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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화. 지킨다는 것 (159/173)


159화. 지킨다는 것
2023.01.07.



 
일사불란한 말발굽 소리가 점점 더 가까워졌다. 이윽고 흙먼지를 헤치고, 여러 명의 기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던 로렐라는 마구 눈을 비볐다.


‘내가 설마 헛것을 보는 건가?’

그렇게 생각할 정도로 비현실적인 광경이었다.

하지만…….


“단장님의 지시도 없이 나팔을 불지 마라.”

엄한 얼굴로 뒤에 있던 기사를 꾸짖은 남자는, 로렐라도 익히 아는 얼굴이었다. 아주 오래전, 공작저에서 도망칠 때 ‘괜한 일에 연루될지도 모른다’며 레어넌을 만류하던 사람이었으니까.


“죄송합니다!”

빳빳하게 기합이 들어간 목소리로 대답한 기사가 입고 있는 제복 또한 분명 에크레투스 성기사단의 것이었다.

그는 나팔을 옆구리에 낀 채 면목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출정 나갈 때 하던 버릇이 그만…….”

“다음부터는 주의하도록.”

“네, 알겠습니다!”

……역시 잘못 본 게 아니었다.


“소란스럽게 굴어 죄송합니다.”

그들은 매우 깍듯하게 로렐라를 대했다.

그녀는 여전히 멍한 얼굴로 천천히 눈을 돌렸다.

커다랗고 새하얀 말 위에서 꼿꼿하게 허리를 펴고 앉아 있는, 이루 말할 수 없이 늠름한 레어넌 단장에게로.

말에서 가볍게 뛰어내린 레어넌이 너무 놀라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는 로렐라의 곁으로 다가갔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하나로 묶은 긴 금발이 새하얀 정복 위로 아름답게 물결쳤다.


“……단장님.”

그 모습을 보던 로렐라의 입술 사이로 떨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단지 그뿐이었지만, 그 속에는 많은 의미가 함축되어 있었다.

왜 여기 계시는 거예요? 심지어 단원들까지 이끌고?

그녀의 얼굴에 노골적인 의문이 떠올라 있어, 레어넌은 가볍게 헛기침을 하고는, 눈을 내리깐 채 대답했다.


“……순찰 중입니다.”

“네에……?”

로렐라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또 여기서 뵙다니, 이런…… ‘우연’이 다 있군요.”

차마 말을 잇지 못한 채 입술만 뻐끔거리는 로렐라를 바라보며, 레어넌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너무 얄팍한 변명이었나.


‘나팔까지 불어 놓고서?’

비록 소리 내어 말하진 않았지만, 그녀는 이렇게 묻는 듯했다.

어찌 됐든 이미 일은 벌어졌다. 이게 다 미리 주의를 주지 못한 제 잘못이라고 생각하고 넘어가는 수밖에.

레어넌은 입가에 그윽한 미소를 띤 채, 가슴에 얹고 있었던 손을 천천히 내밀었다.

절도 있고 매우 정중한 동작으로.

맑고 순수한 눈빛이 물끄러미 그녀를 응시했다. 그 시선에 눈 맞추던 로렐라는 입술을 한 번 꼭 깨물었다가 그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살포시 올려놓았다.

레어넌의 입가에 기쁜 미소가 피어났다.

그는 그녀에게만 들릴 정도로 나직한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로렐라, 제가 말씀드렸죠. 당신이 절 좋아하든 좋아하지 않든 상관없이 제 마음은 이미 그대 것이라고.”

따듯하고 다정한 눈동자가 아무 흔들림 없이 오로지 로렐라만을 바라보았다.


“그대가 홀로 위험한 곳으로 가려는 걸 지켜보고만 있을 수는 없습니다. 아무것도 묻지 않겠습니다. 그러니…… 부디 함께 가게 해 주십시오.”

투명하리만치 맑은 푸른색 눈동자가 그녀를 응시했다. 그 눈빛이 얼마나 애틋하고 다정한지 지켜보던 용병들이 저도 모르게 시선을 피해 줄 정도였다.

로렐라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말없이 발끝을 내려다보았다.

황량한 고원 너머로 차디찬 칼바람이 불어왔지만, 그녀에겐 따듯한 온기만 느껴졌다.

차갑게 굳었던 양 뺨에도 훈훈한 기운이 차올랐다.


“…….”

결국 그녀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 순간 레어넌은 입술을 꾹 깨물고 말았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그저 얼굴을 붉히고 서 있는 그녀가 너무나 사랑스러웠다.

