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 잘 왔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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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 잘 왔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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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 잘 왔네
2023.02.15.
여전히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
아니, 주변은 어느새 화면에서 뿜어져 나온 빛 덕분에 밝아져 있었다. 그 빛이 닿는 곳 너머는 여전히 지독하게 어두웠지만.
위너드는 힘겹게 눈을 깜빡였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일까.
눈앞에 떠 있는 화면은 분명히 주인공 후보한테나 보이는 그 창이었다. 본인이 직접 겪기도 했고, 또 로렐라의 안내자였던 그였기에 잘못 볼 리는 없었다.
그러나 여전히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주식을…… 샀다고?”
로렐라가 아닌 내 주식을?
「너! 빨리 남주가 되라고!」
「우리 언니 눈에 눈물 나게 만들기만 해 봐. 가만 안 둘 거임.」
「내가 얼마나 더 19금 외전을 외쳐야 하는 거지ㅜㅜ 현기증 난다…….」
꿈이 아니라는 걸 보여 주기라도 하려는 듯 화면에 쉴 새 없이 메시지가 올라갔다. 어찌나 빠른지 생각을 이어 가기 힘들 정도였다.
종소리 역시 계속해서 귓가에 울려 퍼졌다.
외전이니 뭐니 하는 소리가 뭘 말하는 건지는 여전히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절망 속에 깊게 잠겼던, 희망이 꿈틀거리며 깨어나기 시작했다.
저들이 무얼 좋아하고, 어떤 것에 열광하는지는 물론 잘 알고 있다. 그건 바로…….
굳게 다문 입술을 비집고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로맨스지.”
사랑을 확인한 두 남녀가 이어지는 행복한 결말.
따라서 로렐라가 레어넌이나 펠리어트, 혹은 그 애송이 은발 녀석과 이어지길 바라는 마음에 더욱더 열광해서 주식을 투자했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다.
생각을 정리하는 사이에도 위너드의 화면 위로는 눈 부신 빛이 여전히 번쩍이고 있었다.
빨리 남자 주인공을 내놓으라며 자신을 사라지게 만든 시스템에 대한 주주들의 분노와 항의 또한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거세어졌다.
이미 ‘로렐라 메이레드’라는 주인공이 존재하는데도.
그렇다는 것은 즉…….
‘로렐라의 세계에는 주인공이 두 명이 될 수 있다는 거지.’
그래. 이건 어디까지나 행복한 두 사람의 이야기니까.
그 생각에 도달한 순간 전례 없이 심장이 뛰었다.
어둠이 족쇄가 되어 옴짝달싹하지 못하고 갇혀 있던 모든 감각이 몸 안에서 날카롭게 살아났다.
긴 숨을 토해 내며, 다시금 눈을 문지르던 그 순간이었다.
쿵!
갑자기 요란한 소리와 함께 공간이 무너지려는 듯 마구 요동치기 시작했다.
“뭐지……!?”
위너드는 당황했지만 넘어지지 않고 민첩하게 균형을 잡았다. 두 다리와 그 어느 때보다도 꽉 쥔 주먹에 바듯하게 힘이 들어찼다.
진동은 점점 더 거세어져 갔다. 애써 균형을 잡고 있었지만, 더 이상 몸을 가누기 힘들 정도로 거친 움직임이 계속되었다.
당연하게도 피할 곳은 없었다.
위너드는 입술을 있는 힘껏 깨물었다. 하지만 두려움이나 공포 때문만은 아니었다.
띵동!
들었던 것 중 가장 커다란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주주들의 요청에 의하여 위너드 님의 징계를 해지합니다.」
또다시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밝게 빛나는 화면 속에서, 오로지 이 문구만이 그의 눈에 선명하게 박혀 들어왔다.
쿠우웅!
이윽고 무언가가 무너지는 소리와 함께 벽과 바닥, 그리고 천장에 금이 쩍쩍 가기 시작했다.
기이하게 갈라진 틈 사이로 눈부신 빛살이 쏟아져 내렸다.
발밑이 모래처럼 부서진 순간, 그의 몸은 그대로 아래를 향해 쏜살같이 추락했다.
