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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4. 로렐라 메이레드가 빨리 와 주었으면 (164/173)


164. 로렐라 메이레드가 빨리 와 주었으면
2023.01.25.



 
분노로 물든 샬로네즈의 두 눈은 마치 어둠 속에서 웅크리고 있는 악마의 것 같았다.

그녀의 얼굴은 여전히 인형처럼 아름다웠지만, 살벌하게 뒤틀린 표정은 사람의 사지를 그대로 찢어 버릴 수도 있을 만큼 흉포하고 기괴했다.


“아아아악!”

가녀린 목을 타고 날카롭게 찢어지는 듯한 비명이 터졌다.

샬로네즈가 제 분을 이기지 못하고 날뛰는 소리였다.

세상의 모든 사악함과 저주를 담은 듯한 목소리가 조용한 밤하늘을 타고 울려 퍼지자, 그녀의 곁을 지키던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목덜미가 섬찟해지는 것을 느꼈다.


“더럽게도 질긴 것 같으니라고……!”

샬로네즈가 벌겋게 충혈된 눈으로 연신 입술을 짓씹었다.

그녀의 입술 위엔 이미 눈살이 찌푸려질 정도로 피딱지가 잔뜩 앉아 있었지만, 뒤틀린 속에서 느껴지는 쓰라림에 비하면 이까짓 아픔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에르헨의 힘을 빌려 마물을 불러냈을 때 그녀가 기대한 건 이런 게 아니었다.

로렐라 메이레드가 절망과 공포에 짓눌려 바닥을 헤집는 모습을 원했다.

그래, 고통에 찬 얼굴로 눈물을 펑펑 흘리며 두려움을 호소하는 꼴을 봐야만 했는데!

……설마 그런 식으로 레어넌 단장을 구해 낼 줄이야.

처참하게 짓무른 입술에서 기어코 피가 비쳤다.

샬로네즈도 멀지 않은 곳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긴 했지만, 아주 가까이에 염탐한 수하가 한 이야기는 실로 놀라웠다.


‘쿠키라고 외치니 갑자기 마물의 몸통이 갈라지기 시작했습니다.’

 
보고를 마친 수하는 어리둥절함과 두려움이 담긴 얼굴로, 엉뚱한 소리를 입에 담은 자신을 질책할까 봐 샬로네즈의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그녀는 질책하지도, 놀라지도 않았다.

라그에게 들어 그것에 대해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비록, 써 본 적은 없지만.

샬로네즈는 그런 보상을 받은 경험이 전무했다. 어느 주주에게도 압도적인 응원을 받아 본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 사실이 그녀를 더욱 못 견디게 했다.


“벌레처럼 하찮은 것이…….”

활활 불타는 장작불에 올라앉은 것처럼 사지가 마구 뒤틀리는 느낌이었다.


“있는 대로 발악을 하는구나.”

갈라진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그녀의 얼굴이 소름 끼치게 일그러졌다.

그렇다면 처참히 짓밟아 주는 수밖에!

샬로네즈는 파르르 떨리는 입술을 손등으로 거칠게 문지르고서는, 턱에 있는 대로 콱 힘을 주었다.

씨근덕대는 숨을 진정하려 안간힘을 썼지만, 단단하게 다물린 잇새로 이를 가는 소리가 자꾸만 새어 나왔다.

흥분이 가라앉기는커녕, 오히려 가슴이 계속해서 거칠게 들썩였다.


“저, 저기 이상한 게 보입니다!”

그 순간, 곁에서 왕녀의 심복을 자처하던 사내의 고함이 들렸다.

귀가 떨어져 나갈 정도로 커다란 그 목소리는 공포에 질려 있었다.

모든 것을 삼켜 버릴 정도로 새까만 무언가가, 마치 폭풍우를 만난 파도처럼 거칠게 일렁이며 이쪽을 향해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 * *

고원이 갑자기 바다로 변한 건 아닐까.

그렇지 않고서는 도저히 설명되지 않는 광경이었다.

여기저기서 날뛰며 발을 구르는 말들의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 무장하는 기사들의 손길이 평소보다 더욱 분주했다.


“도망치셔야 합니다!”

그녀의 심복은 자리에 못 박힌 듯 우뚝 서서 그 광경을 물끄러미 바라보고만 있는 샬로네즈를 채근했다.

그러나 왕녀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빌어먹을!”

결국 그는 욕설을 내뱉고는 그녀의 팔을 거칠게 잡아끌었다.

그런데 그 순간.


“컥!”

철컹, 소리와 함께 옆구리에서 뽑혀 나간 검이 명치를 꿰뚫었다.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기에 아무런 대비조차 하지 못했다.


“도망가라니. 어디로?”

경악한 수하의 입술 사이로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왜, 왜 이런…….”

