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화. 금방 돌아올게
(157/173)
157화. 금방 돌아올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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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7화. 금방 돌아올게
2022.12.31.
밧줄처럼 목을 죄던 붉은 오라가 사라졌다.
“헉.”
샬로네즈는 급하게 숨을 들이쉬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파들파들 떨리는 손으로 목을 매만진 순간,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붉게 충혈된 눈에서 눈물이 주륵 흘러내렸다.
하지만 그런 왕녀를 내려다보는 에르헨의 눈은 차갑기 그지없었다.
시선을 마주하자, 수십 개의 칼날이 자신을 겨누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
시퍼렇게 날이 선 살기가 전신을 감쌌다. 샬로네즈는 뻣뻣하게 굳은 입술을 움직여 참았던 숨을 조금씩 내뱉는 것밖엔 할 수 없었다.
에르헨 황제를 직접 만난 건 처음이었다. 하지만 신하들과 외국의 사신들에게서 그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은 있었다.
사람들이 말하는 에르헨은 결코 사납거나 난폭한 황제가 아니었다. 오히려 유순해 보이고, 신하들에게 너그러운 황제라고 했다.
아델리움 왕실에서도 그와 비슷한 인상을 가지고 있었다. 말수가 적은 데다가, 외교에 그다지 능통하지 않은 듯하다는 평가가 지배적이었다.
분명 그랬는데…….
“그가 살아 있는 건 불가능하다. 그럴 수 없어.”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그의 손끝에서 또다시 붉은 오라가 일렁였다.
“물론 그를 기억하는 것도 말이지. 그 이름을 아는 사람은 이 세상에 나 하나뿐이다.”
조금이라도 잘못 움직였다간, 저 흉포한 빛이 그대로 목을 꿰뚫어 버릴 것만 같았다.
“……아니, 이 세상에 나 하나뿐이어야 하지.”
“폐하……! 모든 걸 숨김없이 이야기하겠습니다. 그러니 부디 들어 주십시오.”
샬로네즈가 고개를 바짝 조아렸다. 누군가의 앞에서 이렇게까지 몸을 낮춘 적은 처음이었다.
“그 뒤에 저를 죽이셔도 늦지 않으실 것입니다.”
지저분한 흙바닥에 이마가 닿았지만, 그녀는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지금 눈앞에 서 있는 이자가, 내 마지막 희망이야.’
무슨 수를 써서라도 주인공이 되는 건 저여야만 했다.
오로지 그것만이, 절 무시했던 그 남자를 후회하게 할 유일한 방법이니까.
다시금 입술을 콱 깨문 샬로네즈의 눈이 선뜩한 빛을 발했다.
그녀는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빠짐없이, 아주 상세히 이야기했다.
위너드 황태자를 어떻게 기억하고 있고, 언제 만났으며, 또 무슨 일이 일어났었는지를.
이야기가 이어질수록, 새파랗게 날이 서 있던 에르헨의 눈빛도 점차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윽고 모든 이야기를 마쳤을 때, 그는 떨리는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있었다.
“안내자라고……?”
그의 숨이 거칠어졌다.
“위너드 전하가……. 안내자로 다시…….”
무언가에 크게 북받친 듯, 물기 어린 목소리.
비록 한순간이었지만 분명 그의 목소리에는 후회와 그리움이 담겨 있었다.
설마 내 판단이 잘못되었던 걸까.
“흐…….”
에르헨의 입에서는 우는 건지, 웃는 건지 모를 묘한 소리가 희미하게 새어 나왔다.
샬로네즈는 낭패감을 이기지 못하고 손톱으로 바닥을 긁었다.
그렇게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을까.
낮게 흐느끼던 소리가 점차 잦아들더니, 이내 뚝 멈췄다.
“…….”
숨이 막힐 정도로 무거운 침묵이 그녀의 어깨를 짓눌렀다.
샬로네즈는 고개를 들어 여전히 얼굴을 가린 채 석상처럼 서 있는 에르헨 황제를 바라보았다.
이윽고 손 틈새로 번뜩이는 눈동자가 드러났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숨을 멈췄다.
숨소리조차 내지 않은 채 가만히 서서 소리 없이 눈을 굴리는 모습이 기괴하기 짝이 없던 탓이었다.
잠시 후, 에르헨이 천천히 손을 내렸다.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눈이 허공을 응시했다. 마치 그 앞에 창이라도 떠 있는 것처럼.
