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8화. 내가 안 지켜 주면 누가 지켜 주는데? (158/173)


158화. 내가 안 지켜 주면 누가 지켜 주는데?
2023.01.04.


세이블이 돌아가고 난 뒤에도 나는 오랫동안 서재를 떠나지 못했다.

생각할 게 있으니 방해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한 터라, 하녀들이 미처 치우지 못한 찻잔이 테이블에 놓여 있었다.

깔끔하게 비워진 잔을 보니 아까 세이블이 반복했던 행동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눈시울이 붉어질 때마다, 급히 찻잔을 들던 그 행동 말이다.

아마 그러면 내게 들키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 모양인데, 내 눈에는 너무나도 잘 보였다.

게다가 세이블이 무슨 마음으로 내게 ‘모든 것을 동원해 날 지켜 주겠다.’라고 했는지도 알고 있었다.

그때 그녀의 눈에 얼핏 스쳐 지나간 감정을 읽었기 때문이었다.

세이블은 의연하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쓸쓸해 보이는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아마 자신은 곧 소멸되리라 생각한 거겠지.

하지만 난 절대로 세이블이 소멸하도록 내버려 둘 생각은 없었다. 아니, 세이블뿐만이 아니라…….


‘억울하게 사라진 다른 모든 후보의 삶도 되찾아 주고 싶어.’

아주 오래전부터 줄곧 잊지 않고 있었던 목표였다.

마음을 다잡은 나는 가장 아래쪽 책상 서랍을 열어 네모반듯하게 접힌 커다란 지도를 꺼내 들었다. 내가 직접 이것저것 표시해 놓은 마엘라 고원의 지도였다.

고원으로 가야겠다는 계획은 예전에 세워 두었다.

아델리움 왕궁에 폭발이 일어나기 전부터.

샬로네즈와의 싸움을 피할 수 없다면, 적어도 장소만큼은 내가 정해야 했다. 그녀가 한 번도 접하지 못한 곳이어야 승산이 높아질 터였다.

할 수 있는 만큼 최대한 준비는 갖추었지만 여전히 불안했다. 샬로네즈는 절대로 만만한 상대가 아니니까.

그녀는 주인공 후보들 교묘히 납치해 끔찍한 일을 벌인 악인인 동시에 한 나라의 왕녀였다.

왕녀로서의 샬로네즈는, 나라를 살필 줄 알고 영리하게 판세를 읽을 줄 알았으며, 왕실의 신뢰를 한 몸에 받았다.

그건 그녀가 단순히 왕녀라는 지위를 누리기만 한 게 아니라, 그 이상의 일을 해 주었다는 뜻이나 다름없었다.

그런 그녀가 스스로의 손으로 왕궁을 부수다니.

그 마음에 얼마나 지독한 독기와 원한이 서려 있는지는, 굳이 상상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아마 자신이 가진 모든 수단을 총동원해 나를 없애려 하겠지.

그러니 더더욱 고원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행여나 저택에 침입하기라도 하면 조이나 집사가 다칠지도 모르니까. 다른 건 몰라도 무고한 사람들이 다치는 일만큼은 막고 싶었다.

다만, 나 역시 위험을 감수해야 하므로 최소한의 보호 장치는 필요했다.

가장 먼저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나와 함께 고원에 갔던 시엘로 단장이 이끄는 용병단이었다.

각종 위험에 누구보다 단련이 되어 있는 사람들인 데다가, 입도 무거우니 이보다 더 믿음직스러운 동료는 없었다. 여전히 북부에 머물고 있기도 했고.

시엘로 단장은 조심스럽게 보낸 나의 서신에 빠르게 답신해 주었다.

거친 편지지에는 내 부탁을 흔쾌히 수락하겠다는 짧은 답변만이 쓰여 있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깐깐하게 따지고 들던 예전과는 완전히 달라진 태도였다.


‘그럼 이제 남은 건…….’

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소파 테이블로 다가갔다. 그 위에는 검은 천에 쌓인 기다란 물건이 놓여 있었다.

천을 풀자 붉은색을 띠는 고급스러운 가죽으로 만든 검집이 보였다.

스르릉.

손잡이를 단단히 잡은 채 힘주어 뽑으니, 서늘한 소리와 함께 새파랗게 날 선 검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 검에는 마력이 스며 있어. 예전에 누나에게 만들어 준 화살처럼 말이야.’

 
얼마 전 직접 이걸 가져다준 카셀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비록 검술에 서투르다 해도 목표로 한 상대를 얼마든지 해칠 수 있다는, 그야말로 살의로 차 있는, 잔혹한 무기.

