눈가가 심상치 않게 일그러졌다.


“부재중이라니. 환자가?!”

“몸이 아직 성치 않으신데 대체 어딜 가신 겁니까?”

마치 취조라도 당하는 죄인이 된 듯한 기분에, 세이블은 등에서 식은땀이 날 지경이었다.

그녀는 난생처음으로 로렐라 메이레드와 친구가 된 것을 조금 후회했다.


 

* * *



“어서 오십시오, 오르세스 후작님.”

마차에서 내리자, 미리 대기하고 있던 시종이 꾸벅 인사를 건넸다.

아름다운 진줏빛을 띠는, 보기만 해도 위용이 넘쳐흐르는 육중한 대리석 문이 부드럽게 열렸다.

후작의 뒤를 따라 안으로 성큼 걸음을 내딛자 익숙하고도 그리운 향기가 폐부에 물씬 스며들었다.

벨레드리안 황궁.

위너드가 평생을 지내 왔던, 한시도 잊은 적 없던 그리운 집이자 고향이었다.

그는 고개를 위로 살짝 든 채 도열한 시종들 사이를 자연스럽게 걸었다.

흔들림 없는 반듯한 걸음걸이, 그리고 그만큼이나 위엄 서린 눈빛과 꾹 다문 입술까지.


‘허어…….’

그런 위너드를 곁눈질로 바라보던 오르세스 후작은 속으로 감탄사를 연발했다.

황궁을 처음 와 본 지방 귀족들은 대개 주눅이 들기 마련이었다.

심지어는 황제 앞에서 실수라도 할까 봐 벌벌 떠는 자들도 많았다.

그렇기에 청년의 당당한 모습은 너무나도 특별하게 느껴졌다.


‘당당한 태도뿐만이 아니야. 마치 자신의 집에 온 것처럼 편안하고 자연스러워 보이기까지 해.’

게다가 이상한 일은 그것뿐이 아니었다.

……이 청년. 분명 어디선가 본 적이 있다.

오르세스 후작은 사실 아까부터. 정확히 말하면, 황궁으로 향하는 마차 안에서 그와 마주 보고 앉아 있을 때부터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얼굴뿐만이 아니라 목소리나 말투, 행동 하나하나가 전부 낯이 익었다.

내가 대체 이 남자를 어디서 보았더라?

오르세스 후작이 남몰래 고민하던 그때였다.

저 멀리, 화려한 휘장을 등진 채 번쩍거리는 갑옷을 차려입은 병사들이 꼿꼿하게 서 있는 게 보였다.


“저곳이 바로 에르헨 황제 폐하와 에세드 루베헨 태황제 폐하가 계신 곳일세. 들어가면 먼저 태황제 폐하에게 인사를 드린 후, 에르헨 황제께 인사를 드리면 된다네.”

오르세스 후작은 혼란스러운 마음을 다잡고 다시금 침착하게 입술을 열었다.


“저 보랏빛 휘장에 수 놓인 금빛 사자 세 마리가 보이는가? 각각 태황제 폐하와 태황후 폐하, 그리고 황제 폐하를 상징하는 것일세.”

“그렇군요.”

위너드가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습니다.”

……알고 있다고?


“선대 황제께서 저 휘장을 만들라 지시하셨을 때, 수를 놓는 데에만 꼬박 1년이 걸렸다지요.”

또다시 후작의 눈동자가 가볍게 흔들렸다.

물론 황실에 대해 사전 조사를 해 온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세세한 비화까지 전부 조사를 했다는 건가?

휘장 앞에 당도하자, 미리 대기하고 있던 황실 호위단장이 앞으로 한 발자국 절도 있게 걸어 나왔다.

이 역시 위너드가 너무나도 잘 아는 자였다.


“어서 오십시오, 오르세스 후작님.”

황실 호위단장이 깍듯하게 인사를 건넸다. 동시에 잘 벼린 날카로운 칼날 같은 눈빛이 위너드의 전신을 훑고 지나갔다.


“오르세스 후작님께서 드십니다!”

보좌로 따라온, 그것도 오늘 처음 황궁을 방문한 남작의 호칭은 따로 부르지 않는 것이 관례였다.

커다란 소리가 울려 퍼지자마자 짐짓 위엄이 서린 대답이 돌아왔다.


“들라 하라.”

……그자의 목소리였다.

위너드는 거센 풍랑을 만난 듯 마구 요동치려는 마음을 애써 진정시켰다.

이윽고 휘장이 천천히 걷혔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사방에 깔린 붉은 벨벳 카펫이었다.

위너드는 심호흡을 하며 천천히 발을 내디뎠다.

푹신한 직물이 그의 발아래 닿았다. 하지만 반면 그의 얼굴은 무섭도록 굳어 갔다.

주먹을 꽉 쥔 채 그대로 고개를 들자, 아주 어릴 적 멋대로 앉았다가 크게 혼쭐이 난 커다란 금빛 의자 두 개가 보였다.

그중 한 곳에 에르헨이 앉아 있었다.

황제만이 쓸 수 있는 눈부신 왕관을 머리 위에 얹고서.

위너드의 눈빛이 깊게 가라앉았다.

주먹쥔 손등에 푸른 핏줄이 돋아났다. 아프도록 꽉 깨문 입술 사이로, 날카로운 호흡이 새어 나왔다.


“그동안 강녕하셨는지요, 태황제 폐하.”

“어서 오게.”

오르세스 후작은 태황제와 인사를 나눈 다음, 다시 에르헨을 향해 천천히 고개를 숙여 인사를 건넸다.


“에르헨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그가 인사를 받아 주고 난 뒤, 뒤에 서 있는 청년을 옆으로 다가오게 해 인사를 드리라 하면 되는 것인데…….

하지만 아무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저 지독하게 무거운 침묵이 감돌 뿐.

조금이라도 움직였다간 그대로 베일듯한 날카로운 공기가 사방에 가득 내려앉은 기분이었다.

무언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어 후작이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금방이라도 피눈물을 흘릴 것처럼 핏발 선 두 눈과 마주쳤다.

섬뜩하다 못해 오금이 저릴 정도로 무서운 그 눈동자는 바로 에르헨 황제의 것이었다.


“……헉.”

후작이 저도 모르게 놀라 뒷걸음질 친 그 순간.


“으아아아악!”

에르헨 황제의 입에서 터져 나온 비명이 홀을 가득 메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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