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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화. 절대 이대로는 (162/173)


162화. 절대 이대로는
2023.01.18.


불침번을 제외하고 모두가 잠든 새벽녘.

고원에는 그 어느 때보다 차가운 바람이 불어치고 있었다.

레어넌은 눈을 붙이기는커녕 곁에서 잠든 로렐라의 옆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의 옷은 낮과 조금도 달라진 게 없었다. 목까지 단정하게 채운 단추는 물론, 손에 낀 흰 장갑도 여전했다.


“단장님.”

그때 주변을 순찰하고 돌아온 성기사단원이 그를 나지막이 불렀다.


“조금이라도 눈을 붙이시는 게 어떻습니까.”

하지만 레어넌은 고개를 저으며 입술에 검지를 가져다 댔다.

로렐라가 깨지 않도록 조용히 하라는 신호였다.

기사는 결국 짧게 한숨을 내쉬고는 모닥불 근처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레어넌은 다시금 짙은 주홍빛으로 물든 로렐라의 얼굴을 응시했다.

새하얀 이마와 기다란 속눈썹, 그리고 작고 오뚝한 콧날과 도톰한 입술까지.

아무리 눈에 담고 또 담아도 전혀 질리지 않았다. 그저 바라만 볼 뿐인데도 가슴이 뻐근해질 정도였다.

대체 언제부터였을까. 그녀를 이토록 크게 마음에 담게 된 것이.

처음엔 그저 겁에 질려 도망치던 여자를 도와주고 싶을 따름이었다. 그녀가 공작 부인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을 때는, 비록 티를 내진 않았지만 레어넌도 적잖이 놀랐었다.

가까운 사이까진 아니었지만, 레어넌과 펠리어트와는 전장을 함께 누빈 전우였다. 매사에 냉정한 그와의 결혼 생활이 순탄치 않았을 거라는 건 쉬이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런데도 로렐라는 언제나 밝고 씩씩했다. 간혹 조금 엉뚱한 면모를 보이긴 했어도 그 또한 그녀의 매력이었다.

그는 얼마 전, 넌지시 자신에게 건넨 아버지의 말을 떠올렸다.


‘레어넌, 이제 슬슬 가정을 꾸려야 하지 않겠느냐?’

 
기사단을 이끄는 책임자일 뿐만 아니라 베르하르트 가문을 이어 나가야 하는 후계자로서, 언젠가는 배필을 들여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요즘 가족들은 물론, 주위 사람들까지 그의 행보를 유독 눈여겨보고 있다는 것도.

레어넌 베르하르트가 한 귀족 영애를 마음에 두고 있다는 것, 그녀의 마음을 얻기 위해 온갖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는 소문은 이미 수도에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퍼져 있었다.

그리고 그 소문이 부모님 귀에 들어갔을 때 두 분은 당황하기보단 오히려 반기는 눈치였다. ‘그런 쪽’으로 도통 무관심했던 아들에게 드디어 좋아하는 여자가 생겼다는 사실만으로도 기쁘기 그지없던 것이었다.

가족끼리 모일 땐 모두가 로렐라 메이레드에 대한 호기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기도 했다.

하지만…….

순간 레어넌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은근한 기대를 내비치던 부모님께 어쩌면 큰 불효를 하게 될지도 모르겠다는 예감이 들어서였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의 마음은 이미 로렐라 메이레드에게 주었으니까. 게다가 그걸 평생 되찾을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그런 채로 다른 여자를 배필로 맞이할 수는 없었다.

가문을 위해 사랑 없이 형식뿐인 결혼 생활을 유지하는 귀족들이 수도 없이 많다는 건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레어넌에게 그건 죽었다 깨어나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상념에 잠겨 있던 와중에, 문득 어디선가 시선이 느껴졌다.

레어넌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모닥불 너머로 싸늘하게 굳은 검은 눈동자가 자신을 차갑게 응시하고 있었다. 레어넌과 마찬가지로 밤새 눈 한 번 제대로 붙이지 않은 펠리어트였다.

그의 곁에도 검은 망토를 휘감은 기사들이 포진해 있었다. 그중 가장 가까운 수하로 보이는 남자는 펠리어트의 눈치를 보며 계속 안절부절못했다.

아무래도 펠리어트가 자신처럼 뜬눈으로 밤을 새운 걸 염려하는 모양이었다.

잠시 레어넌의 얼굴에 못 박힌 듯 고정되어 있던 펠리어트의 시선이 이내 천천히 옆으로 향했다.