곧이어 소름 끼치는 웃음소리가 귓가에 내려앉았다.
에르헨은 여전히 시선을 한 곳에 고정한 채 나직이 읊조렸다.
“시스템의 규칙에 따라…… 안내자는 오로지 ‘징계’만이 가능하다니. 과연, 함부로 죽일 순 없다는 건가.”
에르헨의 입가에 섬뜩하리만치 비릿한 미소가 걸렸다.
“……주인공인 나조차.”
그 순간, 샬로네즈의 온몸에 전율이 내려앉았다. 희고 가느다란 목을 타고 오싹한 소름이 돋았다.
에르헨의 마음속 깊이 자리 잡은 새카만 어둠이 손에 잡힐 듯 보였다.
그래,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황제 폐하…….”
샬로네즈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아니……. 위대한 주인공이시여.”
그 말을 입에 담은 순간, 에르헨의 입술이 가볍게 비틀렸다. 하지만 샬로네즈는 아랑곳하지 않고 아름다운 눈을 휘며 웃었다. 그러고는 뱀처럼 간교하게 속삭였다.
“그 남자는 로렐라 메이레드를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습니다. 게다가 엄청난 능력을 지니고 있지요. 그러나 또 다른 후보인 저한테만큼은 절대 손댈 수 없습니다. 징계를 받게 될 테니까요. 아직 주인공 자리를 놓고 경쟁하는 중이라 가능한 일입니다. 하지만 이것도 곧 끝날지 모릅니다.”
“…….”
“만약 로렐라 메이레드가 주인공이 된다면, 그자가…… 무슨 소원을 빌 것 같습니까?”
에르헨이 순간 눈썹을 꿈틀거렸다.
“반드시 그 둘을 없애겠습니다. 오로지 저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샬로네즈는 굳이 요동치는 분노를 감추지 않고 그대로 드러내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 부디 저를 도와주십시오.”
“…….”
에르헨은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서릿발처럼 얼어붙은 눈빛도 변함이 없었다.
그러나 샬로네즈는 더 이상 초조하거나 긴장되지 않았다.
그의 입가가 가볍게 호선을 그리고 있었으니까.
얼핏 보면 웃고 있는지조차 잘 알 수 없는, 매우 희미한 미소였다.
하지만 그의 눈빛만큼은 어느 때보다도 잔인하고, 아주 날카로웠다.
* * *
레어넌 베르하르트 다음으로 로렐라의 저택에 자주 들르는 사람이 있다면, 아마도 세이블일 것이다.
그녀는 본래 후작가를 비우는 일이 드물었지만, 최근엔 로렐라와 편히 만나기 위해 아우레아에 임시 거처를 마련하기까지 했다.
요즘 돌아가는 상황이 그만큼 급박하고 꽤 심각하기 때문이었다.
“성에 불을 지른 것도 모자라, 아예 부숴 버렸다니…….”
로렐라와 함께 서재에 앉아 길드원이 가져온 보고서를 몇 번이고 읽어 내려가던 세이블이 믿기지 않는다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부순 게 아니라 아예 한쪽을 날려 버렸다니까.”
반면 로렐라는 태연자약한 얼굴로 차를 마시며 정정해 주었다.
세이블은 손에 들린 보고서를 말없이 내려다보았다.
아델리움 왕궁이 폭파로 크게 훼손되었다는 소식은 바다 건너 세실리카 제국에까지 이미 퍼져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샬로네즈 왕녀가 행방불명되었다는 소식 역시도.
“나름대로 머리를 쓴 거겠지. 여러 차례 습격을 받았으니,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왕궁을 빠져나갈 방법은 그것밖에 없다고 생각했을 거야. 실제로도 성공한 듯하고.”
“그럼 샬로네즈 왕녀는 지금…….”
세이블은 말하다 말고 얼른 입을 다물었다.
저도 모르게 이런 이야기를 꺼낸 것이 몹시 후회스러웠다.
“아마 나를 죽이러 오겠지.”
하지만 로렐라는 여전히 담담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자신의 목숨이 위협받는데도 동요하기는커녕, 오히려 세이블의 불안을 위로해 주려는 듯이.
심지어 그녀는 눈이 마주치자 평소처럼 아름답게 웃어 주기까지 했다.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는 없어요.”
세이블이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힘주어 말을 이었다.
“로렐라 님이 뭐라 말씀하셔도, 이번만큼은 절 말릴 수 없을 거예요.”
