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화. 너! 남주가 되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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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9화. 너! 남주가 되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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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9화. 너! 남주가 되어라!
2023.02.11.
어찌어찌 계좌를 여는 데까진 성공했다.
하지만 문제는 이다음이었다.
“흐음.”
로렐라는 화면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역시 단순히 계좌를 여는 것만으로는 코멘트를 남길 수가 없구나. 한 주라도 주식을 사야 하는 모양인데…….”
주식을 사려면 코인이 필요하다. 그건 어떻게 해야 가질 수 있지?
또 다른 난관에 부딪힌 로렐라는 입술을 만지작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물론 당장 쓸 수 있는 돈은 차고 넘칠 정도로 많았다. 하지만 그건 세실리카 제국에서 실제로 쓰이는 금화였다.
과연 이런 걸로도 시스템의 코인을 살 수가 있는 건가? 어떻게? 결제 방법 같은 게 분명 따로 있을 텐데…….
그렇게 한참을 끙끙대고 있을 때, 화면 건너편에 앉아 있던 세이블 릴리가 조용히 물었다.
“뭔가 문제가 있나요?”
그 말에 로렐라는 잠시 생각을 멈추고 세이블을 바라보았다.
그런 그녀의 머릿속에 문득 반짝이는 생각 하나가 스쳐 지나갔다.
“세이블, 잠깐 이리 와 볼래?”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옆자리를 탁탁 쳤다.
살짝 의구심 어린 눈길을 보내긴 했지만, 세이블은 이내 묵묵히 몸을 일으켜 로렐라가 시키는 대로 다가왔다.
이제 두 사람은 같은 방향을 볼 수 있게 되었다. 로렐라는 작은 목소리로 무언가를 중얼거리며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세이블 얼굴 위로 일순 환한 빛이 쏟아져 내렸다.
“아……!”
세이블이 작게 감탄사를 터트렸다.
“이제 보여?”
“네. 아주 잘 보여요.”
세이블이 로렐라의 창 위로 시선을 고정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그녀의 눈 위로 얼핏 그리움이 스쳐 지나가는 게 보였다.
아마도 그녀의 안내자였던 롯지를 떠올린 모양이었다.
로렐라가 주인공이 된 뒤로, 이제 자신의 임무는 끝났다며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고 했다지.
그 말을 하며 세이블의 손을 잡고 아이처럼 펑펑 울었다고 들었다.
직접 보았더라면 틀림없이 코끝이 찡했을 그 광경을 떠올린 것도 잠시.
로렐라는 속으로 가만히 혀를 내둘렀다.
‘정말 주인공이 되니까 뭐든지 다 되네.’
그녀만 볼 수 있었던 이 화면을, 세이블과 함께 보는 날이 올 줄이야.
주식을 두고 경쟁하던 시절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이제 뭘 어떻게 하시려는 거죠?”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로렐라를, 세이블이 옆에서 채근했다.
“아. 그게……. 주식을 사려면 코인이 필요한 것 같은데, 그걸 어떻게 해야 구할 수 있을까 고민하던 중이었어.”
그 말에 세이블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다시 한번 화면을 찬찬히 살폈다. 그러더니 곧 눈을 빛내며 오른쪽 옆을 가리켰다.
“여기 작은 막대기가 하나 있어요. 이걸 움직여 보면 어때요?”
“어?”
정말 그렇네!
여기 이런 곳에 스크롤바가!
코인에만 몰두하느라 미처 보지 못한 부분이었다. 게다가 화면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 때문에 무척이나 희미하기까지 했다.
“마우스가 없는데…… 호, 혹시 터치 패드인가?”
그렇게 말하며 마구 화면을 건드려 보았으나…….
로렐라의 손은 그저 허공을 휘저을 뿐이었다.
“……뭐 하시는 거예요?”
의아함과 황당함이 정확히 반반씩 섞여 있는 목소리로 세이블이 물었지만, 로렐라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 순간 시선을 따라 움직이는 작은 화살표가 생겨났기 때문이었다.
