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화. 반드시 내 손으로
(163/173)
163화. 반드시 내 손으로
(163/173)
163화. 반드시 내 손으로
2023.01.21.
사람들은 놈을 유인할 짐승의 사체를 계속해서 집어던졌다.
“계속 가져와라! 사방에 냄새를 퍼뜨리려면, 아직 턱없이 부족하니까!”
시엘로 단장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검은 갑옷을 입은 기사들이 피에 젖은 커다란 자루를 짊어지고 다가왔다.
그것을 건네받은 성기사단원들은 팔을 힘껏 휘둘러 살점이 붙은 뼛조각들을 여기저기 골고루 투척했다.
그들의 뒤에서는 용병들이 한시도 쉬지 않고 도끼를 휘둘러 미끼가 될 재료들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참으로 일사불란하고 재빠른 움직임이었다.
제대로 숨도 쉬기 힘들 정도로 고약한 냄새가 가득했지만, 인상을 쓰거나 코를 감싸 쥐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모두의 머릿속엔 오로지 레어넌 단장을 구해 내야 한다는 생각밖엔 없었으니까.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사람들의 이마에서 구슬땀이 뚝뚝 흘러내렸다. 도끼를 휘두르느라, 미끼를 뿌려 대느라 쉴 새 없이 휘둘러 댄 팔과 어깨는 뻐근하다 못해 아예 감각이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깊고 넓게 팬 구덩이 안은 여전히 잠잠하기만 했다.
애써 밀어 놓았던 불안이 사람들의 마음에 다시금 움텄다.
……이게 정말 효과가 있을까?
성기사단원들의 증언을 토대로 미루어 보았을 때, 그 마물은 전장을 수도 없이 누빈 용병들조차도 본 적 없는 몹시 희귀한 놈이었다.
한데 그런 걸 불러내는 방법을 귀족 아가씨가 정말 알고 있는 걸까?
사람들이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지만, 그녀는 확고한 의지를 내보였다.
결국 사람들은 다시 묵묵히 팔을 움직였다. 물에 빠져 그저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인 것은 모두가 마찬가지였으니까.
그런데 그때였다.
우우웅.
땅속 깊은 곳에서 기분 나쁜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러더니 이윽고 거친 흙과 모래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미약했던 떨림은 이내 발밑의 땅이 들썩일 정도로 거센 진동으로 변했다.
“우왓!”
“나, 나타났다!”
여기저기서 높다란 탄성이 터져 나왔다.
“영애의 말이 정말이었군.”
“정신들 바짝 차려!”
그들은 저마다 무기를 치켜든 채 숨을 죽였다.
어깨를 짓누르는 듯한 무거운 침묵이 발끝까지 내려앉은 그 순간.
“끼에에에에엑!”
사나운 포효와 함께 땅이 쩍쩍 갈라지더니 이내 둥그런 바위를 줄줄이 이어 붙인 것 같은 기다란 몸이 지하에서 솟구쳤다.
“저놈이다!”
“절대로 놓치지 마! 단장님을 구해야 한다!”
사람들은 그 어느 때보다 침착하게 움직였다. 몇몇 용병들은 석궁을 조준시켰고, 길게 휜 갈고리가 달린 사슬을 꺼내 들었다.
“지금이다!”
신호와 함께 사방에서 날카로운 파열음이 울려 퍼졌다. 잘 벼린 검이 단단한 철광석 같은 몸뚱어리에 부딪힐 때마다 불꽃이 튀었다.
하지만 놈은 만만치 않았다.
“키에엑!”
귀가 찢어질 듯한 괴성과 함께 수십 개의 굵은 다리가 사람들의 머리 위를 위협적으로 스치고 지나갔다.
징그럽고 뻣뻣한 털 사이사이에 엉겨 붙어 있던 진흙과 주먹만 한 돌멩이가 하늘에서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놈이 사람들이 서 있는 곳을 몸으로 쾅쾅 내려칠 때마다 지면에는 거대한 자국이 움푹 팼다.
“……윽!”
갈라지고 부서지는 땅 위에서는 서 있는 것조차 힘들었다. 비처럼 쏟아지는 낙석을 미처 피하지 못한 몇몇 기사들의 이마에서 피가 흘렀다.
하지만 누구 하나 물러서는 이가 없었다.
그리고 그건 로렐라도 마찬가지였다.
“누나, 위험해!”
그녀는 자신을 억지로 이끄는 카셀의 손을 뿌리치고는 허공을 똑바로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걱정하지 마세요. 지금도 이렇게 주접 가득한 애정을 듬뿍 받고 있는걸.”
“누…….”
“따라 죽긴 누가 따라 죽는다는 거야. 쿠키!”