하지만 내게는 그 어느 때보다도 필요한 것이었다.

죽이지 않으면, 죽을 테니까.

나는 크게 심호흡한 뒤 검을 든 팔을 앞으로 뻗어 보았다. 무척이나 가벼우면서도 날카로웠다.

잘 벼린 날에서는 엷은 보랏빛이 일렁이고 있었다. 카셀이 말한, 검에 덧씌워져 있다던 마력이 틀림없었다.

그 힘 때문일까.

순간 눈앞이 희미하게 흐려진다 싶더니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마음속에 사납게 휘몰아쳤다.

이대로 검을 휘둘러 당장 무언가라도 베어 버리고 싶은 욕구가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마른침을 삼키며 손에 꽉 힘을 준 그때였다.

어디선가 바람이 불었다. 길게 늘어뜨린 머리카락이 살랑거리며 움직였다.

어느새 내 옆에 붉은 자수가 놓인 검은색 정복 차림의 위너드가 서 있었다.

잔뜩 긴장하고 있었던 탓일까. 좋아하는 사람의 얼굴을 마주했는데도 어쩐지 웃을 수가 없었다. 두 눈은 물론이고 입가마저 딱딱하게 굳은 느낌이었다.


“…….”

그저 뻣뻣하게 바라보고만 있는 내가 이상할 텐데도, 위너드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세심한 손길로 정돈해 줄 뿐이었다.

이윽고 그는 씩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이리 줘 봐.”

평소와 똑같은 다정한 미소를 보니 긴장이 풀리는 듯했다.

조심스럽게 검을 내밀자, 그가 장갑 낀 손으로 그것을 받아 들었다.

내 눈높이에서 오른손을 쫙 펴 보이더니, 그대로 천천히 손잡이를 휘감았다.

그대로 검 끝을 아래쪽으로 향하게 하고는, 내게 가볍게 신호했다.


“잘 봐.”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팡! 하는 파열음이 들렸다. 잘 벼린 검날로 마치 허공을 베어 내려는 듯 재빠르고 유려한 동작이었다.


“다시 한번.”

그는 몇 번이고 반복했다.

나는 행여나 놓칠세라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그의 동작을 모조리 눈에 남았다.


“자, 이제 해 봐.”

나는 검을 받아들고는 위너드가 보여 준 대로 천천히 따라 했다.

처음에는 조금 버벅거리긴 했지만, 위너드가 내 손을 감싸쥐듯 잡은 채로 몇 번이고 가르쳐 준 덕에 제법 능숙하게 검을 쥐게 되었다.

어느새 이마에 구슬땀이 배어났다.

팔을 휘두르자 이젠 처음의 바람 빠진 소리가 아닌, 제법 날카로운 소리가 났다. 물론 위너드가 했던 것과는 많이 다르긴 하지만, 그래도 나쁘지 않은 발전이었다.


“바로 그거야. 잘하네.”

손에 익고 나니 아까보다 한결 자세가 편했다. 게다가 칭찬까지 더 해져, 검을 휘두르는 팔에도 자연스레 자신감이 실렸다.

기분이 좋아져 환히 웃고 있는데, 나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는 위너드와 시선이 맞닿았다.

그의 눈동자는 너무나도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얼굴이었다.


“……왜 그래?”

“아무것도 아니야.”

깜짝 놀라 나도 모르게 물었지만, 위너드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입꼬리를 매끄럽게 끌어 올리며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평소와 다를 것 없는 미소임에도 어쩐지 영 마음이 쓰인다.

나는 재차 묻는 대신, 그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백 마디 말보다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는, 아름다운 녹색 눈동자를.


“방 안에서 휘두르다가 다칠까 봐.”

위너드는 웃으며 내게서 검을 가져가더니 검집에 얌전히 넣었다. 그러고는 슬그머니 두 팔을 내 등에 둘렀다.

그가 깊이 숨을 들이쉬자 단단한 흉곽이 크게 부풀었다 이내 가라앉는 게 보였다. 무언가를 꾹 눌러 참는 듯한 느낌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어쩐지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아마도 내게 이런 식으로 검을 가르쳐 주고 싶지 않았던 거겠지.

괜찮다고 말하려 했으나 할 수가 없었다.

그가 나를 품 안에 숨 막히게 끌어안았기 때문이었다.


“로렐라.”

심장을 녹일 만큼 부드러운 목소리가 귓가에 내려앉았다.

길고 수려한 손가락이 내 눈가와 뺨, 그리고 입술을 조심스레 쓸어 주었다. 세심하면서도 어쩐지 집요한 손짓이었다.