* * *
낙하는 끝도 없이 계속되었다.
내내 갇혀 있었던 암흑 속 공간은, 이미 아득히 멀어져 작은 점처럼 보이다가 그대로 사라졌다.
귓가를 할퀴는 바람 소리마저 너무나도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따름이었다.
무심코 시선을 들어, 눈앞에 끈질기게 따라오는 시스템 화면을 멍하니 응시한 그때였다.
풍덩!
“윽!”
짧은 비명과 함께, 커다란 물보라가 일었다.
정신이 번쩍 들 만큼 차가운 물이 순식간에 그의 온몸을 적셨다.
얼음장처럼 피부에 달라붙은 젖은 옷을 타고 머리를 둘로 쪼개는 것 같은 한기가 가득 스며들었다.
이가 딱딱 부딪힐 정도로 기온이 낮아 입에서는 연신 하얀 입김이 새어 나왔다. 하지만 위너드에게는 추위를 느낄 여유도 없었다.
그대로 재빨리 몸을 일으키자, 허벅지 근처로 잔잔한 물결이 밀려들었다.
“여긴…… 어디지?”
위너드는 물이 뚝뚝 떨어지는 얼굴을 얼른 훔쳤다.
그러고는 그 어느 때보다도 신중하게 주변을 살폈다.
희미한 여명 속, 물가 주변을 빙 둘러싼 전나무가 보였다.
한겨울에도 푸르른, 커다랗고 뾰쪽한 나무 뒤로 무척이나 익숙한 높은 첨탑들이 우뚝 서 있었다.
화려하면서도 아름다운 장식들이 절로 시선을 잡아끄는 구조물이었다.
그리고 그 아래로는 커다란 성벽이 둘러쳐져 있었다.
도시를 감싸고 있는 크고 튼튼한 성벽은 바늘 하나 들어갈 틈도 없이 단단하게 맞물려 있었다.
그 모습을 확인한 위너드는 순간 저도 모르게 신음하듯 도시의 이름을 읊었다.
“……세베움.”
제아무리 오랜 세월이 지난다 해도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세베움은 바로 벨레드리안 제국의 수도이자 황궁이 있는 곳이었다.
“그렇다면 여기가…… 프레이아 호수라고?”
빠진 직후에는 경황이 없어 잘 몰랐는데, 이 호수의 풍경 역시 너무나도 눈에 익었다.
황태자 시절, 종종 이곳으로 와 활을 배웠기에 당연한 일이었다.
자신을 위해 황궁의 궁수들이 만들어 놓은 과녁이 어디쯤에 있는지, 눈 감고도 찾을 수 있을 정도다.
그러니까, 내가 지금 진짜로 벨레드리안 제국에 와 있다는 거지?
띵동!
「‘이 구역 주접킹’ 님이 위너드 님의 주식을 30만 주 구매합니다.
젖은 섹시한 남주는 어디 갔죠? 왜 제 눈엔 빛밖에 안 보이죠?」
주위를 살피는 그의 시선을 따라, 연신 주식이 팔리는 화면이 보란 듯 따라붙었다.
「‘일처다부제’ 님이 위너드 님의 주식을 30만 주 구매합니다.
드디어 네 명의 완전체 남주 버전을 볼 수 있는 건가! 빨리 우리 언니한테 가라. 가서 다 같이 꼭 붙어 있는 거야!」
……아니, 그럼 아델리움으로 보내 줬어야지.
황당한 것도 잠시.
“정말로…… 되돌아온 건가?”
위너드가 떨리는 목소리로 조용히 중얼거렸다.
희미한 여명 속에서 빛나는 호수의 풍경과 차갑게 얼어 있는 자신의 손을 몇 번이나 번갈아 들여다보며.
영롱하게 반짝이는 초록색 눈동자에 그 어느 때보다도 날카롭고 신중한 기색이 서렸다.
주주들 덕택에 되살아나다니. 그것도 한 번도 아닌, 두 번씩이나.
믿기 힘들지만 이건 분명히 꿈은 아니었다.
그는 지금 주주들이 무엇을 바라는지 잘 알고 있었다.