그 순간 기묘한 일이 벌어졌다. 카셀 그 자신도 한 번 겪은 적 있었던, 도저히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그런 일이.
“키에에에에에엑!”
마물이 갑자기 마구잡이로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땅에 몸을 부딪치거나 비틀어대는 등, 누가 봐도 고통에 찬 몸짓이었다.
아연하게 그 광경을 바라보던 카셀의 눈동자 위로, 옅은 금빛이 화악 번져 나갔다.
쩌적, 소리와 함께 금이 가고 있는 마물의 단단한 몸통 사이에서 뿜어져 나온 빛이었다.
“조심해!”
“로렐라, 이쪽으로!”
그때 시드와 펠리어트가 각각 그들 사이로 뛰어들었다.
펠리어트는 한쪽 팔로 로렐라를 감싸 안은 채 머리 위로 떨어지는 마물의 껍질을 재빨리 검으로 쳐냈다.
시드도 어깨를 다친 카셀과 함께 잽싸게 옆으로 피했다.
“키엑!”
몸 안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에 대항하듯 마치 재와도 같은 검은 가루가 사방으로 퍼졌다. 그걸 들이마셨는지 여기저기서 괴로운 기침 소리가 터져 나왔다.
펠리어트의 조각 같은 얼굴 또한 검댕이라도 바른 듯 엉망이 되었지만, 그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쓰러뜨리려면 머리를 잘라야 해.”
로렐라가 덜덜 떨리는 손으로 그의 팔을 잡았다.
“당신밖에 없어……!”
카셀은 어깨를 다쳤다. 그리고 성기사단을 비롯한 다른 사람들은 떨어진 곳에서 각자 분투하느라 괴물을 처치할 여력이 없었다.
“걱정하지 마. 반드시 구해 낼 테니까.”
펠리어트가 고개를 묵직하게 끄덕였다.
당신을 위해서라도.
너무 낮아 차갑게까지 느껴지는 목소리가 귓가를 스친 순간.
검은 망토가 눈앞에서 한 번 펄럭이더니, 빠르게 사라졌다.
* * *
“끼에에엑!”
날뛰는 마물의 몸을 타고 민첩하게 오르자, 어느새 펠리어트의 발아래에 더욱 생생한 금빛이 가득 퍼졌다.
그러나 반대로 그의 눈은 더더욱 검게 가라앉았다.
이 눈부신 금빛은, 레어넌 베르하르트가 내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죽이고 싶을 정도로 원망스러운 남자.
그는 자신은 본 적도 없고, 만들어 낼 수도 없는 다양한 표정을 로렐라에게서 이끌어 냈다.
그때마다 얼마나 지독한 패배감에 시달렸는지 그 누구도 모르겠지.
서로 마주 보고 다정히 웃는 두 사람을 바라볼 때면, 심장이 마치 불에 지진 것처럼 고통스러웠다는 것도.
하지만 그를 구하지 못하면, 로렐라는 평생 봄처럼 웃지 못할 게 틀림없었다. 펠리어트에게 있어서 그것만큼 두려운 것은 없었다.
그래, 그러니까.
“레어넌!”
펠리어트는 큰 소리로 그의 이름을 부르며 팔을 치켜들었다.
크고 날카로운 검이 날렵한 호선을 그린 동시에, 마물의 목이 깔끔하게 잘려 나갔다.
“끼엑!”
깨끗하게 잘린 단면 위로 피가 분수처럼 뿜어진 그 순간, 눈부신 섬광이 모두의 눈앞을 뒤덮었다.
“윽……!”
펠리어트는 커다란 마물의 몸뚱이와 함께 그대로 땅에 나뒹굴었다. 떨어지면서 혀를 깨물기라도 했는지, 입술 사이로 짙은 피가 흘러내렸다.
하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벌떡 일어나 여전히 움찔거리는 마물의 배에 검을 찔러 넣었다. 그러고는 아주 조심스럽게 가르기 시작했다.
“공작님……!”
사방에서 기사들과 용병들이 몰려왔지만, 펠리어트는 숨소리조차 내지 않은 채 온 신경을 집중했다.
땀방울이 관자놀이를 타고 주르륵 흘러내린 그때.
칼끝에 무언가가 닿았다.
“여기군.”
펠리어트는 안쪽 깊숙이 손을 집어넣었다. 몇 번 휘저은 끝에 손에 닿은 것을 잡고는 그대로 밖으로 끄집어냈다. 바로 레어넌의 팔이었다.
상처 하나 없는 모습이었지만, 아름답게 흔들리던 금발은 물론, 늘 단정하고 깔끔했던 흰 정복까지 마물의 체액으로 엉망이 되어 있었다.
