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7화. 그대가 곧 나의 정의입니다 (167/173)


167화. 그대가 곧 나의 정의입니다
2023.02.04.


흐린 하늘 위로 계속해서 잿빛 구름이 몰려들었다.

여전히 해가 떠 있을 시간이었지만, 사방은 곧 밤이 찾아올 것처럼 어두웠다.

사납게 몰아치는 바람 속에 눅눅하고 습한 기운이 조금씩 섞이기 시작하더니, 이내 하늘에서 눈이 펑펑 쏟아지기 시작했다.

이곳에서는 보기 드문 기후였다.

거친 흙과 자갈뿐인 땅과 여기저기 말라붙은 덤불, 그리고 새까맣게 죽은 고목 등이 금세 새하얀 눈으로 뒤덮인 광경이 마치 다른 세계에라도 온 것처럼 이질적이었다.

소름이 끼칠 정도로 고독하고 무거운 적막 속. 들리는 것이라고는 그저 사락사락 눈이 쌓이는 소리밖에 없었다.

그 정적을 뚫고 묵직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다소 거친 호흡을 이어 가는 남자의 입에서 하얀 김이 새어 나왔다.

흔들림 없이 굳건한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곧게 편 등 뒤에서 아름다운 금발이 하늘거렸다.

레어넌 베르하르트는 정신을 차리자마자 기사단원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로렐라를 찾아 나섰다.

앞서 수색을 시작한 펠리어트와 어쩐지 수상해 보이는 로렐라의 호위들이 전투에 휘말린 걸 목격하긴 했지만, 그쪽에는 조금도 신경을 쓰지 않았다.

평생 제 모든 마음을 바치리라 다짐한 그녀를, 자신의 목숨을 구해 준 로렐라를 반드시 찾아야 했다.

레어넌의 머릿속에는 오로지 그 생각뿐이었다.

땅 위엔 이미 그 무엇도 제대로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하얀 눈이 내려앉은 상태였지만, 레어넌은 어느 때보다 날카롭게 정신을 집중해 남은 흔적을 쫓았다.

고원이 내려다보이는 가파른 언덕 위를 얼마쯤 올라갔을까.

저 멀리 바닥에 쓰러져 있는 두 사람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레어넌은 나는 듯이 달려가 얼른 로렐라를 안아 들었다. 파리한 입술과 창백한 얼굴, 심지어 몸은 차갑게 얼어 있기까지 했다.

다행스럽게도 미약하게나마 작은 숨결이 느껴졌다.


“하아…….”

레어넌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얼른 망토를 벗어 로렐라를 감쌌다.

차갑게 빛나는 새파란 눈동자가 이내 땅바닥에 누워 있는 또 다른 사람에게 닿았다.

연한 백금발에 아담한 체형, 그리고 온몸에 착용한 값비싼 장신구들까지.

가슴에 칼을 꽂은 채 두 눈을 부릅뜨고 누워 있는 사람은 아델리움의 샬로네즈 왕녀가 틀림없었다.

레어넌은 평소보다 싸늘한 눈으로 죽은 왕녀를 잠시 내려다보았다.

그러고는 로렐라의 몸을 다시 한번 품에 단단히 받쳐 안고는, 한쪽 팔을 뻗어 왕녀의 몸에 꽂힌 검을 뽑아 들었다.

그는 검을 로렐라가 허리에 찬, 비어 있는 검집에 집어넣은 후, 그대로 몸을 돌려 언덕을 바삐 내려갔다.

* * *

늦은 오후부터 펑펑 쏟아지던 눈은 자정이 지나서야 겨우 멈췄다.

쾌청한 밤하늘에 뜬 커다란 만월이 온통 새하얀 비단으로 뒤덮인 것 같은 대지를 비췄다.

눈이 시리도록 새하얀 빛이 사방에 내려앉은 쓸쓸한 땅에는 또다시 쥐새끼 한 마리 찾아볼 수 없는 적막감만이 감돌았다.

그 정적 속에서, 길고 수상한 그림자 두 개가 언덕 경사로를 따라 꾸물대며 나타났다.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한참 동안 언덕을 오르던 그림자들은, 이내 눈에 뒤덮인 한 구의 시체 앞에서 멈췄다.


“어이, 찾았다! 이거야.”

용케 시체를 찾아낸 남자가 재빨리 고개를 뒤로 돌려 동료를 불렀다.


