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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화. 죽여라 (160/173)


160화. 죽여라
2023.01.11.



 
사시사철 황량한 데다가 언제 어디서 뭐가 튀어나올지 모르는, 그야말로 갖가지 위험 요소가 도사리고 있는 마엘라 고원.

그랬던 고원이…….


“로렐라, 길이 험하니 조심하십시오. 말이 갑자기 크게 흔들릴 수도 있으니까요.”

“난 괜찮으니 이쪽으로 좀 더 가까이 와. 앞에 큰 장애물이 있군.”

이토록 평온한 곳으로 느껴진 적이 있었던가?


“…….”

……아니, 없었다.

또다시 자신을 향해 쏟아진 무수한 시선에 로렐라는 저도 모르게 뜨끈해진 뺨을 살짝 문질렀다.

펠리어트와 레어넌은 양쪽에 서서 극진히 그녀를 호위했다. 심지어는 그들의 뒤를 붉은 늑대 기사단과 성기사 단원들이 줄줄이 따랐고.

철갑처럼 단단한 드래곤의 날개를 두른다 해도 이보다 더 안전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그만큼 든든하고 믿음직스러운 광경이었다.


“이거 우리가 할 일이 없겠는데.”

심지어는 시엘로 단장마저 이렇게 말했을 정도니까.

다소 농담처럼 한 말에 용병들은 너도나도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이미 한 번 와 본 적 있는 장소인 데다가, 든든한 지원군까지 늘어난 덕분에 용병들의 분위기는 한결 느긋하고 편안했다. 물론 그와는 별개로 주위를 살피는 눈빛은 변함없이 날카로웠다.

붉은 늑대 기사단과 성기사 단원들도 마찬가지였다.

비록 한쪽은 눈처럼 흰 제복 차림이고, 다른 한쪽은 새카만 갑옷을 두르고 있어 마치 서로 반목하는 듯 보이긴 하지만, 그들은 사실 예전에 함께 전장을 누빈 전우였다.

묵묵히 걸음을 옮기는 와중에도, 서로 눈이 마주치면 오랜만에 다시 만난 동료를 반가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이처럼 모두가 화기애애한 와중에, 홀로 이 세상의 모든 불행을 떠안은 것처럼 우울한 남자가 한 명 있었다.

바로 카셀 베스페라였다.


‘젠장.’

로렐라의 등 뒤에서 찰랑거리는 아름다운 붉은 머리를 홀린 듯 바라보던 카셀이 도끼눈을 떴다. 양옆에 있는 꼴 보기 싫은 놈들의 뒷모습 때문이었다.

그걸 죽일 듯이 노려보던 그가 소리 없이 절규했다.

으아아! 젠자아앙!

부글부글 끓는 속에서 온갖 짜증과 분노가 수증기처럼 뿜어져 나왔다.

이번에야말로 멋지게 활약하는 모습을 보여 주리라 마음먹었는데!

무도회나 사교제를 같이 갈 수도 없으니, 최소한 이런 때만큼이라도, 어?

저 빌어먹을 두 놈들이 갑자기 나타나는 바람에, 계획이 산산조각 나 버렸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서 밝게 내리쬐는 햇빛마저 원망스러웠다.

그 속에서 레어넌 단장의 금발은 더더욱 눈부시게 빛났고, 펠리어트 공작의 잘생긴 옆모습은 장인이 다듬은 조각처럼 돋보였다.

하지만 정작 자신은 혼자 복면으로 얼굴을 꽁꽁 싸매고 있어야 하는 점도 불만스럽기 그지없었다.


“……후.”

카셀은 칼날 같은 눈초리를 거두지 않고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순간, 시선을 느끼기라도 한 건지 펠리어트 공작과 레어넌 단장이 차례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야, 야. 진정 좀 해.”

아까부터 불안한 눈빛으로 곁을 지키던 시드가 조용한 목소리로 말하며 카셀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저 도도하신 귀족 나리들께서 음흉하게 뒤에서 로렐라의 행적을 좇았다는 걸 진즉에 알았더라면, 무슨 수를 써서든지 막았을 텐데.

……북부의 다리를 폭파하거나, 성기사단 관저에 흑마법사 수십 명을 풀어서라도!

카셀이 속으로 아쉬움을 삼키며 이를 갈던 그때였다.

저 멀리서 이쪽을 향해 맹렬히 다가오는 무리가 눈에 들어왔다.

뿌연 흙먼지와 함께 거뭇거뭇한 그림자가 마치 커다란 파도처럼 일렁였다.

정체가 뭔지 명확하진 않았지만, 한 가지만은 확실했다. 그 어느 때보다도 위협적이다.


“대열을 유지해라!”

시엘로 단장의 고함이 울려 퍼진 동시에 모두가 재빨리 무기를 빼 들었다. 붉은 늑대 기사단과 성기사단의 손에도 어느새 날카롭게 벼린 검이 들려 있었다.

