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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6화. 너에게 내 모든 것을 (166/173)


166화. 너에게 내 모든 것을
2023.02.01.



 
등 뒤에서 천천히, 그러나 아주 신중하게 한 발자국씩 걸음을 옮기는 게 느껴졌다.

알아차리기 어려울 정도로 희미한 움직임이었으나 로렐라는 그 어느 때보다도 예민하게 그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

있는 힘껏 발버둥을 쳐 봤지만 몸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결국 눈동자만 움직여 옆을 바라보았다. 엷은 보라색을 띤 고급스럽고 화려한 정복 자락이 보였다.


“누가 다가오라고 했어?!”

그때, 샬로네즈가 날카롭게 외치며 재빨리 뒤로 물러났다.

붉은색 빛에 칭칭 매여 있던 로렐라도, 샬로네즈의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그대로 끌려갈 수밖에 없었다.

있는 힘껏 곁눈질하던 그녀의 눈동자에는 아름다운 보랏빛 잔상만이 남았다.

로렐라를 칭칭 옭아맨 붉은 오라가 그녀의 몸을 더욱 힘껏 조였다.


“으읏!”

갈비뼈 부근에서 끔찍한 소리가 난 순간, 로렐라의 입에서 처절한 신음이 부서져 내렸다.


“이제 와서 후회한들 이미 늦었다는 것만 말해 두죠, 전하.”

샬로네즈는 한쪽 입술 끝을 살짝 들어 올린 채 위너드를 쏘아보았다.


“무릎 꿇고 빈다 해도 감히 나를 조롱했던 사실이 사라지는 건 아니니까.”

날카롭게 내뱉은 말과는 달리, 그녀는 몹시 기분이 좋았다. 위너드의 얼굴이 점차 굳어 가고 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그는 아까부터 로렐라 쪽으로는 단 한 번도 눈길을 주지 않았다. 언제 숨이 끊길지 모르는, 목숨이 위험한 순간인데도.

숱한 후보들을 죽여 온 샬로네즈였기에 이런 상황에서 대체로 안내자가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대부분은 분노하거나, 비탄에 찬 절규를 내질렀다. 후보를 내버려 둔 채 먼저 꽁무니를 뺀 자도 있었지.

그런데 위너드의 반응은 그 어떤 부류에도 속하지 않는, 처음 보는 태도였다.

하지만 그렇다곤 해도 후회하지 않을 리 없었다. 자신의 제안을 걷어찬 데다가, ‘별 볼 일 없는 후보’라며 폄훼한 것을.

겉으로는 저렇게 태연한 척하지만, 무척 초조하겠지.

황태자 자리를 되찾긴커녕, 모든 걸 다 망치게 생겼으니 말이다.

그는 샬로네즈와 마찬가지로, 두 번 다시 없을 소중한 기회를 부여받은 사람 아닌가.

자신의 것을 되찾기 위해, 다시 한번 안내자로서 되살아난 기적을 경험한 사람.

샬로네즈가 어떻게든 살아남으려고 노력한 끝에 여기까지 온 것처럼, 그 역시 제 바람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하리라.

지금 당장 무릎 꿇고 개처럼 짖으라고 명령해도 어쩌면 아무 저항 없이 복종할지 모른다.


“후훗…….”

샬로네즈의 입가가 그림처럼 들려 올라갔다.

상상만 해도 짜릿했다.

모두가 우러러보던 황태자가 제 마음을 돌리지 못해 안달복달하는 모습을, 어딘가에 박제해 놓을 순 없을까? 기분이 나쁠 때마다 들여다볼 수 있도록.

그녀는 잔인하게 두 눈을 빛내며 위너드가 한 말을 그대로 따라 읊었다.


“함께 목숨을 버릴 생각은 아니라니.”

그 말을 바로 앞에서 들은 로렐라 메이레드는 지금 얼마나 비참할까?

생각하기가 무섭게 참지 못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높고 커다란 소리가 몇 차례나 황량한 고원 위로 끊임없이 울려 퍼졌다.


“그래. 다시 한번 말하지만…….”

그때, 여전히 차분하지만 조금 낮아진 목소리가 사악하기 그지없는 웃음소리를 단칼에 갈랐다.


“……함께 목숨을 버릴 생각은 없어.”

힘주어 한 자 한 자 내뱉은 말이 비수가 되어 로렐라의 심장에 꽂히는 것 같았다.

위너드는 멈췄던 걸음을 또다시 움직였다.

부드럽게 살랑거리는 갈색 머리카락이 환영처럼 곁을 스쳐 지나간다.

떡 벌어진 어깨와 곧게 편 등. 늠름한 뒷모습이 어느새 바로 로렐라의 눈앞에 놓였다.


‘안 돼.’

로렐라는 턱이 부서져라 세게 이를 악물었다.


“으읍!”

아픈 것도 잊고 몸부림치느라, 거친 숨소리가 신음처럼 새어 나왔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훤히 눈에 보였다. 그리고 이제 뭘 하려는지도.