“쯧, 자칫하면 바윈 줄 알고 지나칠 뻔했어.”

“어서 시작하자고.”

낯선 사내 둘은 서로 시선을 주고받고는 얼른 등에 짊어진 곡괭이를 꺼내 들었다.

꽤 능숙하게 땅을 파내는 그들은 껄렁한 말투와는 달리, 꽤 사나운 눈빛을 지니고 있었다.

게다가 허름한 옷차림과 건들거리는 행동에서 질이 좋지 않다는 느낌이 물씬 풍겼다.

그들은 고원 근처를 어슬렁거리며 도적질로 생계를 이어 가는 자들이었다.


“염병할. 더럽게 힘드네.”

“하필이면 이렇게 추운 때 시신을 묻으라니. 빌어먹을……. 수고비를 더 받았어야 했는데.”

계속해서 곡괭이와 삽질을 해대는 사내들의 입에서 끊이지 않고 욕설이 새어 나왔다.

아닌 게 아니라 단단하게 얼어붙은 땅을 파내는 건 건장한 성인 남성 둘이 하기에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쉴 새 없이 몸을 움직이느라 추위를 느끼기는커녕, 너무 더워서 사내들의 얼굴까지 벌겋게 달아올랐다. 땀으로 젖은 어깨에서는 허연 김이 펄펄 솟았다.


“끙!”

한참이 지나서야 그들은 앓는 소리를 내며 비로소 허리를 폈다. 그러고는 시신을 그대로 구덩이 안으로 밀어 넣었다.


“이쪽은 내가 맡을 테니, 넌 저 반대편 쪽의 흙을 덮어. 빨리 마무리하고 뜨자고.”

그렇게 말하며 사내 한 명이 삽으로 흙을 푹 뜨던 때였다.


“야, 잠깐.”

죽은 여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남자가 갑자기 눈을 빛냈다.


“왜 그래?”

“아니, 저 여자가 목에 차고 있는 거 말이야.”

그는 히죽거리며 말을 이었다.


“엄청 비싸 보이는데? 게다가 손에 낀 반지 좀 봐. 저렇게 알이 굵은 건 난생처음 본다. 우리는 평생 가도 구경조차 하기 힘든 엄청 진귀한 물건인 게 틀림없어.”

“뭐? 너 설마…….”

그제야 동료의 속셈을 눈치챈 사내가 눈살을 찌푸렸다.


“옷차림도 그렇고, 아주 지체 높은 귀족이 분명해. 어쩌다 이런 꼴을 당했는지는 모르지만.”

“하, 하지만 아무것도 건드리지 않기로 했잖아. 이 일을 의뢰한 자가 그렇게 당부했는데…….”

“에이씨, 건드렸는지 안 건드렸는지 알 게 뭐야. 자기가 다시 와서 파 볼 것도 아니고.”

그는 동료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킬킬대며 구덩이 안으로 뛰어내렸다. 그러고는 재빠른 손길로 값비싼 장신구들을 챙기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사내의 마음속에도 어느새 스멀스멀 욕심이 차올랐다. 죽도록 고생한 건 똑같은데, 달콤한 불로소득을 동료 혼자 차지하게 둘 순 없었다.


“기다려! 나도 도울 테니 똑같이 나누자고.”

둘은 그 어느 때보다도 열심히, 서로 앞다투어 보석들을 훔쳤다.

혹시 땅에 흘리거나 놓친 건 없을까 샅샅이 살피는데 정신이 팔려 누군가가 다가오고 있다는 것도 알지 못한 채.


“이거 횡재했구먼.”

둘은 더 이상 챙길 것이 없을 정도로 욕심껏 주머니에 담은 뒤 구덩이 밖으로 기어 나왔다. 그러고는 얼른 흙을 덮었다.

반복되는 노동 속에 또다시 거친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지만, 아까처럼 힘들지도, 짜증스럽지도 않았다.


“휴우, 이제 끝났군.”

“어서 가자고.”

만족스러운 미소를 띤 채 두둑한 주머니를 만지작거리며 뒤로 돌려던 찰나였다.

휘익!

갑자기 나타난 신성한 빛이 어둠을 날카롭게 갈랐다.


“어……?”

어리둥절해 눈을 깜빡인 것도 잠시.


“윽!”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사내의 몸 위로 잘 벼린 장검이 그대로 내리꽂혔다.