하지만 그 무엇도 이채를 띤 카셀의 눈동자만큼 빛나진 않았다.

수십 마리의 짐승이 일제히 울부짖었다. 사방에 울리는 사나운 포효에 귀가 먹먹할 정도였다.


“어라, 저것들이 왜……?”

카셀의 곁을 단단히 지키던 시드가 순간 어리둥절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달려오던 무리가 이리 떼라는 건 진작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들과 함께 너울거리는 검은 존재들이 무엇인지는, 눈앞에 가까워지고 나서야 비로소 파악할 수 있었다.

그건 다름 아닌 사령들이었다.


“저놈들이 같이 공격을 해 온다고……?”

시드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는 길드 내에서도 각종 마물이나 괴물에 대한 지식이 가장 뛰어난 사람이었다. 거기다 카셀의 심부름을 하느라 고원에 드나든 적까지 있었고.

그래서 시드에게 지금 이 현상은 너무나도 괴이하게만 느껴졌다.

크기가 집채만 한, 짐승이라기보단 괴물에 가까운 이리 떼와 텅 비어 버린 혼이나 마찬가지인 사령들이 합심하여 공격을 가한다는 건 듣지도 보지도 못했다.


“조심해, 카셀.”

시드가 본능적으로 카셀의 앞을 막아선 그때였다.

휘익!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카셀의 망토가 펄럭이며 순식간에 하늘을 가렸다.


“……어?”

갑자기 말 위에서 날아오르듯 도약한 카셀에게 모두의 시선이 꽂혔다.

반짝.

후드가 벗겨지며 그의 은발이 햇빛을 받아 눈부시게 빛났다.

카셀은 마치 날렵한 새처럼 공중에서 크게 한 바퀴 공중제비를 돌더니, 그대로 가볍게 땅 위에 착지했다.

……정확히는 로렐라의 앞으로.


“…….”

로렐라는 입술을 살짝 벌린 채, 곡예를 부리며 등장한 카셀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건……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훗.”

이 상황이 마음에 들었는지 카셀의 입가가 위로 비스듬히 올라갔다.

한쪽 다리를 옆으로 길게 뻗은 채, 어느새 멋지게 검까지 뽑아 들고 포즈를 취하는 듯한 모습이 참으로…….


‘창피해.’

시드는 저절로 오그라드는 손발을 억지로 피려 노력하며 입술을 꾹 깨물었다.

저놈의 관종 진짜…….

이런 생각을 한 건 저뿐만이 아닌 게 틀림없었다. 함께 있던 길드원들 역시 얼굴을 손으로 가린 채 고개를 들지도 못하는 걸 보면.

하지만 카셀은 일행이 그러거나 말거나 몸을 일으켜 뒤로 돌았다.

그러고는 로렐라와 마찬가지로 저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는 펠리어트와 레어넌을 향해 서슬 퍼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봐.”

순간 레어넌과 펠리어트는 말없이 눈빛을 교환했다.

‘이봐’라니. 우리더러 한 소린가?

……설마. 아니겠지.

하지만 카셀은 아랑곳하지 않고 한쪽 입술을 삐뚜름하게 끌어올렸다.


“이제 아저씨들은 빠져.”

“…….”

두 사람은 물론, 주변에 서 있던 기사들과 심지어는 로렐라조차도 넋이 나간 얼굴로 카셀을 바라보았다.


“미안하지만…….”

레어넌이 눈가를 살짝 찡그리며 되물었다.


“지금 뭐라고……?”

펠리어트 또한 한쪽 눈썹을 까딱였다.


“……아저씨?”

다시 한번 말해 보라는 듯 싸늘하게 가라앉은 눈빛을 한 채로.

하지만 카셀은 천연덕스럽게 맞받아쳤다.


“나보다 늙었으니까 아저씨지.”

복면 위로 드러난 붉은 눈동자에는 숨기지 않은 적대감이 그대로 비쳤다.

덕분에 레어넌은 실소를 금치 못했다.

로렐라가 특별히 호위를 위해 고용한 자라 듣긴 했다. ‘특별히’라는 말에 걸맞게 앳된 얼굴에 비해 남자에게선 범상치 않은 기색이 흘렀다.

하지만 아주…….


‘……건방지군.’

펠리어트도 미간을 구겼다.


‘로렐라는 왜 매번 이런 놈들만 호위로 들이는 거지?’

하지만 카셀은 그들이 그러거나 말거나 검을 번쩍 치켜들었다.


“누나는!”

그러더니 힘껏 외치며 앞으로 달려 나갔다.


“내가 지킨다아아!”

“자, 잠깐!”

당황한 로렐라가 급히 말에서 내렸다.


“위험해……!”

막아 보려 손을 뻗었지만, 이미 카셀은 앞으로 달려 나간 뒤였다.


“카…….”