단 한 순간도 놓치고 싶지 않아 감히 눈조차 깜박일 수 없을 정도로.

그런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는 레어넌의 머릿속에 문득 얼마 전에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단장님. 명령하신 걸 조사하다가 새로운 정황을 포착했습니다.’

 
그날 부하는 두 개의 서류 뭉치를 내밀었다.

하나는 ‘데우스 에번’이라는 가짜 신분을 사용한 정체불명의 남자에 대한 서류였고, 나머지 하나는 바로 로렐라에 대한 것이었다.

레어넌은 당장 로렐라의 서류부터 살피기 시작했다.

거기엔 세이블 릴리가 아예 아우레아에 자리를 잡고서 그녀의 저택에 드나들고 있다는 내용과 로렐라가 시엘로 용병단장과 접촉했다는 사실 등이 쓰여 있었다.

이윽고 두 번째 서류를 집어 든 레어넌을 향해, 부하가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데우스 에번이라는 자에 관련해서는 좀 더 파 볼 필요가 있을 듯합니다. 아직 확실하게 밝혀진 건 아니지만, 아무래도…… 제법 거대한 세력과 연결된 것 같습니다.’

 
과연 부하의 말대로였다.

보고서 속에는 의심스러웠던 부분들에 관한 내용이 제법 상세하게 적혀 있었다. 유능한 성기사 단원들이 그 어느 때보다도 심혈을 기울여 조사한 결과였다.

레어넌 역시 어느 정도는 짐작하고 있던 일이었다.

신분을 조작한 것도 모자라, 그의 눈을 감쪽같이 속여 넘긴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니까.

하지만…….


‘저는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요. 그러니까 단장님의 마음에 응할 수 없어요.’

 
자신과 똑바로 눈을 맞추지도 못하면서, 마음만큼은 그 어느 때보다도 확고하게 전하던 로렐라의 모습이 생생했다.

그녀가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건 아마도…….


‘그자겠지.’

 
부드럽게 흔들리는 갈색 머리와 한여름의 신록 같은 녹색 눈동자를 지닌 남자.

레어넌은 입술을 꾹 한번 깨물고는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섰다.

그러고는 부하를 향해 나직한 목소리로 명했다.


‘중지해.’

‘네……?’

‘오늘부로 ‘데우스 에번’에 대한 조사는 전면 중지한다.’

 
다시 한번 또박또박 힘주어 이야기했으나 부하는 여전히 믿기지 않는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하, 하지만 단장님. 조금만 더 하면 분명히…….’

 
레어넌은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고개를 저었다.

결국 명령을 받들기는 했으나, 부하는 끝까지 아쉬운 얼굴로 집무실 밖으로 나갔다.

그 뒤 혼자 남은 레어넌은 ‘데우스 에번’에 대해 조사했던 모든 자료를 그대로 벽난로 속에 던져 넣었다.

활활 타오르는 장작불을 보며 레어넌은 다짐했다.

제가 아닌 누군가를 사랑하는 마음까지 포함해, 로렐라의 모든 것을 평생토록 지켜 주겠노라고.

그 굳은 다짐을 떠올리던 그때였다.


“내가 늦었군.”

뒤에서 검은 그림자와 함께, 낮디낮은 음성이 들려왔다.

* * *



“어, 어……?”

겨우 진정하고 평소의 얼굴로 되돌아간 로렐라가, 다시금 눈을 크게 떴다.

검은 갈기를 휘날리며 투레질을 하는 흑마 위에서, 한 남자가 날렵하게 내렸다.


“펠리어트……?”

대답 대신 붉은 자수가 놓인 검은 망토가 눈앞에 펄럭였다.

반듯한 이마 위로 흐트러져 내린 머리카락은 물론, 깊고 그윽한 눈동자 역시 흑요석처럼 새카맸다.

그의 뒤로는 검은 투구를 쓴 기사들이 말에서 내려 열을 맞춰 반듯하게 섰다. 그들에게선 보기만 해도 괜히 식은땀이 흐를 정도로 살벌한 기운이 풍겨져 나왔다.

로렐라는 그들이 누구인지 잘 알고 있었다.

검은 투구 위에 달린 붉은 술. 바로 붉은 늑대라는 별칭으로 불리는, 북부의 최정예 기사단이었다.

펠리어트는 무감한 눈빛으로 주위를 한 번 둘러보았다. 별것 아닌 움직임인데도, 순식간에 공기가 서늘하게 가라앉는 듯했다.