로렐라를 눈에 담은 그 순간, 얼음처럼 차갑기만 했던 눈동자가 언제 그랬냐는 듯 따듯하게 변했다.

굳어 있던 입가에도 다정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 모습에 레어넌은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다른 사람도 아닌 펠리어트 공작이 저런 표정을 짓다니. 오랜 시간 동안 그를 지켜봐 왔던 레어넌조차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펠리어트는 확실히 많이 달라진 듯했다.

예전 같았으면 그녀의 곁에 누구도 얼씬도 하지 못하게 했을 텐데. 저렇게 떨어져서 조용히 바라보는 게 고작이라니.

그를 이토록 변하게 만든 사람은 틀림없이 로렐라겠지.

세상에 그 누구도 감히 해내지 못할 일을 이루어 낸 그녀가 새삼 대단하게 느껴졌다.

레어넌은 다시 한번 그 얼굴을 눈에 새기고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그의 움직임에 또다시 부산스러워진 주위 기사들에게 쉿, 하고 신호를 보내고는 그대로 천천히 자리를 떴다.

모닥불에서 채 몇 걸음 떨어지지도 않았는데 차가운 공기가 그의 얼굴을 에워쌌다.

어디선가 불어오는 바람은 여전히 스산하기 짝이 없었으며, 조금씩 밝아지는 하늘조차 먹구름이 잔뜩 드리워 있었다.

레어넌의 새파란 눈동자에 어느새 날카로운 빛이 서렸다. 낮에 수많은 짐승을 상대로 검을 휘두른 것도 모자라, 밤새 눈 한 번 붙이지 않은 사람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였다.

순찰을 나서는 그의 뒤를 몇몇 성기사단원들이 조용히 따랐다.

레어넌은 사방을 꼼꼼히 살피며 걸음을 옮겼다. 꽤 멀리 떨어진 곳까지 이동한 그가 뒤를 흘끗 돌아본 그때였다.

쿵!

갑자기 어디선가 커다란 굉음이 울려 퍼진 동시에 레어넌의 발밑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다, 단장님!”

“대열에서 벗어나지 마라!”

당황한 단원들의 목소리가 사방에 메아리쳤다.

그러나 레어넌은 놀라긴커녕 침착하게 은빛 검을 뽑아 들었다.

그 순간.

레어넌이 선 지척의 땅이 무섭게 갈라지더니, 이내 큰 소리와 함께 지면에 단단하게 박혀 있던 암석들이 위로 솟구쳤다.


“끼에에에에엑!”

귀를 먹먹하게 만드는 소름 끼치는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소리를 따라 뒤를 돌아본 그 순간.

길고 시커먼 그림자가 레어넌을 덮쳤다.

마차 정도는 가뿐히 삼킬 수 있을 만큼 크게 벌어진 흉측한 아가리 속으로, 눈부신 금발이 사라졌다.


“안 돼!”

바로 앞에서 그 광경을 고스란히 목도한 기사 단원이 절규했다.

하지만 그를 통째로 삼킨 마물은 그대로 갈라진 땅속으로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그 누구도 손 쓸 틈 없이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 * *



“마물이 레어넌 단장님을 삼키고는…… 그대로 사라졌다고요……?”

시엘로 용병 단장이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간 전장에서 수없이 많은 일을 겪은 덕분에 웬만한 상황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그조차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이게 대체…….”

시엘로 단장은 끝까지 말을 잇지 못했다. 마물이 튀어나왔다던 갈라진 땅을 바라보는 그의 눈에 어느새 분노가 차올랐다.

믿기지 않는 현실을 부정하고 싶은 건 시엘로 단장뿐만이 아니었다.


“어떻게든 놈을 뒤쫓아야 한다!”

“하, 하지만 바닥이 너무 깊습니다. 아래로 내려가는 건 현재로서는 무리……일 듯합니다.”

레어넌을 구하기 위해 필사의 노력을 다하던 성기사단원들 사이에서도 점차 비관적인 의견이 흘러나왔다.


“……어떻게 이런 일이.”

결국 누군가가 비통한 신음 같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구조작업에 함께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던 붉은 늑대 기사단은 물론, 펠리어트의 얼굴 또한 참담했다.

그러던 중, 펠리어트의 시야에 문득 누군가의 모습이 들어왔다.

갈라진 땅끝에 아슬아슬하게 서서, 바닥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어 시커먼 구멍 속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는 로렐라가.

그녀의 얼굴은 무척이나 창백했다. 떨리는 손으로 몇 번이나 눈가를 쓸어내리는 걸 보니 좀처럼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모양이다.