다른 자도 마찬가지였다.


“누, 누구……!”

하얀 망토가 펄럭인 순간, 그는 끝까지 말을 잇지 못하고 방금 비명을 지른 동료처럼 땅을 나뒹굴었다.

쓰러진 사내들을 잠시 내려다보던 남자가 천천히 후드를 벗었다.

고고한 달빛 속에서 금발이 눈부시게 빛났다.

레어넌은 죽으면서까지 그들이 손에서 놓지 못하던 주머니를 집어 들었다. 그러고는 일부러 끄트머리를 찢어 다시 쓰러진 자들의 가슴팍 위에 그대로 던져놓았다.

틈 사이로 빠져나온 번쩍거리는 장신구들 몇 개가 땅 위를 뒹굴었다.

레어넌은 서늘한 눈빛으로 죽은 자들을 다시 한번 응시했다.


“……어차피 누구 하나 찾는 사람 없겠지.”

여기는 폭력이 난무하고 무법으로 가득한 험한 고원이다.

그런 곳에서 강도짓을 일삼던, 누가 봐도 수상한 자들의 시체가 한둘쯤 발견된다 해도 문제 될 일은 없었다.

설령 보고가 들어와도 제 선에서 처리해 버리면 그만이다.

보석이 탐나 다툼 끝에 서로를 죽인 듯하다고.

레어넌은 고개를 들어 달이 훤하게 떠 있는 하늘을 물끄러미 응시하며 생각을 이어 갔다.

부상을 입고 정신을 잃은 로렐라를 다른 이들이 돌보는 동안, 그는 또다시 일행에게 알리지 않고 단독으로 행동했다.

그가 향한 곳은 언덕에서 멀지 않은 웨즈 다리 근처였다.

그곳에 있는 도적들의 촌락은, 대체 무슨 일 때문인지 몰라도 텅텅 비어 있었다.

그런데도 그의 발걸음은 다리 아래로 향했다. 도적 촌락에도 들지 못하는 질 나쁜 도적들이 모이는 장소가 그 아래에 있다는 걸, 레어넌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렇게 해서 샬로네즈의 시체를 처리할 자들을 구한 그는, 밤이 되길 기다렸다가 도적들의 뒤를 조용히 밟았다.

값비싼 물건들을 잔뜩 두른 시체를 그들이 가만히 두고 볼 리 없었으니까.

레어넌의 예상은 그대로 적중했다.

언덕을 내려가기 전, 레어넌은 잠시 자리에 멈춰 서서 황량한 고원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마음속에는 지금까지 있었던 일, 그리고 앞으로 일어날 일들이 마구 뒤섞여 태풍처럼 휘몰아쳤다.

정체불명의 폭발 사건까지 일어난 아델리움 왕궁. 심지어 샬로네즈 왕녀가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아 아델리움은 전국이 발칵 뒤집힌 상태였다.

그러나 왕녀는 영영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

그녀의 마지막 행방을 아는 사람은 오로지 레어넌뿐이다.

그가 입을 열지 않는 이상, 시체조차 찾을 수 없으리라.

레어넌은 비로소 참았던 숨을 토해 냈다.

하얀 숨결이 차가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동시에 푸르디푸른 눈동자 위로 맑은 달빛이 물결치듯 번져 나갔다.


 
언제나 정의를 수호하고, 부정을 저지르지 않으며, 신념에 반하는 일에는 조금도 타협하지 않았던 에크레투스 성기사단장, 레어넌 베르하르트.

그런데도 그는 이웃 나라 왕녀의 죽음을 모른 척한 것도 모자라, 멋대로 시체까지 처리해 버린 것을 조금도 후회하지 않았다.

제국의 성기사단장으로서 평생토록 지녀 왔던, 정의를 지킨다는 신념에 반하는 일인데도.

눈조차 깜빡이지 않고 계속해서 달을 눈에 담던 레어넌이 조용한 목소리로 읊조렸다.


“그대를 언제까지나 지켜 주겠습니다.”

그래, 사랑하는 여자조차 지키지 못하는 정의는 필요 없다.

다짐을 거듭하는 굳은 입술 사이로 하얀 입김이 새어 나왔다.

머리 위에 휘영청 떠 있는 달도, 그 빛을 머금고 더욱 반짝거리는 눈 덮인 대지도, 차가운 바람에 펄럭이는 그의 망토도 온통 희디희었다.