몇몇 사람이 저도 모르게 숨을 죽일 정도였다.

물론 이 역시도 로렐라에게는 너무나도 익숙한 일이었다.

이윽고 펠리어트가 천천히 로렐라의 곁으로 다가왔다.

차가운 눈빛이 그녀의 곁에 서 있던 레어넌에게로 꽂혔다.

순간 그의 잘생긴 눈썹이 꿈틀거렸다.

하지만 그뿐.

펠리어트는 이내 로렐라와 조용히 눈을 맞추었다.

방금까지만 해도 차갑게 얼어붙어 있던 그의 눈동자에 희미한 온기가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공작님, 오셨습니까.”

그때 시엘로 용병 단장이 재빠르게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군.”

“아닙니다.”

이 짧은 대화에서 로렐라는 시엘로 용병 단장이 계속 미적거렸던 이유를 유추할 수 있었다.

펠리어트가 이곳에 모습을 드러낸 사실 자체는 그리 놀랍지 않았다.

그는 용병단과 친분을 유지하고 있으니까, 로렐라가 그들을 다시 한번 고용했다는 소식을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었겠지.

하지만 최정예 기사단인 붉은 늑대를 대동한 건 어째서일까.


“비록 북부에 갇혀 있다시피 하지만 내게도 눈과 귀가 있으니까.”

마치 로렐라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펠리어트가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


“당신을 습격했던 자들이 아델리움에서 자수했다지. 공교롭게도, 그 후에 왕궁이 폭파되었고.”

여전히 한기가 들 정도로 차가운 목소리였다. 하지만 로렐라를 바라보는 펠리어트의 눈빛만큼은 다정하고 따듯하기 그지없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의문투성이더군. 다만, 한 가지만은 확실해. 아무래도 당신은…… 내 생각보다 훨씬 더 위험한 일에 연루된 것 같아.”

“그, 그게 그러니까…….”

“그걸 알게 된 이상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었어.”

로렐라의 눈동자가 일순 흔들렸다.

무슨 말을 꺼낼 것처럼 입술을 달싹이다가, 또다시 소리 없이 꾹 깨무는 것을 반복했다.

그녀의 모든 움직임, 심지어는 속눈썹 한 올이 떨리는 것까지 놓치지 않고 모조리 눈에 담던 펠리어트는 순간 심장이 또다시 쪼개어지는 듯했다.

제 앞에서 당황한 채 무언가를 저어하는 그녀의 모습에서 예전의 기억이 떠올랐다.

저와 눈조차 제대로 마주치지 못한 채 머뭇머뭇 이혼 서류를 내밀던 순간이.

만약 그때 조금만 달랐더라면, 지금쯤 아주 많은 것이 변해 있었을까.

또다시 먹먹한 후회와 아픔이 차올랐다.

하지만 펠리어트는 얼른 그 마음을 숨겼다. 고통과 후회를 견디는 것은 언제까지나 자신의 몫이어야만 하니까.

안 그래도 서늘한 눈빛이 더더욱 잘 벼려진 칼날처럼 날카롭게 변했다. 약함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더욱 무뚝뚝하게 굳힌 표정은 차갑기 그지없었다.

그가 다정하게 미소 지을 때는 오로지 로렐라를 보고 있을 때뿐이었다.

펠리어트는 로렐라를 향해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그러고는 흔들림 없는 낮은 목소리로 조용히 속삭였다.


“북부는 여전히 한파가 몰아치고 있지만, 사람들은 벌써부터 다가올 봄을 맞이할 준비가 한창이지. 북부 영지민이 봄을 어떻게 맞이하는지 아나?”

다소 뜬금없는 이야기에 로렐라는 가만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자 그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스몄다.


“꽁꽁 얼어붙은 땅을 파 돌을 미리 골라놓는 거야. 봄이 오면 바로 씨앗을 심을 수 있게. 하지만 봄은 너무나 빨리 스쳐 지나가지. 그래서 우린 봄을 맞이한다는 말보다 봄을 지켜 낸다는 표현을 더 많이 써.”

말을 마친 그는 몸을 숙였다. 경악한 사람들의 시선이 꽂혔지만, 펠리어트는 아랑곳하지 않고 로렐라의 발아래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러고는 그녀의 손을 꼭 잡은 채, 애절하게 속삭였다.


“제발 나의 봄을 지킬 수 있게 해 줘.”

너무나도 절절한 목소리였다. 로렐라는 마음속 깊은 곳까지 내달리는, 무어라 정의할 수 없는 감정을 억누른 채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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