부하들을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샬로네즈의 곁을 지켰던 그로서는 전혀 상상할 수 없었던 결말이었다.

샬로네즈는 여전히 천진난만한 얼굴로 생긋 미소 지으며 재차 물었다.


“응? 내가 어디로 도망가야 하느냐고 물었어.”

“어디든…… 안전한 곳으로…….”

“아하하하하핫!”

샬로네즈는 그 말에 배를 잡고 웃었다.

하지만 곧 언제 그랬냐는 듯 싸늘한 눈빛으로 읊조렸다.


“멍청하긴. 조금 있으면 이 세상이 전부 내 것이 될 텐데 내가 왜 도망가야 하지?”

태연하게 어깨를 으쓱인 것도 잠시. 샬로네즈가 사나운 얼굴로 버럭 소리를 질렀다.


“도둑이 쳐들어온다고 해서 집을 버리고 도망가는 집주인이 있더냐?! 어디 그 하찮은 입으로 다시 한번 지껄여 보려무나!”

길길이 날뛰는 그녀의 모습은 마치 면전에서 평생 잊지 못할 모욕이라도 당한 사람 같았다.

하지만 이미 숨이 끊어진 심복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맙소사. 완전히 미쳤군.’

그 광경을 고스란히 지켜본 남자가 창백해진 얼굴을 마구 손으로 쓸었다.

에르헨 황제의 명을 받아 샬로네즈를 호위하던 이들의 대장이었다.

남자는 심각한 표정으로 그녀의 뒷모습을 가만히 노려보았다. 그러곤 저와 마찬가지로 굳은 채 서 있는 부하들에게만 들릴 정도로 낮게 속삭였다.


“……움직인다.”

그 말에 두려움과 의문이 뒤섞인 눈빛이 일제히 그를 향했다.


“에르헨 황제 폐하께 하나도 빠짐없이, 낱낱이 보고드려야 한다.”

수하들은 모두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약속이나 한 것처럼 일제히 말에 올라탔다.


“지금 뭐 하는 짓이지?”

갑작스러운 행동에 샬로네즈는 잠시 의아하다는 표정을 짓더니, 이내 재미있다는 듯 피식거리며 웃었다.

에르헨의 수하는 엄중한 목소리로 낮게 쏘아붙였다.


“폐하께선 그저 당신을 도우라고 했지, 당신의 모든 행동을 따르라고 하진 않으셨다.”

그 말을 끝으로 요란한 말발굽 소리와 함께 매캐한 흙먼지가 일었다.

복면을 두른 사내들은 샬로네즈를 덩그러니 남겨 둔 채 재빠르게 언덕을 내려가기 시작한 것이다.

몰려오는 사령 무리를 피해, 그 옆에 있는 암석 지대로 숨어 들어가 그대로 고원을 빠져나가려는 심산이었다.

바람을 따라 마구잡이로 일어났던 흙먼지는 금세 가라앉았다.

사방이 쥐죽은 듯 조용했다.

그 고요 속에서 들리는 건, 저 멀리서 들려오는 바람 소리뿐이었다.

기괴하게 꿈틀대는, 검은 파도가 몰려오는 소리.

하지만 샬로네즈의 곁엔 아무도 없었다.

그 사실을 깨달은 순간 그녀는 저도 모르게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아주 찰나의 순간, 차라리 로렐라 메이레드가 빨리 와 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 * *



“좀 더 빨리 박차를 가해라! 안 그러면 저 사령 무리와 마주쳐!”

남자의 입에서 연신 다급한 고함이 터졌다.

그 말에 부하들도 가쁜 숨을 몰아쉬며 말을 채찍질했다.

죽은 것도, 그렇다고 살아 있는 것도 아닌 소름 끼치는 존재들이 바로 지척에 떼를 지어 다가오고 있었다.

온몸의 털이 쭈뼛하게 섰으나 젖 먹던 힘까지 모아 말의 옆구리를 거칠게 찼다.

그들은 이윽고 기기괴괴한 모양의 암석이 얼기설기 얽혀 있는 곳에 다다랐다.

행렬의 마지막에서 달리던 자까지 바위 뒤에 몸을 숨긴 지 채 수 분도 지나지 않아, 사령들이 바로 옆에서 급류처럼 휘몰아쳐 나갔다.

누구 하나 들키지 않고 다행히 무사히 옆으로 잘 빠진 듯했다.

저 멀리 사라지는 검은색 너울 같은 무리를 바라보며 일제히 한숨을 쉬었다.


“……후우, 죽는 줄 알았네.”

“그나저나 아까 그 여자는 어디 머리가 이상한 것 아닙니까?! 다짜고짜 심복의 가슴을 칼로 찌르다니요!”

“폐하께 아까 일어난 일을 전부 말씀드려야 합니다!”