* * *

저택에 돌아온 뒤에도 로렐라는 계속해서 고열과 혼수상태에 시달렸다.

펠리어트와 레어넌이 불러들인 명의들이 그야말로 문이 닳도록 그녀의 저택을 드나들었다.

그중, 은발을 지닌 한 정체 모를 의사가 섞여 있다는 건 그들도 미처 모르는 사실이었지만.

제아무리 구하기 힘든 약이라 해도 두 사람, 아니, 세 사람이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니 금세 구해졌다.

덕분에 그녀의 상태는 날로 호전되어 갔다.

여전히 공기는 시리도록 차갑지만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날.

까맣게 물들어 있던 눈에 차츰 희미한 빛이 새어 들어왔다.

무척이나 갑갑하게 눌린 듯한 몸을 뒤틀자, 순간 정신이 번쩍 들 정도로 엄청난 고통이 몰려왔다.


“으…….”

입에서 나지막한 신음이 새어 나온 그때.


“로렐라 아가씨!”

바로 곁에서 울먹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언제나 남들보다 반 옥타브 정도 높은 목소리.


‘조이……구나.’

오랜만에 듣는 듯한 그 목소리에 안도하며 로렐라는 눈을 비볐다.

아니, 비비려 했다.


“윽!”

하지만 팔을 올리긴커녕, 또다시 신음을 내뱉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움직이지 마세요.”

그때 차갑고 서늘한 손끝이 내 손을 가만히 잡았다.


“세이블……?”

“네. 저예요.”

다행이야! 정말로 소멸하지 않았구나……!

초초하기만 했던 마음에 비로소 안도감이 차올랐다.

더불어 눈에 뜨거운 눈물이 맺히려던 그 순간이었다.


‘위너드.’

아주 커다란 무언가가 머리 위를 세차게 후려친 듯했다.

로렐라는 소스라치듯 놀라 재빨리 몸을 일으켰다.


“으읏……!”

또다시 고통스러운 신음이 비집고 나왔지만, 멈출 수 없었다.

그가 사라지기 전, 마지막으로 돌아보며 짓던 미소가 눈에 선했다.

그래서 위너드는?

……대체 위너드는 어떻게 된 거야?!

하지만 콱 막혀 버린 목에서는 쉰 소리만이 흘러나올 뿐이었다. 로렐라는 사지를 마구 허우적댔다.


“로렐라 님!”

조이는 물론, 방 안에 있던 하녀들이 우르르 달려왔다. 하지만 그녀는 계속해서 몸부림치며 몸을 바로 세웠다.

그러고는 재빨리 화면을 띄운 그 순간.


“이러시면 안 돼요. 많이 다치셨단 말이에요!”

“세이블 님. 제가 응접실에 계신 레어넌 님과 펠리어트 님을 불러오겠어요……!”

 
「그러므로 그 소원은 불허합니다.」

화면 너머로 우왕좌왕하는 사람들이 보였다.

그러나 로렐라의 눈에는 오로지 그 메시지만 들어왔다.

그녀는 그것을 뚫어져라 노려보다 침대 밖으로 억지로 몸을 빼냈다. 세이블의 만류도, 두꺼운 붕대로 칭칭 감겨 있는 가슴 아래쪽에서 느껴지는 통증도 아무런 방해가 되지 못했다.

그때, 방문이 벌컥 열렸다.


“로렐라!”

“깨어나자마자 뭐 하는 거야!”

화려한 금발 뒤로 검은 망토가 펄럭였다.

그들은 다급히 다가와 휘청거리는 그녀의 팔을 각각 양쪽에서 잡았다.


“제발 다시 누우십시오, 네?”

“당장 의사를 불러와!”

결국 로렐라는 조심스럽게, 그러나 억지로 침대에 다시 눕혀졌다.

하지만 들썩이는 어깨는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눈꺼풀은 물론, 있는 힘껏 쥔 주먹도 여전히 바르르 떨리고 있었다.

주인공은 시스템의 규칙에는 개입할 수 없다고?

그래서 지금, 위너드를 되살리는 게 불가능하단 거야?

순간 로렐라의 아름다운 붉은 눈동자에 뜨거운 불이 옮겨붙었다.


“……누구 마음대로.”

고통을 감내하느라 여전히 힘겹게 숨을 몰아쉬는 입술을 비집고, 불이 옮겨붙은 듯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