한시라도 빨리 로렐라를 만나러 가는 거겠지.
물론 자신도 그들만큼이나. 아니, 그 누구보다 로렐라를 향한 마음은 절실하고 애달프기 그지없었다.
눈을 감아도 손에 잡힐 듯 생생한 그녀의 얼굴.
살아났다는 기쁨보다, 지금 당장 그것을 어루만지고 싶어 견딜 수가 없다.
“하지만 그건…… 마지막으로 해야 할 일을 마친 뒤여야만 해.”
위너드는 마치 스스로를 달래듯 한 자 한 자 힘겹게 토해 냈다.
그라고 해서 왜 당장 로렐라에게 달려가고 싶지 않겠는가.
하지만 위너드는 있는 힘을 다해 그 마음을 참고 또 참았다.
로렐라가 자신의 힘으로 당당하고 근사한 주인공이 된 것처럼, 진정한 ‘남자 주인공’이 되려면 더더욱 제 손으로 그 일을 마무리 지어야만 했다.
“가짜 황제 노릇을 하고 있는 에르헨을 없애고, 내 자리를 찾겠다.”
위너드의 입에서 묵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다시 눈을 떠 여전히 주식이 팔리고 있는 화면과 그런 화면 뒤로 펼쳐진 세베움 성벽을 계속해서 번갈아 바라보기를 잠시.
그는 반짝반짝 빛나는 화면에 대고 진짜 대화라도 나누듯 다정히 속삭였다.
“그러니까 조금만 더 기다려 줘.”
그러고는 씨익 미소 지은 채 살짝 윙크했다.
띵동!
「‘이구역 주접킹’ 님이 위너드 님의 주식을 50만 주 구매합니다.
화면에 대고 웃는 거 유죄! 화면에 대고 윙크하는 건 종신형!」
「‘19금의 요정’ 님도 위너드 님의 주식을 50만 주 구매합니다.
제발…… 19금…… 존버는…… 승리한다…….」
예상대로의 반응이었다.
하지만 위너드는 어떻게 해야 자신의 주식이 보다 더 상한가를 칠 수 있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세베움으로 향하는 길을 따라 몇 발자국 걷다가, 일부러 그대로 우뚝 멈췄다.
“내가 할 일을 끝내고 나면…….”
그러고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다시금 화면을 향해 조용히 속삭였다.
“그 후에 전부 다 보여 주지.”
그런 위너드의 입가에 예의 그 능청스러운 미소가 가득 서려 있었다.
그 한마디를 끝으로 그는 다시금 수도를 향해 재빠르게, 그러나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게끔 은밀하게 달려 나갔다.
물론 방금 전 한마디에 주식 창이 폭주하듯 격렬한 반응이 일어난 건 말할 필요도 없었다.
* * *
화려한 은빛 대문과 그 앞에 놓인, 마치 곧 살아 움직일 것 같은 역동적인 말 조각상이 인상적인 대저택.
벨레드리안의 수도 세베움에서도 보기 드물게 커다란 이곳이 바로, 오랫동안 친황실파인 오르세스 후작의 저택이었다.
후작저에선 아침부터 외출 준비가 한창이었다.
오늘은 후작이 황실에 정기적으로 입궁하는 날이기 때문이었다.
하인들의 분주한 발걸음이 여러 차례 이어진 끝에 2층 드레스 룸 안쪽에서 한껏 차려입은 노신사가 걸어 나왔다.
그는 그대로 1층으로 내려와 곧바로 응접실로 향했다. 그곳에는 집사가 귀띔한 대로 한 청년이 앉아 있었다.
“이렇게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후작님.”
꼿꼿하게 앉아 있던 그는 후작을 보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나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건넸다.
‘가볍게’라고는 했지만, 남자의 태도는 흠 하나 잡을 수 없을 정도로 완벽했다.
후작은 인사를 받아야 한다는 것도 잊고, 그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자네가 바온 남작……인가?”
“그렇습니다, 후작님.”
싹싹하게 대답한 남자의 이마 위에서 부드러운 갈색 곱슬머리가 살랑였다. 그뿐만 아니라 한여름의 신록처럼 푸르른 녹색 눈동자는 절로 시선을 사로잡았다.
