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5화. 늦었다고 생각될 때 (165/173)


165화. 늦었다고 생각될 때
2023.01.28.



 
사나운 급류처럼 휘몰아쳐 온 검은 장막이 꿈틀거리며 높은 언덕을 거꾸로 올라오기 시작했다.

보기만 해도 소름 끼치고 기괴한 움직임이었다.

검은 무리는 곧 샬로네즈의 코앞까지 다가와 그녀를 에워쌌다.


“……끄그극.”

그들에게선 세상의 모든 저주와 원한이 담긴 듯한 섬뜩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장막은 그대로 하늘까지 닿을 수 있을 정도로 몸집을 크게 부풀리더니, 마치 그물이라도 던지듯 샬로네즈에게로 확 밀려왔다 멀어지기를 반복했다.

그럴 때마다 끄르륵대는 기괴한 소리 또한 점점 커졌다. 이대로 삼키지 못해 원통하다는 듯이.

샬로네즈의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목소리도 나오지 않고, 감히 눈조차 깜빡이지 못할 만큼 두려웠다.

그녀가 제아무리 강심장이라고 해도, 이런 상황에서 태연하게 이성을 지킬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샬로네즈에게는 검은 장막이 자신을 삼키는 것보다 두려운 게 있었다.

바로, 소멸이었다.

그 순간, 손바닥 안쪽에 쓰라린 통증이 느껴졌다. 꽉 쥐고 있던 주먹을 천천히 펴자 피가 비칠 정도로 파고 들어간 손톱자국이 보였다.


‘이건…… 내 목숨과 바꿔 얻은 삶이야.’

그녀는 상처를 들여다보며 떠올렸다.

그 누구도 알아주지 않았던 그늘 속 외롭고 비참했던 과거를, 그리고 무자비한 그들에게 목숨을 바친 대가인 현재를.

새로 주어진 인생은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이다.

골방에 갇혀 지냈던 길고 긴 시간에 비하면, 진짜 왕녀가 되어 즐겼던 달콤한 나날은 너무나도 짧았다.


“그걸 다시 잃는 것에 비하면 네까짓 놈들은 전혀 무섭지 않아!”

샬로네즈는 날카롭게 외치며 핏발 선 눈으로 여전히 제 앞에서 일렁이는 검은 그림자를 무섭도록 쏘아보았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바로 직전까지만 해도 그녀를 삼키려 들었던 사령체들의 크기가 점점 줄어들더니, 땅으로 스며들 듯 점점 사라지는 게 아닌가?

잔뜩 굳었던 눈에서 힘이 빠진 것도 잠시.

다시금 샬로네즈의 얼굴이 이루 말할 수 없이 무섭게 일그러졌다.

검은 장막이 사라진 자리에, 붉은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서 있는 여자를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로렐라 메이레드!’

눈이 마주치자마자 샬로네즈는 습관처럼 억지로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상황이 어떻든, 로렐라에게만큼은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우위를 점해 오히려 그녀를 불안하게 하고 싶었다.


“이렇게 다시 만나 뵙게 되어 유감이에요, 로렐라 메이레드 님.”

살기를 띤 눈빛과는 어울리지 않는,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차라리 아델리움에 오셨던 그때 빨리 죽여 드렸다면 이런 일도 없었을 텐데 말이에요.”

샬로네즈는 진심을 담아, 한탄하듯 말을 이었다. 하지만 로렐라 메이레드는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침묵했다.

평온하다 못해 무심해 보이기까지 한 눈빛에서는 아무런 감정도 읽을 수 없었다.

아주 잠깐의 시간이 흐르고, 로렐라는 마치 대답 대신이라는 듯 조용히 커다란 장검을 뽑아 들었다.


“……하.”

오묘한 빛이 일렁이는 날붙이를 바라본 샬로네즈는 실소를 참을 수 없었다.


“설마…… 그걸로 저를 죽이시려고요?”

“그래.”

로렐라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당신이 그럴 수 있을까요? 사람을 죽여 본 적은 있고요?”

“그럴 수 있을지 없을지는 두고 보면 알겠지.”

여전히 무덤덤한 얼굴과 목소리였다.

그 점이 묘하게 신경을 긁는다.


