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8화. 내 남주는 내가 정한다 (168/173)


168화. 내 남주는 내가 정한다
2023.02.08.



 
족히 백 명은 들어가고도 남을 커다란 방은, 입구부터 휘황찬란한 금빛 실크로 된 휘장과 진주와 수정으로 장식된 고풍스러운 붉은색 벨벳 커튼이 압도적인 느낌을 주었다.

벨레드리안 황궁 내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장소로 손꼽히는 대알현실이었다.

화려한 장신구가 가득 들어찬 장식장과 금으로 만든 거대한 조각품 등, 어느 하나 아름답지 않은 물건이 없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벽면을 가득 메운 선대 황제들의 초상화였다.

보기만 해도 어깨가 굳고, 두 손을 공손히 모으게 되는 이 위엄 넘치는 그림들 가장 마지막에는, 짙은 청색을 띠는 머리카락과 옅은 잿빛 눈동자를 지닌 에르헨의 얼굴이 걸려 있었다.

갈색 곱슬머리와 에메랄드처럼 빛나는 녹색 눈동자를 지닌 누군가가 아니라.

에르헨은 바쁜 와중에도 수시로 대알현실을 찾아와 사색에 잠길 정도로 이곳을 좋아했다.

그건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산처럼 쌓인 각종 서류와 분 단위로 바쁘게 돌아가는 일정을 모두 미뤄 둔 채로, 그는 상석에 마련된 왕좌에 앉아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흐…….”

어느덧 꾹 다물린 입술을 비집고 들릴 듯 말 듯 가느다란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동시에 화려한 보랏빛 망토를 두른 어깨가 격렬하게 들썩였다.

얼마 전 그에게 모든 것을 빠짐없이 보고하던 자들의 이야기가 생생했다.

에르헨은 샬로네즈 왕녀에게 붙인 수하 외에도 자신만을 위해 은밀하게 움직이는 그림자들을 고원으로 보냈다.


‘그자가 왕녀의 심장을 꿰뚫자마자 갑자기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 덕분에 모든 것을 알게 되었다. 샬로네즈 왕녀와 로렐라 메이레드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리고 위너드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결국 샬로네즈는 실패했군.”

고작 그런 여자의 손에 목숨을 잃다니, 우습기 짝이 없었다. 에르헨이 짧게 혀를 찼다.

하지만 샬로네즈의 죽음 따위엔 아무런 관심도 없었다. 그에게 중요한 건 딱 하나뿐이었다.

혹시 로렐라 메이레드가 위너드 황태자를 다시 살려 내진 않을까?

여태껏 수도 없이 곱씹은 생각을 다시 떠올리고, 에르헨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규칙은 누구도 건드릴 수 없지. 나 역시 그랬으니까.”

그는 눈앞에 뜬, 밝은 빛을 내는 창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래, 그렇다는 건…….”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린 것도 잠시.


“이제야 정말로 끝이 났구나……!”

후련하게 외치는 목소리와 함께 커다란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흐하하핫!”

환희와 기쁨, 그리고 어딘가 모르게 안도가 배어 있는 웃음이 텅 빈 알현실 구석구석까지 메아리쳤다.

에르헨은 얼굴이 붉게 변할 정도로 계속해서 웃음을 참지 못했다.

그렇게 한참을 소리 내어 웃던 그가 갑자기 표정을 굳히고는 손으로 얼굴을 쓸었다.


“정말이지 변함없이 바보 같으시군요, 전하.”

그러고는 비통하다는 듯 이마를 감싸 쥔 채 중얼거렸다.


“또다시 그리 허무하게…… 목숨을 잃으시다니.”

하지만 목소리에는 숨길 수 없는 조소가 잔뜩 묻어 있었다.

에르헨은 미동도 없이 가만히 앉아 한동안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이윽고 그가 천천히 손을 내렸다.


“그러니까 당신이…….”

사납고 날카롭게 번뜩이는 눈빛이 드러났다.


“……이 자리에 앉지 못하는 거겠지.”