“다, 단장님!”
그가 온전히 밖으로 나오자마자 성기사단원들이 달려들어 그를 바닥에 눕혔다.
“크흡…….”
머리가 땅에 닿자 레어넌의 입에서 쿨럭거리는 기침이 터졌다.
“단장님!”
“무사하셨군요!”
언제나 기개 넘치고 절도 있던 기사들의 입에서 감정을 감추지 못하고 기쁨에 차 울먹거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로렐라의 얼굴에도 그제야 비로소 엷은, 아주 엷은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리고 그걸 옆에서 물끄러미 바라보는 펠리어트의 눈빛은 마치 세상의 봄을 다 가진 것처럼 따듯하고 다정하기 그지없었다.
* * *
레어넌은 상처 하나 없이 무사하긴 했지만, 체력 소모가 심한 듯했다.
그의 수하는 마물의 몸속에서 성력으로 계속 버텼기 때문에 그런 것 같다고 했다. 이대로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회복하겠지만, 치료를 속행하려면 신관이 와야 한다는 말도 함께 해 주었다.
하지만 이미 고원 깊숙이 들어온 뒤였다. 여기까지 신관을 무사히 부르는 것도 힘들고, 반대로 레어넌을 치료하기 위해 돌려보내는 것도 무리였다.
레어넌뿐만이 아니라, 오늘 마물 때문에 크고 작은 부상을 입은 사람들이 여럿 생겼기 때문이었다.
시엘로 단장은 더 나아가는 건 무리라고 판단하고 오늘은 이만 여기서 쉬는 게 좋겠다며 제의했다.
고개를 끄덕인 로렐라는 임시로 만든 천막으로 향했다. 그러고는 안쪽에 오도카니 앉아 붕대를 감고, 또 간단한 빵과 육포로 허기를 달래는 사람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다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아무도 모르게 천막 뒤를 들추고 바깥으로 나왔다.
낮과는 다르게 얼어붙은 것처럼 차가운 바람이 그녀의 뺨을 할퀴고 지나갔다.
이윽고 그녀는 커다랗게 땅이 갈라진 곳으로 다가가 섰다.
마물이 튀어나왔던 곳이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그 거대한 동공은 해가 진 뒤에 보니 더욱더 을씨년스럽고 무시무시했다.
……만약 이런 일이 고원이 아니라 아우레아 도심 한복판에서 벌어졌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짧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아무 감정도 담기지 않은 시선으로 아래를 무심히 바라본 것도 잠시.
“……쥐새끼처럼 숨어서 뭘 하는 거야?”
타는 듯한 붉은 눈동자에 날카로운 살기가 비쳤다.
이 감정을 분노라고 지칭하는 건 오히려 너무나도 가볍게 느껴질 정도로 격렬한 무언가가 그녀의 몸을 관통하는 기분이었다.
로렐라는 아래쪽에 시선을 고정한 채 가라앉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쿠키.”
그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마치 천둥이라도 치듯 땅속에서 우르릉, 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쿠키 사용.”
로렐라는 쉴 새 없이 번쩍거리는 창을 바라보며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사용.”
우우웅!
화면에 가득 차 있었던 보상이 빠르게 줄어들어 갔다. 그에 비례해 지축을 뒤흔드는 정체불명의 울림도 점점 더 커져만 갔다.
이윽고 거대한 해일과도 같은 시커먼 장막이 그녀의 눈앞을 새까맣게 뒤덮었다. 이대로 하늘까지 닿는 건 아닐까 생각할 정도로 어마어마한 크기였다.
악몽을 꾸는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기괴한 움직임이 이어졌다. 소름 끼치도록 기묘하게 꾸물거리는 그것들은 수백. 아니, 수천 마리의 사령이 한데 뒤엉킨 집합체였다.
띵동!
「쿠키를 모두 사용했습니다.」
메시지가 뜨자마자, 검은 무리가 앞으로 쏜살같이 내달리기 시작했다. 황량한 고원 한복판에 새카만 폭풍우가 밀려드는 듯한 광경이었다.
어딜 가는 걸까?
그 의문은 오래 가지 않았다. 시스템을 통해 아낌없이 쿠키를 투척한 그들의 바람과 자신의 목적은 똑같았으니까.
로렐라는 두 눈을 천천히 깜빡이며 조용히 숨을 골랐다.
“……반드시 내 손으로 죽일 거야.”
굳은 표정으로 짧게 웅얼거리고는, 그대로 말에 박차를 가했다.
검은 무리의 뒤를 빠르게 쫓는 그녀의 머리카락이 거친 바람에 헝클어졌다.
달빛에 드러난 그것이 오늘따라 유독 붉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