“아우레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끌어들이기 싫다고 이 고원까지 줄행랑을 친 마음 약한 사람이 누군가를 죽이겠다니…….”

하지만 샬로네즈는 점점 더 날카로워지는 신경을 애써 외면한 채 조소를 머금었다.


“뭐, 그래도 덕분에 즐거웠어요. 비록 원하는 결과를 얻진 못했지만, 여기서 당신의 기사를 자처하는 사람들이 위험에 빠지는 걸 지켜보는 건 재밌었거든요.”

“……닥쳐.”

피식거리는 비웃음 사이로 낮고 서늘한 목소리가 내려앉았다.

그리고 그 순간, 샬로네즈는 온몸이 얼어붙는 듯한 한기를 느꼈다.

평소와는 다른 섬뜩하리만치 싸늘한 시선이 그녀를 꿰뚫듯 노려보고 있었다.

……저건 자신이 알던 로렐라 메이레드가 아니었다.

비로소 그녀가 쥔 커다란 검에 다시 한번 눈길이 갔다.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는 것도 모른 채, 샬로네즈는 다급히 허리춤을 더듬어 갖고 있던 검을 빼 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움직일 수 없었다.

눈앞에서 마구 빛나며, 빠르게 메시지를 띄우는 시스템 창 때문이었다.

「제발 이제 그만 좀 꺼져라, 응? 니가 뭔데 우리 언니한테 XX이야!」

「샬로네즈인지 뭔지 하는 애 이제 좀 그만 보면 안 되나여? 짜증 나. 걍 빨리 뒤졌으면.」

「저 X 죽이러 가실 분! 파티 구합니다.」

지금껏 내내 잠잠하던 창이, 온갖 야유와 조롱 그리고 저주로 가득했다.

샬로네즈는 얼굴을 흉하게 일그러뜨린 채로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 버리고 말았다.

이 치욕, 그리고 모멸감.

온몸의 살점을 태우는 듯한 뜨거운 분노가 그녀를 집어삼켰다.

그녀는 얼굴을 잡아 뜯을 듯이 쓸어내렸다. 그러고는 애써 들끓는 머리를 진정시켰다. 아니, 진정시키려고 노력했다.

진짜 치욕은 저런 여자에게 주인공 자리를 빼앗기는 것이다.

어차피 이대로 살아남는 사람이 승리자일 테니까!


“너만…….”

얼굴을 가린 손 틈새로 거칠게 갈라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너만 없으면……!”

손을 내린 동시에, 광기로 차오른 눈동자가 드러난 그때였다.

휘익!

보기만 해도 가슴이 선득할 정도로 잘 벼린 검날이 예고 없이 빠르게 날아왔다. 샬로네즈는 재빨리 팔을 치켜들었다.

챙! 소리와 함께 허공에서 불꽃이 튀었다.

손끝이 저릴 만한 공격이긴 했으나, 샬로네즈의 입술은 위로 둥글게 말려 올라갔다.


“아하하하하!”

그리고 그녀는 결국 참지 못하고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그따위 실력으로 날 죽이겠다고?”

가볍게 검을 쳐 내며 어깨를 으쓱이는 동작 하나에도 비아냥이 스며 있었다.

하지만 로렐라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고 검을 치켜들었다.

여전히 엉성하기 그지없는 자세로.

실력 차를 생각하면 무척 건방진 대응이었다. 샬로네즈의 눈에 흉포함이 차올랐다.

불쌍하리만치 멍청한 여자 같으니.

갈기갈기 찢어 죽여 주마!

겁 없이 제게 달려드는 로렐라의 어깨에 검을 쑤셔 박으려던 그때였다.


“윽……!”

샬로네즈가 고통스러운 신음을 내뱉었다. 몸이 휘청이고, 뜨거운 피가 후두둑 떨어졌다.

그녀는 멍한 눈으로 타는 듯한 고통이 퍼져 가는 팔을 응시했다. 찢어진 소매 사이로 끔찍하게 벌어진 붉은 상처가 보였다.

실수했던 걸까?

하지만 오래 생각할 틈이 없었다.

휘익!

똑바로 다가오는 칼날을 피하며 로렐라의 손목을 그대로 내려치려던 그때였다.