음산한 목소리와는 어울리지 않게 그의 입술 끝은 아주 매끄럽게 위로 말려 올라갔다.

에르헨은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서 아치형의 창문 쪽으로 다가갔다. 티끌 하나 보이지 않도록 잘 닦인 창문 너머로 드넓은 정원이 펼쳐져 있었다.

그 광경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다시금 상념에 잠겼다.

예전에는 자신에게 열광하던 주주들이 나름대로 존재했던 것 같은데. 이제는 그것이 먼 꿈처럼 느껴졌다.


“로렐라 메이레드가 또 다른 세계의 주인공이 되었다라…….”

에르헨의 입가에 또다시 비릿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녀가 주인공이 되었다는 걸 알게 된 건, 시스템이 띄운 메시지 덕분이었다.

로렐라 메이레드가 샬로네즈를 처치했다는 걸 알게 된 후, 에르헨은 로렐라를 어떻게든 처리할 생각이었다.

비록 위너드 황태자가 사라지긴 했지만, 그와 오랫동안 접점이 있었던 로렐라가 영 탐탁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에르헨은 그녀에게 멋대로 손을 댈 수가 없었다. 그를 저지한 건 다름 아닌 시스템이었다.

「죄송합니다, 에르헨 님. 로렐라 님은 이미 다른 세계의 주인공이십니다. 따라서 개입할 수 없습니다.」

그때 나타난 메시지가 지금도 그의 눈앞에 고스란히 떠 있었다. 에르헨의 입술이 가볍게 비틀렸다.

설령 능력으로는 다른 세계 주인공에게 개입할 수 없어도, 만약 그가 가진 모든 것을 이용해 처리하고자 마음먹는다면 얼마든지 그렇게 할 수 있으리라.

예를 들어 암살자들을 보낸다거나, 그도 아니면 벨레드리안의 군사를 이용해 세실리카 제국으로 쳐들어간다거나.

하지만 고작 로렐라 메이레드 한 명을 없애자고 그렇게까지 하는 건 그에게도 큰 부담이었다.

게다가 그녀는 어찌 됐든 이미 주인공이 된 사람이다. 에르헨이 주인공이 된 순간 위너드 황태자와 똑같은 힘을 갖게 해 달라고 빌었던 것처럼, 그녀도 무슨 능력을 지녔을지 모른다.


“……그래도 내게 대적할 순 없을 거다.”

소리 내어 이렇게 중얼거리자 그의 손에서 붉은색 빛이 일렁였다.

위너드 황태자의 가슴에 칼을 꽂은 직후, 그처럼 되게 해 달라 빌었던 그 순간 주어진 힘이었다.

반면 로렐라 메이레드는 여전히 부상으로 꼼짝도 못 하고 있다고 들었다.

……과연 내가 굳이 나설 필요가 있을까?

어차피 위너드는 두 번 다시 돌아오지 못할 텐데.

그가 촉각을 곤두세운 건 언제나 위너드 황태자에 관한 일뿐이었다. 그 외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었다.

에르헨은 꽉 쥐고 있던 주먹을 천천히 펴고는 여유롭게 뒷짐을 지었다. 그의 입에서 한결 차분해진 숨이 길게 흘러나왔다.

그의 눈 아래 바로 내려다보이는, 여름이면 언제나 반짝이는 초록빛 잎사귀를 뽐내던 플라타너스에도 온통 말라비틀어진 낙엽만 가득했다.

그 황량한 모습이 어쩐지 마음에 쏙 들어, 에르헨은 더욱 기꺼운 웃음을 지어 보였다.

* * *

로렐라의 부상은 하루가 다르게 빨리 회복되었다.

여전히 붕대를 감고 있긴 했지만, 이제는 스스로 몸을 일으켜 앉을 수 있을 정도였다.

덕분에 하녀들은 수시로 눈에 불을 켜고 로렐라를 교대로 감시하며 살폈다. 아직 안정을 취해야 하는데 어쩐지 아가씨는 그럴 것 같지 않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하녀들의 우려와는 달리 로렐라는 무척이나 얌전했다.