하지만 어쩐지 눈빛만큼은 맑고 또렷했다. 눈동자는 커다란 불이 옮겨붙은 듯 평소보다 유독 붉게 타오르고 있는 것만 같았다.


 
자칫하면 그대로 떨어질지도 모르는 위치에 서 있는 모습이 무척이나 아슬아슬해 보였다.

펠레어트는 그녀의 곁으로 가만히 다가갔다. 그러고는 로렐라가 놀라지 않도록 어깨를 조심스럽게 감싸고는,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나게 했다.


“……단장님을 구해야 합니다.”

그때, 누군가가 콱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는. 아니, 단장님은 그 누구보다도 많은 마물을 상대하신 분입니다. 이대로 당하셨을 리 없습니다.”

레어넌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보좌하던 심복이었다. 그는 펠리어트와 로렐라 곁으로 다가와 붉게 충혈된 눈으로 호소하듯 말을 이었다.


“절대, 이대로는…….”

그는 떨리는 주먹을 꽉 쥐고는 힘겹게 숨을 토해 냈다.


“레어넌 단장님을 구해야 한다는 것에는 아무런 이견이 없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하면 된단 말입니까?”

시엘로 단장이 난처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네처럼 생긴 마물이 사람을 삼키고 그대로 땅속으로 도주하다니……. 이런 일은 듣지도 보지도 못했습니다.”

사람들을 가장 절망스럽게 만든 부분이 바로 이것이었다.

성기사단원들은 물론 시엘로 용병단, 그리고 펠리어트 역시 레어넌이 이대로 당했을 거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문제는 마물이 땅속으로 얼마나 내려갔는지 알 수가 없다는 거였다.

사람들의 시선이 마물이 사라지면서 남긴 흔적에 닿았다. 뻥 뚫린 구멍은 그 끝을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새까맸다.

제아무리 긴 밧줄을 공수해 온다 해도, 과연 바닥에 닿기는 할지 그 누구도 장담할 수 없었다.

게다가 그 끝에서 마물을 발견한다 해도 과연 어떻게 싸울 수 있단 말인가. 놈의 은신처에서 어떤 일이 있을지 모르니, 모두가 선전한다 해도 어려운 싸움이 될 게 뻔했다.


“……지네처럼 생긴 마물이라고요?”

그때, 가느다란 목소리가 절망 어린 침묵을 뚫고 흘러나왔다.

의견이 분분한 사람들 사이에서도, 오로지 땅 밑을 바라보고 있던 로렐라의 목소리였다.


“그렇습니다.”

레어넌 단장이 사라진 광경을 목격한 단원이 잽싸게 고개를 끄덕였다.


“둥근 몸통이 끝도 없이 이어져 있었고, 마치 통나무처럼 굵은 다리가 수십 개나 달린 놈이었습니다.”

“그럼 맞네요. 예전에 본 적이 있어요.”

그 말에 펠리어트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일순 혼란스러운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그렇게 흉측한 마물을 본 적이 있었다고? 대체 언제?

하지만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여전히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그 마물을 어떻게 하면 불러낼 수 있는지도 알아요.”

“그거야…….”

줄곧 말없이 뒤에 서 있던 카셀이 조용히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물론 마물을 불러내는 건 아예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해적선에서 레이나 아벤도트가 사용했듯이, 마물을 조종하는 마도구는 은밀하게 거래되곤 했으니까.

하지만 아주 희귀해서 부르는 게 값일 정도였다.

길드가 작정하고 나선다면야 못 구할 것도 없었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필요했다. 심지어 많은 길드원이 고원으로 함께 온 터라 움직일 수 있는 인력이 평소보다 적었고.


“짐승의 뼈가 필요해요.”

로렐라는 여전히 의구심이 가득한 좌중을 바라보며 힘주어 말했다.

짐승의 뼈라고?

카셀이 어리둥절한 것도 잠시.


“썩어 가는 살점이 붙어 있으면 더더욱 좋고요. 지독한 악취에 반응하는 걸 분명히 봤거든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로렐라의 말을 경청하던 그의 눈동자에 일순 호기심이 어렸다.


“사방에 가득 뿌려 놓고 유인해 보죠.”

“하지만 이 건조한 고원에서 썩어 가는 짐승의 사체를 어떻게 구하…….”

무심코 중얼거리던 시엘로 단장이 순간 짧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멀지 않은 곳에 목이 잘린 이리 떼의 사체가 산처럼 쌓여 있다는 사실이 뒤늦게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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