“아아악!”

또다시 처참한 절규와 함께 이번에는 허벅지 아래로 검이 깊게 박혀 들었다.

마치 검이 알아서 몸을 난도질하는 것만 같았다.

아름다운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누구 하나 감히 함부로 손대지 못했던 몸이 어느새 피투성이가 되었다.


“이제야 좀 손에 익네.”

로렐라는 아랑곳하지 않고 짧게 한숨을 내쉬며 이렇게 중얼거렸다.

그러더니 다시 검을 고쳐 들고는 매서운 눈으로 어딘가를 응시했다.

다름 아닌 샬로네즈의 목이었다.

샬로네즈는 창백한 안색으로 절뚝거리며 주춤주춤 물러났다.


“에르헨.”

그녀는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게, 그러나 그 어느 때보다도 절실하고 애타는 목소리로 그 이름을 입에 담았다.

유일한 아군이자, 로렐라 메이레드를 막아 줄 만큼 막강한 힘을 지닌 그 남자의 이름을.


“제발, 내게 힘을…….”

그녀의 두 눈은 금방이라도 피눈물이 흘러내릴 듯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힘을…… 빌려줘……!”

새빨간 노을빛으로 물든 머리카락을 아름답게 휘날리는 저 사신을 제발 막아 다오!

온몸을 쥐어짜는 듯한 애타는 외침이 허공에 울려 퍼진 그때였다.

샬로네즈의 어깨 뒤에서부터 돋아난 붉은 오라가 허공을 빠르게 가르며 날아갔다.

그러고는 로렐라의 사지를 칭칭 감아 묶으며 몸을 타고 기어 올라가기 시작했다.

* * *

두 발이 허공 위로 천천히 들렸다.


“으윽!”

동시에 난생처음 느끼는 끔찍한 고통이 그녀의 몸을 쾅쾅 두드리고 또 두드렸다.

차라리 지금 이대로 죽는 게 나을 거라고 선고하듯이 말이다.

이게…… 뭐지?

로렐라는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혀를 있는 힘껏 깨물고 말았다.

입 안쪽에서 비릿한 피 맛이 느껴졌지만, 온몸을 엄습하는 고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마치 무거운 짐승에게 잘근잘근 짓밟히는 것만 같았다.


“헉……!”

어느새 몸통을 휘감은 붉은 오라가 갈비뼈를 모조리 부러뜨리겠다는 듯이 강하게 조여 왔다. 숨을 쉴 수조차 없었다.

챙그랑!

결국 손에 힘이 빠져 놓친 검이 바닥으로 힘없이 곤두박질쳤다.

로렐라는 고개를 움직이긴커녕 입술을 달싹이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분명 어디선가 여러 차례 본 적이 있는, 눈에 너무나도 익은 붉은 오라가 어느새 그녀의 얼굴을 거미줄처럼 감싸기 시작했기에.


“아하하하핫!”

로렐라는 눈꺼풀을 감았다 뜨는 것 외에 조금도 움직일 수 없었다.

피투성이가 된 채 더할 나위 없이 즐거운 얼굴로 웃고 있는 샬로네즈가 보였다.


“놀랐나 보구나.”

그녀는 발을 질질 끌며 가까이 다가왔다.


“나는 말이야,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뭐든지 한단다. 쓸데없이 남부터 걱정하는 너와는 달리 말이야. 그런 널 주주들이 좋아해 준다고 해서, 네가 뭐라도 되는 줄 알았겠지?”

샬로네즈가 엉망이 된 로렐라의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겨 주었다. 이윽고 드러난 귓가에 소름 끼치는 숨결이 와 닿았다.


“그동안 주인공 놀이 하느라고 고생 많았어.”

요란한 종소리가 쉴 새 없이 귓전을 때렸다. 그러나 로렐라는 화면을 응시할 수도, 뭐라고 말할 수도 없었다.

칼날에 박힌 듯한 고통만이 점점 더 강도를 더해 갈 뿐이었다.

곧 닥칠 죽음을 알려 주려는 듯이.

물론 각오하고 있었다. 반드시 주인공이 되고 싶었지만, 그 이면에는 실패할 수 있다는 가능성도 존재하고 있었기에.