아니, 혹시 그게 아니더라도, 뭘 하려는 것이든 간에…….


“목숨을 버리는 건 나 혼자일 테니까.”

안 돼!


“뭐……?”

홀린 듯 위너드를 바라보던 샬로네즈의 두 눈이 흔들렸다.


“사랑하는 그녀에게 이미 모든 걸 걸었거든.”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위너드의 손끝에서 붉은색 빛이 매섭게 뻗어 나갔다.

그 빛은 똑바로 날아가, 얼굴이 처참하게 일그러진 한 여자의 가슴을 지체 없이 꿰뚫었다.


“꺄아아아악!”

끔찍한 비명이 들림과 동시에, 로렐라는 순식간에 자유로워졌다.


“아!”

허공에 살짝 들려 있던 몸이 그대로 땅 위를 나뒹굴었다.

띵동!

그 순간, 이 상황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맑은 종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졌다.

「경고! 규칙 위반입니다.」

붉은빛으로 점멸하는 화면 너머로, 로렐라는 자신을 돌아보는 위너드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그 어느 때보다도 부드럽고 다정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가슴이 저미도록 사랑스러운 얼굴이었다.

「징계 완료.」

그게, 그녀가 본 위너드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 * *



“허, 흡…….”

기침이 쿨럭거리며 터질 때마다, 입술 사이로 피가 흘러내렸다. 샬로네즈는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순간 몸부림쳤다.

사지가 꽁꽁 묶인 채 활활 타오르는 불에 던져지면 이런 느낌일까. 타는 듯한 작열감이 온몸을 짓눌렀다. 바람이 피부를 스치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러워 견딜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샬로네즈는 네 발로 땅을 기어 앞으로 힘겹게 나아갔다. 밖으로 드러난 나무뿌리와 덤불들을 쥐어뜯으며 끈질기게 조금씩, 조금씩.


“그래도 아, 아직…….”

숨이 붙어 있다.

샬로네즈는 피거품을 토하며 젖 먹던 힘까지 다해 움직였다.

명확한 살의를 지닌 위너드의 돌발 행동은, 누구도 손 쓸 틈 없을 정도로 순식간에 이뤄졌지만 정말 다행스럽게도 시스템의 조치 역시 번개만큼이나 빨랐다.

그 덕분에 최악의 상황은 면할 수 있었다.

비록 깊게 팬 왼쪽 가슴에서 선혈이 울컥울컥 새어 나오고 있었지만, 심장까진 닿지 않았으니까.

그야말로 간발의 차였다. 조금만 늦었더라면 틀림없이 심장이 통째로 꿰뚫렸으리라.


“난 사, 살아야…… 살아……남아서…….”

눈앞이 희뿌옇게 흐려져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샬로네즈는 여전히 같은 말만 중얼거렸다.

엄습하는 고통에 굴복하지 않기 위해 악착같이 숨을 들이마셨다.

그러나 그녀의 모든 노력은 곧 멈추고 말았다.

뒤에서 절뚝이는 발소리가 들린 탓이었다.


“사, 살려…… 줘…….”

샬로네즈는 땅에 고개를 처박은 채 간절한 목소리로 애원했다. 에르헨이, 아니 어느 누구라도 자신을 도와주길 바라며.

하지만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아까와 같은 힘이 생기기는커녕 손끝조차 들어 올릴 수조차 없었다.

사방이 온통 붉었지만, 더러운 흙바닥 위로 자신의 선혈이 번져서 그렇게 보일 뿐이었다.

스르릉.

그때, 뒤에서 들리는 오싹한 소리가 귓가에 휘감겼다.

잘 벼린 게 틀림없는 예리한 날붙이가, 제 심장을 두 동강 내기 위해 다가오는 소리.


“나, 나는…….”

샬로네즈는 신음하며 고개를 저었다.


“무조건 살아남아야……!”

실낱같은 그 희망을 놓지 못하고, 원망스레 외친 그 순간.

푸우욱!

무자비한 칼날이 그녀의 가슴을 인정사정없이 꿰뚫었다.

아주 작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샬로네즈는 두 눈을 부릅뜬 채로 서서히 굳어 갔다.

최후의 최후.

그야말로 모든 게 멈춘 순간.

로렐라 역시, 샬로네즈의 몸에 꽂힌 검을 그대로 쥔 채 아무런 미동도 없었다.

움직이는 것이라고는 오로지 바람에 나부끼는 아름다운 붉은 머리카락뿐이었다.

* * *

띵동!

「로렐라 메이레드 님! 축하드립니다!」
 


“하아, 하…….”

띵동!

거친 숨소리 사이사이로 연달아 요란한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게…… 정말 내 귀에 들리는 소리가 맞나?

로렐라는 의구심을 버리지 못한 채, 샬로네즈의 몸을 꿰뚫은 검에 팔을 지탱한 채로 힘겹게 고개를 들었다.

