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화. 괴로움으로 미쳐 보렴
(161/173)
161화. 괴로움으로 미쳐 보렴
(161/173)
161화. 괴로움으로 미쳐 보렴
2023.01.14.
검은 그림자가 머리 위를 덮친 순간, 경악한 사람들의 얼굴이 카셀의 눈에 들어왔다.
“안 돼!”
누군가 비명을 지른 동시에 놈의 발톱인지 이빨인지 알 수 없는 크고 날카로운 무언가가 그의 어깨 위로 콱 박혀 들었다.
“……윽!”
불에 달군 검으로 헤집는 듯한 고통이 전신을 휘감았다.
카셀이 몸을 크게 휘청거리자, 뜨거운 피가 땅에 후두둑 쏟아졌다.
“으아악!”
“주, 죽지 않았던 건가?!”
당황한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울려 퍼졌다.
하지만 더욱 놀라운 일은 그 뒤에 벌어졌다.
카셀을 공격한 놈이 그대로 그를 훌쩍 지나쳐 앞으로 달려 나가는 게 아닌가?
방해하지 말라는 듯 으르렁거리는 울음소리가 귓가에 섬뜩하게 스며들었다.
죽었던 놈이 다시 살아난 것도 당혹스러운데, 바로 눈앞에 있는 먹잇감을 지나쳐 굳이 앞으로 내달리는 이 상황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모든 것이 의문투성이인 상황 속에서 카셀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짐승의 주둥이에서 새어 나온 말을 잘못 들은 게 아니라면, 심지어 자신을 지나쳐 앞으로 돌진한 행동으로 보았을 때.
……놈들이 노리는 건, 로렐라 메이레드다.
“빌어먹을!”
카셀은 고통도 잊은 채 앞으로 빠르게 내달렸다. 그의 등 뒤에서, 어느새 되살아난 짐승들이 일제히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용병들 근처에 쓰러져 있던 놈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커헝!”
눈동자를 시커멓게 물들인 채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낸 짐승이 사람들의 머리 위로 펄쩍 뛰어오른 그 순간.
휘익!
매서운 바람 소리와 함께 은빛의 날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허공을 그었다.
하나로 길게 묶은 금발이 흩날리고, 깔끔하게 잘린 짐승의 목이 그대로 흙바닥에 뒹굴었다.
육중한 몸이 다시금 힘없이 쓰러졌다.
그 모습을 본 사람들이 너나 할 것 없이 목청을 높였다.
“목이다! 목을 잘라야 한다!”
“이 지독한 놈들……!”
그러나 거대한 짐승의 목을 자르는 일은, 급소를 찔러 죽이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렵고 힘들었다.
곧 여기저기서 사투가 벌어졌다.
펠리어트 역시 그 어느 때보다도 날렵하게 움직였다. 펄럭이는 검은 망토 사이로 은빛의 날이 드러났다 사라지길 반복했다. 날이 허공을 가를 때마다 어김없이 잘려 나간 목이 땅바닥을 나뒹굴었다.
시간이 지나자 레어넌과 펠리어트의 이마에서는 구슬땀이 흘러내렸다.
카셀도 지지 않았다.
그는 자신을 지나쳐 앞으로 달려가는 놈들을 상대로 미친 듯이 검을 휘둘렀다.
그때마다 상처에서 뜨거운 피가 뿜어져 나왔지만 멈출 수 없었다. 이놈들이 누굴 공격하려는 건지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괜찮아?!”
이 난장판을 뚫고 시드와 길드원들이 카셀에게로 달려왔다. 시드는 창백해진 그의 얼굴을 보고 무섭도록 표정을 굳혔다.
“너 당장 지혈부터 해야 돼! 일단 이쪽으로…….”
하지만 카셀은 절 부축하려는 사람들을 가볍게 밀쳐 냈다.
“가만히 좀 있어, 이 미친놈아!”
시드의 입에서 거친 욕설이 터졌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이로 소맷자락을 물었다. 그러고는 천을 찢어 내어 그대로 어깨에 아무렇게나 칭칭 감았다.
그 모습에 시드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카셀이 이렇게 나오는 이상, 누구도 그를 말릴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결국 그는 카셀을 부축하는 대신 검을 뽑아 들었다. 다른 길드원들도 마찬가지였다.
어떻게든 치료받게 만들려면, 이 사태를 한시라도 빨리 끝내는 편이 나을 테니까.
되살아난 짐승들은 다른 사람들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수많은 공격이 쏟아졌지만, 그저 약속이라도 한 듯 어느 한 곳을 향해 달려 나갔다.
카셀과 길드원들은 이리 떼의 앞을 막아선 채로 미친 듯이 달려 나가는 짐승들의 목을 베고, 또 베었다.