여기저기서 경악에 찬 부하들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 말에 우두머리는 복면을 고쳐 쓰며 고개를 끄덕였다. 샬로네즈에게 말했던 대로, 황제의 명이 있었던 건 사실이니까.


‘그 여자가 이상한 수작을 벌인다 싶으면 바로 내게 알려라.’

 
그는 급히 입을 열었다.


“곧장 벨레드리안 제국으로 돌아간다. 오늘 있었던 일은 물론, 로렐라 메이레드에 대해서도 전부 보고해야…….”

그때였다.


“누나에 대해 뭘 보고할 건데?”

등 뒤에서 비아냥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갓 청년이 된 듯, 상당히 젊은 남자의 목소리였다.

우두머리는 황급히 뒤를 돌았다.

아주 가까운 거리에 키가 크고 호리호리한 남자가 서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달빛을 머금은 듯한 은발과 얼굴을 가린 복면 위로 드러난 루비처럼 반짝이는 붉은색 눈동자가 단숨에 시선을 잡아끌었다.

남자의 뒤로 일행인 듯한 무리가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냈다.

많은 숫자는 아니지만, 하나같이 범상치 않은 기운이 가득했다.

빌어먹을.

사령들에게 정신이 팔려 다가오는 기척을 파악하지 못했구나.

우두머리는 속으로 욕설을 중얼거리며 그대로 검을 뽑아 들었다.


“……네놈은 누구냐.”

베일 듯 날카로운 살기가 삽시간에 저변에 흘렀다.


“나? 그냥 지나가는 잘생긴 사람.”

남자의 목소리는 상당히 진지했지만, 황당하리만치 성의 없는 대답이었다.

장난스러운 태도에 우두머리의 입술이 가볍게 비틀렸다.


“……누구든 상관없다. 지금 이야기를 들은 이상, 살아 돌아갈 생각은 말아라.”

“그 전에 네가 먼저 애원하게 될걸. 제발 죽여 달라고 말이야.”

카셀은 예쁘게 눈을 휘어 웃고는, 천천히 검을 뽑아 들었다.

그런데 그 순간, 누군가가 그의 뒷덜미를 거칠게 잡아챘다.


“아, 아!”

“똥폼 그만 잡고 비켜, 인마.”

바로 시드였다.

카셀과 시드, 그리고 길드원들은 로렐라와 그녀의 말이 사라진 것을 눈치채자마자 다급히 뒤를 쫓았다. 그러다가 누가 봐도 수상한 무리를 발견한 것이다.


“어깨도 시원찮은 게 무슨.”

시드는 혀를 쯧, 하고 차더니 머리를 한 번 털고는 앞으로 걸어 나갔다.

그러고는 배시시 웃으며 넉살 좋게 말을 붙였다.


“미안. 얘가 확실히 또라이긴 한데, 그래도 좀 봐주면 안 될까.”

하지만 상대를 도발하듯이 검을 가볍게 휘두르는 자세는 살벌하기 그지없었다.


“제기랄…….”

참지 못하고 욕설을 지껄인 수하가 이내 큰 소리로 쩌렁쩌렁 외쳤다.


“전부 죽여라!”

 

* * *



‘뭐지, 이놈들은?’

여기저기서 비명이 난무하는 가운데, 우두머리의 동공이 숨길 수 없이 떨렸다.

숨을 돌릴 틈도 없이, 이내 또다시 누군가가 발밑에 털썩 쓰러졌다.

……이번에도 역시 그의 부하였다.

에르헨 황제에게 직접 선택받았을 만큼, 그는 물론이고 그의 부하들도 검술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사람들이었다.

한데 그들을 상대로 이만큼 버티는 이자들은 대체 누구인가.

아니, 그냥 버티는 게 아니라 오히려 착실히 승기를 잡아 가고 있었다. 일부러 져 주는 척하며 가지고 노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특히 은발을 지닌, 앳된 얼굴의 그놈은 정말 괴물 같았다. 부상을 입은 것이 분명한데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지치긴커녕 오히려 쌩쌩해지는 게 아닌가?


“감히 누나에게 관심을 갖다니! 저놈을 쉽게 죽이는 놈은 내 손에 죽을 줄 알아!”

게다가 같은 편을 향해 이렇게 소리치기까지.

우두머리는 난처한 표정으로 얼굴을 마구 쓸어내렸다.

……아무래도 미친놈이 틀림없다.

그렇게 결론 내린 그는, 입술을 꽉 깨물고 조심스레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결사 항전 하는 부하들에게는 미안하지만, 자신에게는 황제 폐하께 모든 걸 보고할 의무가 있었다.

부하들이 일제히 은발의 남자에게 달려든 틈을 타, 그는 재빠르게 옆쪽에 있는 판판한 모양의 넓은 암석 뒤로 몸을 숨겼다.