입술 사이로 저도 모르게 말이 새어 나온 순간, 로렐라는 양손으로 급히 입을 막았다.

레어넌을 비롯한 성기사단원들이 바로 곁에 있는데, 하마터면 카셀의 이름을 소리 내어 부를 뻔했으니까.

그녀의 행동은 조금 부자연스러웠으나, 다행스럽게도 레어넌은 물론 펠리어트도 이 순간만큼은 이상함을 눈치채지 못했다.


‘누나라고……?’

‘로렐라에게 동생이…… 있었나?’

비록 스쳐 지나가긴 했지만, 둘 다 머릿속으로 이런 의문을 품느라고 말이다.

* * *

퍼어엉!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간 유리병이 땅 위에 떨어진 순간, 번쩍이는 섬광과 함께 흰 연기가 삽시간에 사방으로 가득 퍼져 나갔다.


“키에에엑!”

사령들이 기괴한 소리를 내며 모래알처럼 부서졌다.

그와 동시에 카셀의 검이 날렵하게 허공을 갈랐다.


“컹!”

여기저기서 단말마의 비명만 남긴 커다란 이리들의 사체가 땅 위를 뒹굴었다.

그 틈을 타 카셀은 소매 안 주머니에 넣어 놓았던 길쭉하고 작은 병을 재빠르게 꺼냈다.

그러고는 손가락에 하나씩 끼운 병을 몰려드는 사령들을 향해 정확하게 투척했다.

시커먼 먹구름처럼 잔뜩 몰려든 괴물들이 또다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 뒤엔 역시나 무자비한 칼날이 춤추듯 움직이길 반복했다.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동시에 소름 끼칠 정도로 정교하게 계산된 동작이었다.

어릴 때부터 산전수전을 겪은, 그래서 누구보다 실전에 강한 길드장으로서의 면모가 여실히 드러났다.

어느새 놈들이 주춤거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카셀은 인정사정 봐주지 않고 그야말로 돌풍처럼 거침없이 베어 내고, 또 베어 냈다.

그가 지나간 곳에는 피에 젖은 채 땅 위를 뒹구는 짐승의 사체만이 가득했다.

학살이라도 해도 좋을 정도로 무자비한 심판.

카셀을 피해 몇 마리가 일행 쪽으로 달려가긴 했지만, 염려할 만한 수준은 아니었다.

그의 뒤를 따라온 용병들과 기사들이 잔뜩 있었으니까.


“후우.”

어느덧 사위가 고요했다. 산처럼 쌓인 사체를 바라보며 카셀은 피가 묻은 머리카락을 가볍게 쓸어 넘겼다.

자신을 향해 환호성을 지르는 용병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뒤에 서서 못 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길드원들도.

다만, 검 한 번 제대로 휘두르지 못한 레어넌 단장과 펠리어트는 어딘가 모르게 떨떠름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그의 눈길을 사로잡은 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가슴을 쓸어내리는 로렐라였다.

처음으로 좋아하게 된 누나가 예쁜 눈을 반짝이며 오로지 자신만 바라보고 있다니.

정말이지 이것만으로도 온 세상을 다 가진 것만 같았다.


“……헤헷.”

카셀은 참지 못하고 소리 내어 웃었다.

그리고 뿌듯한 미소를 머금은 채 으스대며 걸음을 옮기던 그때였다.


“…….”

그가 저도 모르게 발을 멈췄다.

옆에 쓰러진, 죽은 짐승의 눈알 위로 무언가 새카만 것이 차오르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사지를 파르르 떨어 대기까지…….

설마 아직 숨이 붙어 있는 건가?

무심한 표정으로 다시 한번 목 아래 검을 푹 찔러 넣은 그때였다.


“로렐라…… 메이레드를…… 죽……여라.”

“……뭐?”

비록 찰나긴 했지만, 똑똑히 들었다.

악취를 풍기는 짐승의 주둥이에서, 분명 사람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것도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듯한 음산한 목소리가.

하지만 놀랄 시간은 주어지지 않았다.

그사이 쓰러져 있던 놈의 사지가 점점 더 격하게 움직였다.

순간 카셀의 등줄기를 따라 오싹한 소름이 돋았다.

그는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섰다.

용병들은 짐승의 사체를 등진 채 서 있었다. 이미 죽어 있는 놈들에게 눈길을 주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카셀은 똑똑히 보았다.

그들 근처에 배를 까뒤집은 채 쓰러져 있던 짐승들이 일제히 몸을 휘릭, 뒤집는 광경을.

그리고 그 지척에 서 있는, 아름답게 휘날리는 붉은 머리카락이 눈에 들어온 순간.


“뒤를 봐! 이 멍청이들아!”

카셀의 입에서 벼락같은 고성이 터졌다.

동시에 사나운 포효와 더불어 새카만 그림자가 카셀의 등 뒤를 덮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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