로렐라 주위를 에워싼 채 대항하는 기사들과 용병들도 마찬가지였다. 도무지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이 기괴한 상황 속에서도 누구 하나 당황하거나 실수하는 이 없이 침착한 모습이었다.
이윽고 카셀의 발밑에 사납게 얼굴을 구긴 목 하나가 툭, 떨어졌다.
마지막 남은 한 마리였다.
“하아…….”
카셀은 비로소 짙은 피로감을 느끼며, 피로 물든 얼굴을 훔쳐 냈다.
발밑이 빙빙 도는 것처럼 어지러웠지만 아직은 자신의 몸을 돌볼 때가 아니었다.
그는 재빨리 뛰어 일행에게로 돌아갔다.
레어넌의 금빛 머리카락은 물론, 펠리어트의 망토 역시 피가 튀어 엉망이었다.
하지만 그 사이에 선 로렐라만큼은 완벽하게 멀쩡한 모습이었다.
그녀의 손에도 자신이 준 검이 들려 있긴 하지만, 핏방울이 튀긴커녕 머리카락 한 올 흐트러짐이 없었다.
카셀의 마음에 짙은 안도감이 차올랐다.
그제야 비로소 왼쪽 어깨를 타고 불로 지진 듯한 고통이 퍼져 내려갔다.
두 눈이 마주치자마자 로렐라는 검을 그대로 땅에 떨어뜨렸다. 그러고는 절 에워싼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카셀에게로 달려왔다.
“괜찮아?!”
피가 뚝뚝 흘러내리는 어깨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응. 괜찮고말고.”
카셀은 평소와 다름없이 능청스럽게 입술을 끌어올렸다.
“누나, 그보다 할 말이…….”
“일단 상처를 치료해야 하니까 앉아.”
“내가 아까 이놈들을 죽였을 때…….”
“앉아!”
“……네.”
그 어느 때보다도 날카로운 목소리에 카셀은 일단 시키는 대로 얌전히 바닥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길드원들이 비상약이 들어 있는 주머니를 들고 카셀 곁으로 다가왔다. 다행히 상처는 아주 깊은 건 아닌 듯했다.
조금……. 조금 많이 쓰라려서 그렇지.
로렐라는 카셀의 처치가 끝날 때까지 곁에서 한시도 떨어지지 않았다.
심지어 치료를 받는 동안 손을 꼭 잡아 주기까지 했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카셀은 고통이 전부 사라진 듯했다. 정말이지 신기한 일이었다.
“뼈가 부러지지는 않아 다행이군요.”
시엘로 단장 또한 다가와 카셀을 살펴 주었다. 특별히 주문했다는 귀한 진통제를 건네주기도 했다.
물도 없이 약을 꿀꺽 삼키는 카셀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시엘로 단장이 문득 고개를 들어 그의 뒤를 바라보았다.
“맙소사…….”
이내 낮게 탄식을 내뱉은 그의 안색은 창백하기 그지없었다.
목이 잘려 있는데도 짐승의 사체는 여전히 움찔거리고 있기 때문이었다. 계속해서 앞으로 돌진하려는 듯이.
사람들이 대열을 정비하는 틈을 타 카셀은 조금 떨어진 나무 그늘로 로렐라를 데리고 갔다.
레어넌과 펠리어트, 그리고 시엘로 단장도 그 뒤를 함께 따라왔다.
과연 다른 사람이 들어도 괜찮을까 잠시 고민하는데, 로렐라가 어느새 그 마음을 읽었는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허락한다면야 상관없는 일이었다.
카셀은 자신이 겪은 일을 상세히 이야기했다. 죽어 나자빠진 짐승의 입에서 어떤 말이 흘러나왔는지도.
“뭐, 뭐라고요?”
시엘로 단장이 너무 놀란 나머지 더듬거리며 되물었다.
“그런 말도 안 되는…….”
그 뒤를 이어 펠리어트가 신음하듯 낮게 읊조렸다. 레어넌 역시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다만 로렐라는 아무런 말도 없이 그저 심각한 눈빛으로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죽은 짐승이 다시 살아난 건 말이 되나요?”
카셀의 말에 또다시 침묵이 이어졌다.
이윽고 그걸 깬 사람은, 다름 아닌 레어넌이었다.
“누군가 마법으로 조종을 하고 있군요.”
그의 목소리는 평소와 다름없이 차분했다. ‘성기사단장’이라는 직함답게 누구보다 이 사태를 빠르게 파악한 듯했다.
“조사차 참고한 오래된 문헌에서, 이와 비슷한 사례를 본 적이 있습니다.”
펠리어트도 고개를 끄덕이며 곧장 말을 받았다.
“그 힘으로 당신을 해치려는 모양이군.”