하루가 멀다고 병문안을 오는 레어넌 기사단장과 펠리어트 공작, 그리고 세이블 릴리를 만날 때를 제외한 대부분은 침대에 우두커니 걸터앉아 계속해서 허공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골똘히 생각에 잠기는 게 전부였다.

마치 큰 고민이라도 있는 사람처럼.


“……그럼 또 찾아뵙겠습니다.”

오늘도 레어넌은 붉은 장미를 한 아름 들고 그녀를 찾았다.

하지만 그는 필요 이상으로 오래 머무르는 법이 없었다. 차를 대접해 드리겠다며 저택의 고용인들이 제아무리 잡아도 환자에게 부담을 줄 순 없다며 금세 일어서곤 했다.


“부디 푹 쉬십시오.”

레어넌은 그녀의 얼굴을 다시 한번 찬찬히 살폈다. 그리고 맑은 눈을 들여다보고 나서야 비로소 만족했다는 듯이 미소 지었다.

그는 절대로 배웅하러 나오지 말라는 신신당부까지 남기고 떠났다.

띵동!

레어넌이 나가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주식 창이 떴다.

띵동!

「‘이 구역 주접킹’ 님이 눈물로 한강을 만들며 주식 50만 주를 구매합니다.」

「술 한 잔 마셨습니다. 우리 단장님이 남주가 되지 않아도 좋습니다. 하지만…… 이것 하나만 기억해 주세요. 그 무엇보다 울 언니가 잘됐으면 좋겠습니다. 진심을 다해 전합니다. 그저 영앤뷰티풀리치앤섹시한 로렐라 언니가 우리 여우 같은 위너드와 토끼 같은 아들딸 낳고 행복하게 살길 바랍니다.」

「‘일처다부제’ 님이 난동을 부리며 주식 100만 주를 구매합니다.」

「나는 꼭 울 언니가 네 명과 같이 사는 걸 봐야겠어! 그러니까 빨리 네 명 다 데려오란 말이야! 우리 위너드! 위너드 어디 갔어! 흑막 남사친 스타일 남주는 어디로 갔냐고오오오오!」

「‘저 새끼 남주 아니죠’ 님이 주식 30만 주를 구매합니다.」

「누가 남주가 되든 난 다 괜춘함. 펠리어트 새끼만 아니면 됨ㅋ.」

「‘19금의 요정’ 님이 주식 30만 주를 구매합니다.」

「남주는 위너드지! 위너드 무조건 데려와야 함. 내가 얼마나 기대했는데 아침짹이라니……. 띠밤 다시 생각해도 개짜증 나! 난 위너드랑 뜨밤 볼 때까지 절대 포기 못 함ㅠㅠ 여기서 캐시 들고 천년만년 기다릴 거임!! 싸우자 초록창아!!!!!」

주인공이 결정되었는데도 주주들은 여전히 매일같이 찾아와 열심히 로렐라의 주식을 샀다.

그뿐만 아니라 서로의 욕망이 난무하는 과격한 메시지도 변함없었다.

조이가 들어와 붕대를 갈아 주고, 주위를 다시 한번 정리해 주는 동안에도 로렐라의 시선은 줄곧 시스템 창을 떠나질 않았다.


“어떻게…… 어떻게 하면 살릴 수 있을까?”

“네……?”

“…….”

“아가씨……. 괜찮으세요?”

조이는 로렐라의 눈치를 살피다 조용히 물었다.


“거기 허공에 뭐라도…… 있나요?”

하지만 돌아온 것은 침묵뿐이었다.

어쩐지 오싹해진 조이는 파리한 얼굴을 몇 차례 쓸고는 조용히 문을 닫고 나섰다.

일 층으로 내려가자, 마침 현관문이 벌컥 열리며 집사가 나타났다.


“세이블 릴리 님께서 오셨어.”

“어서 오세요, 세이블 아가씨!”

그 말에 조이는 반색하며 세이블의 곁으로 달려갔다.