정말이지 의외로 엄청난 신기술이 아닐 수 없다.
로렐라는 감탄하며 화살표를 움직여 스크롤바를 꾸욱 눌렀다. 비로소 아래쪽의 화면을 줄줄이 띄워 낼 수 있었다.
“앗.”
마지막 페이지까지 전부 도달한 순간, 로렐라의 입에서도 감탄사가 터졌다.
맨 아래에 반짝거리는 선물 상자가 하나 놓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을 급히 누르자, 종소리와 함께 작고 하얀 또 다른 창이 화면 위로 떴다.
「무료 코인 10개를 선물 받았습니다.
유효 기간 : 오늘 자정까지.」
“이걸로 주식을 사면 되겠구나!”
로렐라는 반색하며 얼른 창을 껐다. 그러고는 제일 위에 고정된 자신의 계좌로 돌아가, 주식 구매 버튼을 눌렀다.
「주인공 로렐라 메이레드 님의 주식을 구매하시겠습니까?
1. 예.
2. 아니요.」
난생처음으로 주식을, 그것도 본인의 주식을 사려니 어쩐지 조금 쑥스러웠다.
“……네.”
조그맣게 소리 내어 대답하자 연이어 몇 주를 구매하겠냐는 문구가 떠올랐다.
“……1주.”
소중하게 얻은 10개의 코인을 막 쓸 수는 없으니 일단 1개만 써 볼 생각이었다.
그러자 로렐라의 창이 눈부시게 빛났다.
띵동!
「‘내 남주는 내가 정한다’ 님이 처음으로 로렐라 메이레드 님의 주식을 1주 구매하셨습니다.」
늘 보아 왔던 익숙한 문구가 나타났다.
그리고 그 아래로 보이는, ‘내 남주는 내가 정한다’라는 닉네임 옆으로 생겨난 길고 네모난 빈칸.
“바로 이거다……!”
빈칸을 누르자마자 하단에 글자들이 나열된 작은 자판이 하나 생겨났다.
또다시 세이블이 두 눈을 동그랗게 떴지만, 로렐라에게는 더없이 익숙한 것이었다.
그녀는 심호흡하며 정신을 집중했다. 그러고는 전생의 기억을 있는 대로 전부 끌어 모아 신중하게 코멘트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내 남주는 내가 정한다’ : 혹시 선발대 계신가요? 이거 달릴 만한가요?」
거기까지 쓰고,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주주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저를 보고 있을지 모른다. 그들이 과연 생각대로 움직여 줄까?
무슨 코멘트를 쓰든 간에, ‘주인공’이 여기서 무언가를 하고 있다며 그저 재미있어하는 건 아닐까?
그게 아니더라도 시스템이 혹시 그녀의 계획을 눈치채고는, 다시 방해하는 건 아닐까?
머릿속으로 수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지금은 달리 더 좋은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다.
로렐라는 두 눈을 질끈 감은 채 즉시 작성한 코멘트를 보냈다.
“좋아, 이젠 기다리는 수밖에 없…….”
여전히 밝게 빛나는 화면과는 달리, 자꾸만 어둡게 가라앉으려 하는 마음을 애써 진정시키며 중얼거리던 때였다.
띵동!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청아한 종소리가 들려왔다.
「‘이 구역 주접킹’ 님이 답글을 다셨습니다.」
“봤다……!”
이렇게나 빨리!
기대와 설렘으로 두근거리는 마음을 안은 채 얼른 화면 위로 눈을 고정했다.
그런데…….
「선발대입니다. 솔직히 전 완전 비추 해요…….」
“어?”
냉정하다 못해 찬바람이 부는 답글에 당황한 것도 잠시.
띵동!