“다들 잘 아시겠지만, 고원에 돌아다니는 맹수들은 한두 마리가 아닙니다. 아마 오늘 덤벼든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심각한 얼굴로 입을 열었던 시엘로 단장은 끝까지 말을 잇지 못하고 굳어 버린 얼굴을 마구 손으로 쓸었다.
“그 여자를 빨리 찾아내야겠어요.”
그때, 서늘한 목소리가 모두의 귓가에 내려앉았다.
“그…… 여자라뇨?”
시엘로 단장이 손을 멈추고 되물었다.
“절 죽이려 하는 사람이요. 아마 틀림없이 어딘가에 숨어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겠죠. 고양이가 쥐를 가지고 놀 듯, 충분히 즐기려는 심산이 분명해요.”
로렐라는 말을 멈추고 붕대를 동여맨 카셀의 어깨를 잠깐 동안 응시했다.
“……감히 제가 아끼는 사람을 다치게 한 걸 후회하게 만들어 주겠어요.”
그 어느 때보다도 싸늘한 한기가 모두의 목덜미를 휘감았다.
반면 그녀의 붉은 눈동자에는 마치 뜨거운 불이 타오르는 듯했다.
* * *
기기괴괴하게 솟은 암석 사이로 차가운 바람이 쉴 새 없이 불어왔다. 그 속에는 희미한 피 냄새가 실려 있었다.
“후훗.”
어느새 검게 물든 하늘에 떠오른 샛별을 바라보며 샬로네즈는 저도 모르게 살짝 소리 내어 웃었다.
“생각지도 못했는데 알아서 다 모여 주다니. 정말 잘 됐지 뭐야.”
처음에는 조금 당황했다. 레어넌 베르하르트나 펠리어트 체임버스 같은 거물들이 로렐라를 보호하겠다고 무장을 한 채 나타났으니.
하지만 샬로네즈는 곧 생각을 고쳤다.
로렐라의 눈앞에서 그들을 죽이면, 그녀가 얼마나 충격을 받을지 기대된 탓이었다.
엷은 복숭앗빛을 띤 입술이 매끄러운 호선을 그렸다.
그때, 그녀의 곁에 누군가가 망토를 펄럭이며 나타났다.
네가 데리고 다니는 놈들보단 훨씬 나을 거라며 에르헨 황제가 붙여 준 자들이었다.
“어깨를 다친 남자는 아무래도 보통 사람이 아닌 듯합니다. 그자의 정체를 캐내기 위해 부하들을 보냈습니다.”
자신을 무시하는 거나 다름없는 말이었지만, 분하게도 에르헨의 말은 사실인 듯했다. 굳이 지시를 내리지 않아도 이렇게 알아서 척척 나서 주니 말이다.
샬로네즈는 남자를 향해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주변의 황량한 풍경에 무심히 시선을 맞췄다.
바람처럼 나타나 맹활약을 펼친 남자의 아름다운 은발이 자꾸만 눈앞에 아른거렸다.
돌진하는 맹수에게 등을 보여선 안 된다는 것은 상식이건만, 그는 그런 것 따윈 아랑곳하지 않은 채 기꺼이 어깨를 내주기까지 했다.
뒤에 떨어져 있었던 로렐라와 다른 일행에게 경고하기 위해서.
그녀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제 한 몸 던지는 것쯤 아깝지 않다는 태도였다.
고운 선을 자랑하는 조붓한 턱이 바르르 떨린 것도 잠시.
“아하하하핫!”
그녀의 입에서 비틀린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내 생각보다 엄청 대단한 분이셨네. 로렐라 메이레드는.”
노을처럼 고운 주홍빛 눈동자가 번뜩였다.
“공작 각하와 성기사단장뿐만이 아니었다니…….”
태연한 목소리였지만 그녀의 눈빛은 어느새 살기가 가득했다.
“뭐, 상관없지. 곁에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 여자가 느낄 고통도 더욱 클 테니까.”
눈앞에서 소중한 것을 잃는 순간 사람의 얼굴이 어떻게 일그러지는지, 샬로네즈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너도 어디 한번 괴로움으로 미쳐 보렴.
아마 그때는 내게 제발 죽여 달라고 빌게 될지도 모르지.
원한이 쌓인 만큼 쉽게 죽이는 건 시시하고 재미없었다. 어떻게든 미쳐 가는 모습을 봐야 속이 조금이나마 시원해질 듯싶었다.
물론 저토록 많은 인원을 상대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예전의 자신이었다면 아마 절대로 불가능했겠지.
하지만 지금은…….
샬로네즈는 오싹한 미소와 함께 천천히 손을 폈다.
그녀의 손끝에서 붉은 오라가 일렁였다.
‘내 힘을 너에게 나눠 주지.’
그 빛을 따라 에르헨 황제의 목소리가 함께 들려오는 듯했다.
‘그러니 반드시 위너드 벨레드리안과 로렐라 메이레드를 죽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