홀로 중얼거리며 허공만 뚫어져라 응시하던 로렐라의 모습이 좀처럼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조이는 그게 부상의 후유증은 아닐까 싶어 너무나도 걱정되었다. 그래서 보다 많은 손님이 찾아와 주고, 아가씨와 이야기를 나눠 줬으면 싶었다.


“로렐라 아가씨를 보러 오신 거죠? 바로 침실로 안내해 드릴게요. 늘 드시던 차도 준비해 올리겠습니다.”

“고마워요. 항상 이렇게 폐를 끼쳐 미안해요.”

세이블은 언제나 그렇듯 깍듯하고 정중한 자세로 조이에게 짧게 인사를 건넸다.


“아녜요. 폐는요……!”

조이는 재빨리 손을 휘저어 보이고는 얼른 세이블을 로렐라의 침실까지 안내했다.

문밖에서 몇 차례나 노크한 끝에 겨우 안쪽에서 대답이 들려왔다. 뒤늦게 노크 소리를 들은 게 분명했다.

문이 열리고, 세이블이 안쪽으로 사뿐히 들어섰다.


“로렐라 님, 몸은 좀 어떠신…….”

그러고는 침대에 앉아 있는 로렐라를 향해 가볍게 인사하며 안부를 묻던 그때였다.


“그래! 그들이라면 위너드를 살릴 수 있지 않을까?!”

“……네?”

갑자기 터져 나온 뜬금없는 소리에 세이블은 영문 모를 얼굴로 로렐라를 바라보았다.


“분명 예전에도 그랬어.”

로렐라는 세이블의 눈을 바라보며 힘주어 외쳤다.


“주주들의 지지를 받아 다시 살아날 수 있었다고 말이야!”

다른 사람이 들으면 미친 소리라고만 여겼겠지만, 세이블은 아니었다.

세이블은 얼른 고개를 뒤로 돌려 방문이 닫힌 걸 확인하고는, 급히 로렐라의 곁으로 다가갔다.


“로렐라 님.”

그녀는 혼란스러움은 잠시 접어 두고는, 차분하고 진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로렐라가 깨어난 뒤, 둘은 이미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덕분에 세이블은 몰랐던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그녀의 안내자였던 위너드가 어떻게 되었는지, 그가 그녀에게 어떤 의미인지 모두.


“주인공이어도 시스템의 규칙에는 개입할 수 없다고 했어. 하지만 시스템조차 꼼짝 못 하게 만드는 이들이 있다는 걸…… 내가 왜 생각하지 못했을까?!”

물론 그렇다곤 해도 로렐라가 하는 모든 말을 다 이해할 순 없었다.

하지만 세이블은 로렐라처럼 ‘주인공 후보’였던 사람이다.

로렐라의 이야기에 누구보다 공감할 수 있고, 또 도움이 되는 조언을 줄 수 있는 사람은 오로지 세이블뿐이었다.


“절대자에 가까운 시스템보다…… 더 막강한 힘을 지닌 자가 있단 말인가요?”

“그래, 우리 주식을 사 주는 주주들 말이야.”

로렐라의 두 눈은 마치 태양이 타오르듯 붉게 반짝거렸다.


“예전에 누가 ‘코인을 몰빵’ 해서 주식을 샀다고 했어. 그 ‘코인’은 대체 어디로 가는 걸까? 과연 누가 갖는 걸까?”

그 말에 세이블의 눈빛 또한 변했다.


“시스템은 규칙을 만들고, 안내자를 배정해 주며, 관리까지 해 주지. 심지어 주인공의 소원이 뭐든 들어줘. 그런 게 모두 무료 봉사일까? 그저 단순한 도락을 즐기기 위해?”

“그럴 리 없겠죠.”

세이블은 차분히 고개를 저었다.

시스템은 ‘주식을 많이 팔지 못한 자는 소멸된다’라는 잔혹한 페널티까지 붙여 가며 치열한 경쟁을 유도했었다.

이런 것들은 따지고 보면 결국 어떻게든 주식을, 아니, 코인을 많이 벌어들이기 위한 수단임에 분명했다.