“여기 누님께서 보내신 소개장이 있습니다.”
후작은 말없이 소개장을 펼쳐 들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위너드는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대표적인 친황실파 오르세스 후작은, 위너드 황태자에게 오랫동안 경제학을 가르쳐 준 스승이자 그의 충성스러운 신하 중 한 명이었다.
지금은 비록 위너드를 조금도 알아보고 있지 못하지만 말이다.
아무튼 평생을 함께 지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후작의 입궁에 관해서는 당연히 훤히 꿰고 있었다.
오르세스 후작은 종종 지방의 전도유망한 귀족을 대동한 채 입궁하고는 했다.
바로 오래전 수도 생활을 접고, 한적한 지방으로 내려가 여생을 보내고 있는 누이의 부탁 때문이었다.
부모님 두 분은 오래전 돌아가시고, 결혼도 하지 않은 채 줄곧 독신으로 지내는 후작에게 이제 가족이라고는 누이 하나뿐이었다.
그렇기에 후작은 누이의 부탁을 좀처럼 거절하지 못했다.
따라서 입궁은커녕 수도에 입성할 기회조차 없는 지방 귀족들이 종종 후작의 누이를 찾아가서 부탁을 건넸다.
후작님의 일일 보좌가 되어 함께 입궁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말이다.
이렇게 해서 황제를 알현하고 짧게나마 인사를 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는 것 자체가 그 사람의 격을 한층 더 높여 주는 일이니까.
게다가 황실 사람들도 오르세스 후작이 데려오는 새로운 인재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퍽 즐기곤 했다.
황실의 두터운 신임을 받는 오르세스 후작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물론 후작의 누이 역시 아무나 마구잡이로 올려보내는 건 아니었다.
동생의 명성이나 평판에 금이 가지 않도록, 어느 정도 엄격한 기준을 통과한 자만을 엄선하여 보내곤 했다.
그렇다고 해도…….
‘지방 귀족으로 썩기엔 아까운 인물이군.’
지금까지 수많은 귀족을 만나본 오르세스 후작은, 눈앞의 이 미청년이 실로 범상치 않은 인물이라는 사실을 금세 알아차렸다.
상대를 압도하는 이 당당한 태도, 그리고 넘쳐흐르는 기품.
시골에서 올라온 남작이라기보단, 황실의 일원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완벽한 젊은이 아닌가.
후작은 저도 모르게 감탄사를 흘릴 뻔했다.
자신을 넋 놓고 바라보는 후작을 앞에 두고 위너드는 더욱더 상냥한, 그러나 능청스러운 미소를 잃지 않았다.
동시에 머릿속으로는 진짜 바온 남작을 떠올렸다.
지금쯤 숲속에서 깊은 잠에 빠져 있을 그를.
최대한 아프지 않도록 기절시키긴 했는데, 그래도 깨어나면 좀 힘들긴 할 것이다.
예전처럼 사람들의 기억을 조작한다거나, 손가락을 한 번 튕기는 것만으로도 모든 상황을 정리한다거나 하는 능력은 사라지고 없었다.
아마도 이젠 안내자가 아니기 때문에 그런 거겠지.
하지만 위너드가 각성했을 당시 생겨났던 붉은 오라는 여전했다.
게다가 그의 검술 능력 또한 어딘가로 사라지지 않았다.
그는 너무나 손쉽게 바온 남작 일행을 제압……. 아니, 잠재웠다.
그러고는 진짜 남작의 품 안에 있던 소개장을 빼 들고서 미리 수소문해 두었던 마차를 타고 후작저에 온 것이었다.
“……후작님?”
여전히 입을 살짝 벌린 채 저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후작을 위너드가 가볍게 불렀다.
“아. 그렇지.”
오르세스 후작은 그제야 정신이 든 듯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튼 잘 왔네.”
그러고는 위너드의 손을 꼭 잡은 채, 만면에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함께 황궁으로 가지. 자네 같은 인재를 보면 틀림없이 폐하도 좋아하실 걸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