그녀가 이렇게 말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세이블은 아우레아까지 혼자 오지 않았다. 그녀가 임시로 마련한 거처에는 새카만 옷을 입은 사람들이 수시로 드나들었다. 은밀하게 움직이는 이들이라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띄지 않았지만, 세이블은 그것을 기꺼이 로렐라에게 말해 주었다. 그들이 누구인지도.
“제가 가진 모든 것을 동원해 로렐라 님을 지켜 드리겠어요. 왜냐하면…….”
생애 처음으로 생긴, 소중한 친구니까.
세이블은 못다 한 말을 삼키며 입술을 사리물었다.
부끄럽거나 쑥스러워서가 아니었다.
말로 꺼내면 제 마음을 온전히 전하지 못하고 분위기가 가벼워질 것 같아서였다.
이 마음을 과연 무어라 표현해야 할까.
자신을 배신한 약혼자를 그저 순수하게 사랑했던, 그때의 감정과는 너무나도 달랐다.
그저…… 너무 소중하고 소중해서 잃고 싶지 않았다.
로렐라가 주인공이 되면, 어차피 자신은 소멸할 것이다. 그러니 더더욱 그녀를 위해 모든 걸 해 주고 싶었다.
미력한 도움이나마 그녀를 빛나게 할 수만 있다면.
주식 경쟁에서 끝끝내 벗어나지 못해 후회와 분노를 가득 안은 채 사라지는 것보다, 훨씬 더 가치 있지 않은가?
세이블은 소멸하는 건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 애초부터 복수만이 인생의 전부였으니까.
다만 한 가지 아쉬운 게 있다면…… 주인공이 된 로렐라와 더 이상 만나지 못한다는 것뿐이었다.
이렇게 차를 마시며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거나, 얼굴을 마주한 채 웃는 일도 없겠지.
세이블은 괜히 머리카락을 정리하는 척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러고는 다시 태연한 얼굴로 차를 홀짝였다.
난생처음으로, 뜨겁게 북받친 감정이 하마터면 울컥하고 쏟아질 뻔했다.
“그래서 말인데…….”
그때 로렐라가 조용히 입술을 열었다.
“세이블 너는 여기 남아 줬으면 좋겠어.”
“……네?”
남아 달라니.
로렐라는 여기를 떠날 생각인가?
대체 어디로?
“가만히 앉아서 어서 죽여 주십시오, 할 수는 없잖아.”
로렐라는 상냥한 미소를 띤 채 말을 이었다.
“마엘라 고원으로 갈 거야.”
“거긴…….”
가문의 보물을 찾기 위해 함께 간 곳이었다.
늑대와 이리 떼가 판치는 것도 모자라 사령까지 득시글대는 위험한 곳.
“나야 두 번째지만, 샬로네즈는 처음이잖아. 아마 거기 뭐가 있는지조차 모르겠지. 막을 수 없다면, 어떻게든 힘을 좀 빼 놔야 하지 않겠어?”
“그렇다면 더더욱 제가…….”
“아니. 아까 말했듯 넌 여기 남아 줘.”
“로렐라 님……!”
세이블이 소리 높여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어쩐지 조금 화난 듯한, 동시에 이루 말할 수 없는 애절함이 가득 담긴 눈빛이었다.
그러나 로렐라는 여전히 차분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우레아에는 내게 소중한 것들이 무척이나 많아. 이 저택은 물론이고 여기서 날 위해 일해 준 고용인들, 그리고 레아의 디저트 가게까지…….”
나직한, 그러나 힘 있는 목소리가 세이블의 마음을 울렸다.
“내가 돌아올 곳을 믿고 맡길 사람은 너뿐이거든.”
“…….”
결국 세이블은 주먹을 꽉 쥐고 고개를 끄덕였다.
“금방 돌아올게. 그때 마실 맛있는 차도 미리 주문해 놓고.”
그녀를 향해 로렐라가 태양처럼 환하게 웃었다.
“누구보다도 소중한 친구인 널, 절대로 소멸하게 내버려 두지 않겠어. 그게…… 내가 주인공이 되면 첫 번째로 빌 소원이야.”
단순히 아름답다는 말로 표현할 수조차 없이, 너무나도 눈이 부신 모습이었다.
언제나 차가우리만치 이성적인 세이블의 두 눈에 저도 모르게 맑고 뜨거운 눈물이 차오를 정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