「영원한 행복을 누리는 절대자, 이 세상의 주인공 자리는 바로 로렐라 메이레드 님의 것입니다!」

시스템창 위로 오색찬란한 빛이 흘렀다. 어찌나 반짝거리는지 눈이 부실 정도였지만, 그 속에 뜬 문구는 의외로 무척이나 간결했다.

영원한 행복.

느리게 깜빡이는 로렐라의 눈에는 주인공이라는 단어보다, 그 말이 먼저 박혀 들어왔다.


“행복……이라고…….”

조용히 읊조리기가 무섭게 그녀가 몸을 털썩 무너트렸다.


“아파…….”

놀랍게도 드디어 주인공이 된 그녀의 첫 소감은 이것이었다.

정말이지 빌어먹게 아팠다.

샬로네즈를 죽인 그 순간에는 미처 깨닫지 못했지만 갈비뼈가 부러진 모양이었다. 얼마나 부어 있는지 확인하려 했으나, 그 부근에 손을 댈 수조차 없는 걸 보면.

그다음에는 머리가, 팔이, 마지막으로는 다리까지 차례차례 조각나는 것처럼 쑤시고 고통스러웠다.

이 세상 또한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

거친 모래바람은 여전히 불고 있었고, 주위는 황량하기 그지없었으며, 미동 없는 샬로네즈의 주검도 그대로였다.

이렇게 허무하고, 아무렇지 않은 것을 위해 지금까지.

어떻게든 버텨 보려 양손으로 흙을 한 움큼 쥐었던 로렐라는 결국 온몸에 엄습하는 피로와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그대로 땅바닥에 드러눕고 말았다.

그런 그녀의 시선을 따라 반짝거리는 화면이 따라왔다.

「부디 앞으로 오래오래 행복을 누리시길 바라겠습니다!」
 


“……하.”

입에서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대체 행복이 뭔데?

지금 조금도 행복하지 않았다. 그럴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런데 뭘 어떻게 누리라는 거야.

조소를 머금은 것도 잠시. 파들거리는 눈꺼풀이 점차 무거워졌다.

하지만 이대로 눈을 감을 수는 없었다.

「또한 시스템은, 지금부터 로렐라 메이레드 님을 위해 즉각 주인공 보호 조치를 발동합니다.」
 


“잠깐 멈춰!”

로렐라가 다급하게 명령했다.

그러자 창을 가득 메운 알 수 없는 기호들이 빠르게 올라가다 일순 정지했다.


“……다른 후보들을 없애지 마.”

그녀는 거친 숨을 토해 내며 재차 말을 이었다.


“그리고 그동안 사라졌던 후보들을…… 전부 돌려놔. 억울하게 죽음을 맞이했던 사람들도…….”

쟤는 빼고.

물론 샬로네즈 쪽으로 흘끗 시선을 던지며 이렇게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아주 간결하면서도 깔끔한 메시지가 연달아 이어졌다.

「주인공님의 소원을 그대로 이행하겠습니다.」

그 직후 화면이 살짝 부르르 떨리더니 이윽고 수많은 이름이 줄줄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로렐라는 눈도 깜빡이지 않고 빠르게 움직이는 글자들을 하나하나 살폈다.

「세이블 릴리 님의 소멸을 중지했습니다.」

드디어 눈에 익은 이름이 박힌 듯 시야에 들어온 그 순간.

지금껏 늦추지 않았던 긴장이 비로소 풀리는 듯했다. 다쳤다는 사실도 잊고 크게 숨을 들이쉬자, 명치 아래로 찌르는 듯한 고통이 엄습했다.


“윽……!”

그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땅바닥에서 올라오는 한기가 여기저기 성치 않은 몸을 할퀴듯 타고 올라왔다. 입안에서는 계속해서 비릿한 피 맛이 느껴졌다.


‘너에게 내 모든 것을 걸었다는 것만 말해 두지.’

 
그런 로렐라를 위로하듯, 다정하면서도 따듯했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마지막으로 자신을 돌아보며 지었던 부드러운 미소도.

고귀한 에메랄드처럼 반짝이던, 사랑스러운 녹색 눈동자도.

점차 머릿속이 희미해져 갔다. 곧 꺼질 등불처럼 눈앞에 흐릿한 빛이 점멸했다.

하지만 로렐라는 차갑게 굳은 입술을 움직이는 걸 멈출 수 없었다.


“그를…… 돌려놔.”

나지막이 흘러나온 목소리가 축축하게 젖어 들었다.


“……위너드를 돌려줘.”

그 말을 끝으로 짙은 어둠이 훅 끼쳐 들었다.

로렐라는 그대로 까무룩 정신을 잃었다.

그녀의 눈꼬리를 타고, 뜨거운 눈물이 한줄기 흘러내렸다.


 
띵동!

아무런 미동도 없는 로렐라의 눈앞에 또다시 밝은 화면이 떠올랐다.

「죄송합니다, 로렐라 메이레드 님. 주인공은 오로지 주인공의 세계에만 관여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시스템의 규칙에는 개입할 수 없습니다.」

띵동!

「그러므로 그 소원은 불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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