「……왜냐하면 아직 완결이 안 났거든요! 완결 나면 달리십쇼!! 우리언니(于里言尼) 개간지나(槪幹支拿) 하고풍거(河鼓風去) 삭다해라(削多海蘿)!」
아, 깜짝이야…….
로렐라는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이 주주의 닉네임이 주접킹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상기했다.
그러고는 즉시 그 아래 글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띵동!
「‘내 남주는 내가 정한다’ 님이 대댓글을 다셨습니다.
최근 거 보고 왔는데, 완결 난 것 같은데요? 그래서 남주가 대체 누구죠?」
「‘이 구역의 주접킹’ 님도 대댓글을 다셨습니다.
완결이라니, 완결이라니! 이 무슨 지구가 반으로 접히는 충격적인 소린가요?! 한 마리 요오망한 갈색 사슴 같은 울 남주가 아직 안 나왔는데?! 위너드 아주 그냥 내 마음을 녹용★」
다른 주주들도 하나둘씩 속속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띵동!
「‘은발적안에 목숨 건 사람’ 님도 대댓글을 다셨습니다.
남주는 우리 카셀! 앙큼상큼 아기 고영이ㅠㅠ! 은발이 나라를 구한다ㅠㅠㅠㅠ!」
「‘19금의 요정’ 님도 대댓글을 다셨습니다.
아니죠, 위너드죠. 19금 버전 무조건 존버합니다.」
「‘일처다부제’ 님도 대댓글을 다셨습니다.
아, 그냥 네 명 다 같이 살자니까요! 그나저나 위너드 진짜 어디 갔음?! 난 무슨 일이 있더라도 꼭 이 네 명의 완전체를 봐야겠어!」
수십 개의 종탑이 일제히 종을 쳐 대는 것처럼 시끄러운 소리가 멈추지 않고 울려 퍼졌다.
화면 위에도 쉴 새 없이 반짝거리는 불빛이 흘렀다.
“세상에…….”
세이블은 또한 눈도 깜빡이지 않고 화면을 바라보며 연신 감탄을 흘렸다.
하지만 이거야말로 로렐라가 바라던 상황이었다.
로렐라는 타이밍을 놓치지 않고 여기저기 재빠르게 대댓글을 달기 시작했다.
남주 없이 완결 나는 용두사망은 보고 싶지 않다며 일부러 삐딱한 시선을 유지했다.
뒤에 더 나올 거라고 기대하는 주주에게는, ‘시스템이 이대로 폭락한 장을 접어 버리면 절벽 엔딩이 될 수밖에 없다’며 비관적인 댓글을 달아 주었다.
일부러 아무것도 모르는 척 ‘지금 초반부를 보고 있는데, 아무래도 펠리어트가 남주가 될 것 같다’는 댓글을 남기기도 했다.
그 댓글에 ‘그 새끼 남주 아니죠’가 광분하여 길길이 뛴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로렐라가 피워 낸 작은 불씨에, 주주들은 점점 동요하기 시작했다.
사라진 남주를 찾는 분노 어린 댓글들이 들불처럼 번져나갔다. 머리가 아파 올 정도로 요란한 종소리가 쉬지 않고 울려 댔다.
여기저기서 뜨거운 토론과 싸움의 장이 펼쳐졌다. 귀가 다 아플 정도로 수많은 댓글이 이어지고, 또 이어졌다.
벌집을 들쑤신 듯한 난장판이었지만, 로렐라의 입가에 띤 미소는 점점 더 짙어지기만 했다.
* * *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깊고 깊은 어둠 속. 한 남자가 몸을 웅크린 채로 가만히 떠 있었다.
아니, 사실은 떠 있는 게 아니라 이대로 가라앉는 걸지도.
그는 눈앞에서 손을 쫙 폈다가, 가만히 접기를 반복했다.
하지만 아무것도 보이질 않았다.
사방이 너무나 새카만 나머지 눈을 떠도 감은 것과 차이가 없다. 이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 갇힌 뒤 대체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조차 불분명했다.