하지만 로렐라의 마음속에는 두려움이나 체념보다 더 큰 감정이 타오르고 있었다. 바로 무엇으로도 꺼뜨릴 수 없는 분노였다.

샬로네즈의 저 힘이 어디서 온 건지, 이미 머릿속에 그려졌기 때문이었다.

저를 옭아매고 있는 이 정체불명의 오라는 분명 위너드의 것이었다. 누구도 그런 능력을 가진 자가 없었기에, 그를 일찌감치 주인공 후보로까지 만들어 주었던 그런 힘.

그런 힘을 샬로네즈가 자유자재로 쓴다는 것은…….


‘……아마 손을 잡은 거겠지.’

여전히 위너드를 두려워하고 있는, 주인공이 된 에르헨과.

죽는 건 두렵지 않았다. 정정당당하게 자신의 힘으로 주식을 팔아 여기까지 온 것도 후회하지 않는다.

다만 화가 날 뿐이었다.

저급함과 비열함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한다는 것이. 모든 소중한 것들을 잃어야 한다는 사실이!

그런데 그때였다.


“어머나.”

악마처럼 키득거리던 잔인한 웃음소리가 뚝 멈췄다.


“또 뵙는군요, 전하.”

……전하라고?

그 말을 듣는 순간, 날카로운 무언가가 로렐라의 정수리를 꿰뚫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뒤로 고개를 돌릴 수 없었다. 그저 악마처럼 웃으며 제 등 뒤를 응시하는 샬로네즈의 눈동자만을 들여다볼 수 있을 뿐이었다.


“안 그래도 언제쯤 나타나실까…… 궁금하던 참이었어요.”

……안 돼.

온몸에 소름이 쭈뼛 돋게 만드는 불길한 감각이 등줄기를 타고 내달렸다.


‘절대 안 돼!’

목이 터져라 외치고 싶었지만, 절규는 작은 신음으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설마…… 잊은 건 아니겠지?”

샬로네즈는 마치 구명줄이라도 되는 양 로렐라의 팔을 거세게 움켜쥐었다. 그러고는 음산하게 뇌까렸다.


“내게 손끝이라도 댔다간, 로렐라 메이레드보다 당신이 먼저…… 끝이라는 걸 말이야.”

그 언젠가 그랬듯, 드러난 살갗에 날카로운 손톱이 천천히 박혀 드는 게 느껴졌다.


“……내가 사람을 잘못 본 게 아니길 바라. 다른 사람도 아닌 당신이, 이 하찮은 여자를 위해 목숨까지 버리려 들 한심하고 멍청한 작자라고는 생각하지 않으니까!”

로렐라의 등 뒤에 선 귀공자를 바라보는 샬로네즈의 눈빛이 질투와 광기로 휩싸였다.


“……글쎄.”

단정하게 맞물려 내내 침묵을 고수하던 굳은 입술 사이로, 낮고 담백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난 함께 목숨을 버리겠다는 소리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는데.”

로렐라의 눈에 비친 샬로네즈의 동공이 희미하게 떨린 것도 잠시.


“아하하하핫!”

그녀는 고통을 잊고 진심으로 유쾌한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이제 와서 협상하기엔 너무 늦었다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전하?”

피가 흘러내리는 손으로 연신 훔치는 바람에, 제 얼굴 역시 온통 피투성이가 되어 있다는 사실도 모른 채, 샬로네즈는 천진난만한 척 두 눈을 깜빡였다.


“전혀. 때론 너무 늦었다고 생각될 때가 제일 적당한 순간일 수도 있지.”

위축되긴커녕, 평소와 다름없이 능청스러운 목소리가 지지 않고 뒤따랐다.

습관처럼 옷매무새를 매만지며 그는 부드럽게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뻔뻔하리만치 아무런 흔들림 없는 미소였다.


 
로렐라는 견디지 못하고 있는 힘껏 마구 발버둥 쳤다.

어디서 그런 힘이 나왔는지 모를 정도로 거센 몸부림이었다.

그의 품에서 숱하게 맡아 왔던 은은한 백단향이 코끝에 스쳤다.

너무나도 고귀하고 아름다운 향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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