그런 식으로 바위 몇 개를 건너가자, 바로 지척에 있는 바위 뒤쪽으로 말의 머리가 보였다.

싸움이 벌어지고 있는 곳과 그리 멀지 않긴 하지만, 혼신의 힘을 다해 말을 몰면 충분히 도망칠 수 있을 듯했다.

그런 생각을 하며 말 위에 올라타려던 그때였다.


“……넌 누구지?”

뒤에서 낮고 느릿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천천히 시선을 돌리자, 눈앞에 펄럭이는 검은 망토가 보였다.

새하얗게 질렸던 우두머리의 얼굴에, 이내 화색이 돌았다.

앞을 막고 선 남자가 누군지 알아보았기 때문이었다.


“세, 세실리카 제국의 펠리어트 체임버스 공작님 아니십니까.”

남자는 천천히, 그러나 또박또박 그의 이름을 힘주어 입에 담았다.

낯선 남자가 자신의 이름을 부른 순간, 펠리어트가 한쪽 눈썹을 까딱였다.

그걸 놓치지 않고 포착한 우두머리의 입가 또한 비스듬히 위로 호선을 그렸다.


“전쟁에서 큰 공을 세우신, 북부의 대영지를 다스리는 높으신 분의 얼굴을 알아보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에르헨 황제의 인장이 찍힌 작은 양피지 두루마리였다.


“제 신분을 밝힐 순 없지만…….”

평소라면 남에게 절대 보여선 안 되는 물건이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황제 폐하의 명을 받들어 임무를 수행 중입니다.”

순간 펠리어트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위조인지 아닌지 가늠해 보려는 게 틀림없었다.


“의심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공작님. 감히 황실의 인장을 위조해 다니는 간 큰 자는 없습니다.”

그러자 펠리어트가 아주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에 수긍한 건지, 아니면 위조가 아닌 진짜라는 걸 알아보았기 때문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남자는 옆으로 조금씩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기며 말을 이었다.


“……만약 여기서 제가 무사히 돌아가지 못한다면, 그리고 그 일에 공작님께서 얽혀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 분명 외교 분쟁으로 이어질 겁니다. 세실리카의 황실도 아주 곤란한 입장에 처하겠지요.”

얼굴은 알고 있었지만, 펠리어트 공작을 이처럼 가까이에서 보는 건 처음이었다.

그는 소문대로 잘생기고 훤칠한 미남이었다. 그러나 주변을 얼어붙게 만들 수도 있을 것 같은 차가운 눈빛과 아무런 감정도 읽을 수 없는 날카로운 표정은 사람을 움츠러들게 만드는 위압감이 서려 있었다.

하지만 남자는 지금만큼은 자신이 우위일 거라고 믿었다. 그는 저보다 잃을 게 훨씬 많은 사람이니까.


“그렇지. 그런 일이 벌어지면 확실히 황실이 곤란해지겠지.”

아니나 다를까. 펠리어트는 가볍게 긍정의 말을 던졌다.

드디어 살아날 길이 보이는구나.


“공작님께서도 당연히 그런 일은 원치 않으시겠지요. 큰 공을 세운 지도 얼마 되지 않으셨잖습니까. 이대로 저를 보내 주신다면, 아무 일도 없을 것입니다. 공작님의 존함이 수상한 일에 연루되는 일도 없을 것이고요.”

그렇게 믿어 의심치 않으며 재빨리, 그리고 열심히 입술을 움직였건만.


“……아니.”

돌아온 건 청천벽력과도 같은 대답이었다.


“나는 아무 상관 없어. 황실이 난처해지든 말든.”

“네……?”

남자는 자신의 귀를 의심하며 재차 되물었다.


“사, 상관이 없으시다니요. 대공께서는 나라 안팎으로 명성이 알려진……!”

“그런가. 대부분 북부에서만 지내서 잘 몰랐는데.”

대수롭지 않다는 듯 답한 펠리어트는 어느새 검을 빼 들고 남자에게로 천천히 다가갔다. 겁에 질린 남자는 뒤로 물러나려 했지만, 암석에 가로막혀 더 이상 갈 곳이 없었다.


“세실리카의 북부를 다스리는 내게 제일 중요한 건…….”

냉정한 목소리가 이어진 것과는 달리, 그의 눈에 일순 온화함이 깃드는 듯했다.


“그저 따듯한 봄을 지켜 내는 것뿐이야.”

그 말을 끝으로, 펠리어트는 검을 쥔 팔을 가볍게 내리그었다.

사방으로 붉은 피가 튀고, 남자의 고개가 그대로 아래로 툭 떨어졌다.

여전히 어리둥절한 두 눈을 부릅뜬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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