팔을 스르륵 떨군 위너드는 그대로 힘겨운 숨을 토해 냈다.
징계를 받긴 했어도 아직…… 살아 있는 건가.
그렇다면 차라리 이대로 죽여 달라고 비는 게 낫지 않을까.
숨을 쉬고는 있지만, 물에 빠져 서서히 죽어 가는 것처럼 괴로웠다.
견딜 수 없는 뜨거움과 또 몸서리쳐질 정도의 한기가 동시에 느껴졌다.
그러나 그의 마음속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두 눈 속에는 오로지 아름답게 물결치는 붉은 머리만이 가득했다.
마지막으로 보았던 눈물과 절망으로 가득 얼룩져 있던 얼굴도.
두 번 다시는 볼 수 없을 그녀의 표정이 웃는 것이 아니라 울고 있었다는 게 그저 너무나도 아쉽고 가슴 아팠다.
하지만 위너드는…… 후회하지 않았다.
억울하지도, 분노하지도 않았다.
그저 죽을 만큼 애달플 따름이었다.
두 번 다시는 로렐라를 볼 수 없다는 게.
보드라운 뺨과, 옅은 장밋빛이 감도는 따듯한 입술을 더 이상 느낄 수 없다는 게.
생각은 돌고 돌아 또 마지막 장면으로 향했다.
그녀를 구하고 소멸될 때, 그의 눈앞에 펼쳐진 또 다른 자들의 분노가.
「아오씨, 저 병신 XX! 기껏 살려 줬더니 또 저렇게 죽어 버린다고?! 내 주식 돌려 내 이 망할 XX야!」
「난 분명 말했음. 주인공이 연애하면 노답이라고. 이제 하차함 ㅂㅂ.」
「아…… 안타깝다, 진짜. 멋지게 복수했음 했는데. 진심으로 응원했었음.」
그에게 마지막까지 기대를 걸었던 이들에게 아무래도 크나큰 실망감을 안겨 준 게 분명했다.
하지만 이제 와서 뭐 어쩌겠는가.
그 순간으로 다시 돌아간다 하더라도, 자신은 똑같은 선택을 할 텐데.
게다가 사랑하는 여자를 구한 뒤, 장렬한 최후를 맞이하는 것도 충분히 주인공답지 않나?
위너드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그녀의 이름을 소리 내어 불렀다.
“……로렐라.”
그 순간, 위너드의 굳어 있던 입술이 아주 미세하게 들려 올라갔다.
지나치게 조용해서 너무나도 크게 울리는 그 소리가 그의 심장을 아프도록 때린 그때였다.
띵동!
갑자기 종소리와 함께 눈부시게 밝은 빛이 눈앞을 가르듯 퍼져 나갔다.
“……윽!”
어둠에 익숙해진 탓에 눈이 부서질 것만 같았다. 위너드는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재빨리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19금의 요정’ 님이 위너드 님의 주식 계좌를 엽니다.
처음으로 10만 주가 판매되었습니다.
외전이 없다니?! 외전 내놔, 외전! 빨리 19금 외저어어어어언!」
「‘그 새끼 남주 아니죠’ 님이 위너드 님의 주식을 10만 주 구매합니다.
내 눈에 흙이 들어가도 펠리어트 새끼가 남주되는 꼴은 못 본다. 너! 빨리 남주가 되어라!」
「‘이 구역 주접킹’ 님이 위너드 님의 주식을 20만 주 구매합니다. 신기록입니다!
우리 언니가 위너드랑 행복해지는 거 보고 싶은 사람 손들어! 했더니 지구가 성게 모양이 되었습니다.」
계속해서 종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위너드는 눈을 가린 손 틈새로 흘러들어오는 빛에 익숙해지기 위해 여전히 안간힘을 써야 했다.
덕분에 로렐라를 응원했던 주주들이 앞다투어 자신의 주식을 사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위너드가 알게 된 건, 그로부터 한참 뒤의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