“시스템은 우릴 이용해서 주주들을 끌어모았지. 그들로 인해 코인을 벌어들였고. 하지만 만약 돈을 써 주는 주주들의 불만이 하늘을 찌르면 어떻게 될까? 그러다 실망해서 시스템을 떠나기라도 하는 날에는?”

“…….”

“망하기 일보 직전인데, 그때도 과연 규칙이고 나발이고 따질 수 있을까?”

세이블은 마치 강력한 풀로 붙인 것처럼 입술을 떼지 못했다.

로렐라는 크게 심호흡하고는, 세이블의 얼굴이 뒤에 비치는 화면 위를 가만히 노려보았다.

로맨스를 보고자 모여든 주주들이 무얼 바라는지는, 너무나도 명확했다.

주인공이 사랑하는 연인과 맺어지는 해피 엔딩.

로렐라는 비록 주인공이 되긴 했지만, 아직 해피 엔딩을 맞이했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따라서 다들 응원해 주고는 있지만 내심 불만이 클 거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만약 그 불만을 키워 시스템에게 화살을 돌릴 수만 있다면, 그렇게 해서 시스템에 온갖 항의가 쏟아지게끔 만들 수만 있다면.


‘……충분히 승산이 있어.’

예전에도 실패한 주인공이었던 위너드를 주주가 한 차례 살려 낸 경우가 있었으니까.

시스템이 그것조차 불허했다면, 그는 안내자로서 다시 나타날 수 없었겠지.

그 역시도 시스템보다 주주들이 우위에 서 있단 증거였다.


“주주들의 불만을 키워야 해. 하지만 그러려면 어떻게든 쌍방으로 소통해야 할 텐데…….”

하지만 로렐라는 그저 화면을 통해 그들의 이야기를 지켜보는 게 고작이었다.

또다시 고민에 빠지려던 찰나.


“메시지.”

“그래, 하다못해 메시지라도 서로 주고받을 수 있으면…… 응?”

저도 모르게 세이블의 말을 받아 중얼거리던 로렐라가 고개를 들었다.


“로렐라 님이 주주가 되면 메시지를 보낼 수 있지 않을까요? 그 정도면 그들과 소통하기에 충분하죠.”

로렐라는 순간 주먹을 꼭 쥐었다.

확실히 일리 있는 이야기였다.

‘그 새끼 남주 아니죠’와 ‘후회남 처돌이’가 서로 키배 뜨다가 경고까지 먹어 한동안 활동을 정지당한 일이 있지 않았는가.

이런 싸움도 어찌 되었든 소통할 수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리라.


“내가 주주가 될 수만 있으면…….”

“주식을 사면 누구든 주주가 될 수 있죠. ‘주인공은 주식을 살 수 없다’라는 규칙이 있는 게 아닌 이상, 가능하다고 봐요.”

딱히 고저가 느껴지지 않는 세이블의 차분한 목소리 덕분일까. 로렐라의 마음속에 한 줄기 빛이 차오르는 듯했다.

로렐라는 시스템 창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크게 심호흡한 뒤, 천천히 입술을 뗐다.


“……로렐라 메이레드의 주식 계좌를 열고 싶어.”

그녀는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다시 한번 명령했다.


“내 주식을 사게 해 줘.”

띵동!

경쾌한 종소리가 울려 퍼진 동시에, 화면 위에서 시스템에서 눈 부신 빛의 물결이 일어났다.

「‘로렐라 메이레드’ 님의 주식을 사시겠습니까?

1. 예.

2. 아니요.」

된다!

정말로 계좌가 열렸어!

로렐라는 흥분을 억누르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즉답했다.


“네.”

그러자 또다시 기다렸다는 듯 메시지가 떠올랐다.

「초록창의 주식 세상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로그인 정보를 위해 사용하실 닉네임을 정해 주십시오.」

이내 아래쪽 빈칸에, 깜빡거리는 작고 네모난 도형이 생겨났다.

로렐라는 입꼬리를 매끄럽게 끌어 올리며, 망설임 없이 선포라도 하듯 말했다.


“내 남주는 내가 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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