“잊지 마. 반드시 네 곁에는 내가 있다는 걸.”

위너드가 고개를 숙여 조심스레 내 이마에 자기 이마를 맞댔다. 따스한 온기가 피부를 간질였다.

나는 대답 대신 고개를 가만히 끄덕였다.


 

* * *

오랜만에 만난 시엘로 단장은 내게 인사를 건넨 이후 좀처럼 말을 잇지 못했다.

고원에서 갖은 고생을 할 때도 언제나 호탕하고 남자다운 면모를 잃지 않던 그였는데, 지금은 티 나게 황당한 눈빛으로 그저 이쪽을 물끄러미 바라볼 따름이었다.


“그…….”

내 주위에 포진한, 복면으로 얼굴을 가린 수많은 사람 때문이 틀림없었다.


“호위 기사가 예전보다…… 많이 늘었군요.”

“조, 조금 많긴 하죠?”

“예에…….”

나는 어색하게 웃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복면을 두른 채 내 뒤에 선 사람들은 전부 검은 뱀 길드원들이었다.

카셀은 물론이고 저택과 길드를 오가며 나를 호위하던 아델, 심지어 카셀의 오른팔인 시드까지.

나는 얼마 전 일을 떠올렸다.

정확히는 샬로네즈를 맞닥뜨릴 장소로 고원을 선택했다는 이야길 듣자마자, 벌떡 일어나 누구보다도 열심히 짐을 챙기던 카셀을.

각종 마도구를 자루에 쓸어 담듯 담는 그를 만류해 보았으나…….


‘내가 누나를 안 지켜 주면 누가 지켜 주는데? 응?! 또 어떤 자식이 나서게 하려는 거냐고!’

 
카셀은 눈물까지 글썽이며 목소리를 높였다.

심지어는 어디선가 줄을 가져와서는 나와 본인의 손목을 칭칭 얽기까지.

데려가 주지 않는다면 이대로 영원히 풀어 주지 않겠다며 막무가내로 우겼다.

결국 시드까지 나서서 사람 하나 살리는 셈 치고 제발 카셀을 데려가 달라며 빌었다.

사태가 이러니, 결국은 내가 두 손 두 발 다 들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그편이 주식 창에서 일어난 폭동을 잠재울 수 있을 듯했고.

……오로지 카셀에게만 울고 웃으며 반응하는 그 주주 말이다.

카셀이 직접 나서는데, 다른 길드원들이 가만있을 리가 없었다. 너도나도 함께 가겠다며 들고 일어났다.

결국 나는 그들을 포도알처럼 주렁주렁 매단 채 시엘로 단장을 만날 수밖에 없었다.


‘제발 사고 치지 말아야 할 텐데.’

솔직히 말해 다들 도통 어디로 튈지 모르는 사람들이니까.

하지만 내 바람이 무색하게도, 도착한 지 5분 만에 사고를 쳤다.

……그것도 다름 아닌 카셀이.

부단장인 자켈을 보고 반가운 목소리로 ‘형님!’ 하고 외치는 게 아닌가.

시드가 황급히 저지하긴 했지만, 부단장 자켈은 눈썹을 살짝 찡그린 채 눈만 빼꼼 내놓은 카셀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무척이나 석연치 않은 표정으로.

그가 나 몰래 신입 용병으로 위장해 고원까지 따라왔던 카셀을 유독 귀여워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고원에서 자취를 감춘 신입이, 사실은 어마어마한 현상금이 걸린 길드장이라는 걸 알면 어떻게 될까.

상상한 순간, 나도 모르게 오싹해졌다.

저 머리는 내 거라며 온갖 무기를 들고 달려드는 용병들의 모습이 눈앞에서 그려지는 듯하다.

이 시한폭탄 같은 길드장을 안고 가는 게 과연 잘하는 짓인지 잘 모르겠네…….


“……하.”

나는 한숨을 크게 내쉬고는 용병단 사람들을 향해 고갯짓했다.


“그럼 갈까요?”

먼저 몸을 돌렸는데, 용병들의 행동이 영 굼떴다.

심지어는 시엘로 단장마저 움직이지 않고 자리에 그저 멀거니 서 있을 뿐이었다.

……뭐지?

어쩐지 이상해서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왜 그러세요?”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왜요? 혹시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아뇨. 그런 게 아니라…….”

단장은 여전히 말을 아꼈다.

궁금함을 참지 못해 그를 채근하려던 때였다.

등 뒤에서 갑자기 전쟁 때에나 쓰는 우렁찬 나팔 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다.

소리가 들린 쪽을 향해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린 순간이었다.


“……어?”

나도 모르게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