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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화. 영원한 밤 (155/173)


155화. 영원한 밤
2022.12.24.


그저 작은 움직임일 뿐이었다.

그러나 따듯한 손끝이 닿은 순간, 위너드의 마음속에는 그 어느 때보다도 커다란 폭발이 일어났다.

위험하리만치 낮은 신음을 흘린 동시에, 뜨거운 입술이 맞부딪쳤다.


“읏…….”

숨을 들이쉬던 로렐라의 입에서 작은 소리가 새어 나왔다.

하지만 위너드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의 입술을, 그리고 간지러운 숨결을 모조리 집어삼켰다.

모든 것이 생경했다.

이런 자신도, 그리고 이런 감정도.

이미 그녀를 꽉 끌어안고 있는데도 더욱더 깊이 안고 싶었다. 서로의 숨결이 새어 나갈 틈도 없이 닿아 있었으나, 좀 더 맞닿지 못해 애가 탔다.


“위, 위너드…… 잠깐…….”

애원하는 듯한 목소리도 그를 더 부추길 뿐이었다.

떨리는 숨결과 사락거리며 그의 얼굴을 간질이는 부드러운 머리카락, 그리고 입술에 닿은 따듯한 피부까지.

모든 사고와 감각이 그녀에게 사로잡혔다.

고개를 조금 더 내려 어느새 드러난 뽀얀 맨 어깨에 입술을 맞추려던 그때였다.


“아, 안 돼!”

지금까지와는 달리, 로렐라가 그의 어깨를 강하게 밀었다.

고개를 들자 잘 익은 사과처럼 새빨간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순간 정신이 번쩍 든 위너드는 아프도록 이를 사리물었다. 그러고는 재빨리 몸을 일으켰다.


‘……혼자 너무 앞서갔군.’

낭패감과 난처함이 동시에 차올랐다.

그녀에게 원치 않은 불쾌감을 심어 준 게 분명했다. 그는 속으로 이성의 끈을 놓아 버린 자신에게 자책과 원망 서린 욕설을 잔뜩 쏟아냈다.


“…….”

그런데 로렐라의 태도가 어쩐지 이상했다.

그녀는 고개를 푹 숙인 채 허공을 향해 연신 손가락질을 하고 있었다. 저도 모르게 그쪽을 향해 시선을 옮긴 순간이었다.


“아.”

당혹스러운 나머지 위너드의 입에서도 탄성이 터졌다.

둥둥 떠 있는 시스템 창 위로, 어느새 와글와글 모여든 그들이 보였다.

「‘19금의 요정’님이 로렐라 님의 주식을 1,000만 주 구매합니다! 신기록입니다!」

「초록창 좋은 말 할 때 꺼져라, 진짜. 아침짹 하기만 해.」

「‘이 구역 주접킹’님도 눈물을 흘리며 로렐라 님의 주식을 500만 주 구매합니다!」

「주접킹 여기에 잠들다. R.I.P.」

「‘일처다부제’님도 안절부절못하며 로렐라 님의 주식을 500만 주 구매했습니다!」

「언니, 제발요.ㅠㅠㅠㅠ 나 전 재산 털었단 말이에요.ㅠㅠㅠㅠ 그러니 제발 다같살! 뜨겁게 다같살! 그날까지 존버하며 기다릴게요…….」

……충격과 공포의 현장이 따로 없었다.

로렐라는 거의 고개도 들지 못했다. 손바닥에 푹 파묻은 얼굴은, 그가 지금껏 본 것 중 가장 붉은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는 온갖 원망이 서린 눈으로 창을 조용히 노려보았다. 하지만 지금은 로렐라를 살펴야 할 때였다.

이를 꽉 문 채 그녀를 가만히 품으로 당겨 안자, 창피해, 죽고 싶다, 미쳤나 봐, 등등 온갖 울먹이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래, 그녀도 누구보다 많은 이의 사랑을 한 몸에 듬뿍 받는 후보니까. 게다가 ‘그들’은 자신이 원하는 장면이 나올 때까지 가진 것을 아낌없이 쏟아붓는다는 사실을 위너드는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주식을 사 주는 그들이 이토록 원망스럽기는 처음이었다.

역대 최고의 주식이 팔렸지만, 오히려 지금껏 느껴본 적 없는 커다란 상실감이 그를 덮쳤다.

그저 사랑하는 여자에게 누구보다 가깝게 다가가고 싶을 뿐인데.

그 생각을 하니 로렐라를 안고 있던 팔에 또다시 힘이 들어갔다.

낮게 한숨을 흘리며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헤집자, 주주들은 또다시 환호성을 질렀다.

음흉한 희망과 주접스러운 기대가 그야말로 창을 폭파할 기세였다.

아무래도 제가 그녀에게서 얌전히 떨어져야만 멈출 듯했다.

어쩔 수 없지.

위너드는 체념하며 두 눈을 꾹 감았다 떴다.

그러고는 그녀에게서 조용히 물러나려던 그때였다.

띵!

평소와는 조금 다른 묘한 종소리가 울렸다.

「초록창의 깔끔봇이 규칙에 따라 ‘전체 연령가 보호’를 발동합니다.」

갑자기 처음 보는 메시지가 뜨더니 밝은 초록색 빛이 창 위를 뒤덮었다.


“…….”

도저히 영문을 모르겠지만, 아무튼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계속해서 울리던 종소리도, 온갖 주접과 욕망이 가득하던 메시지도 더는 보이지 않았다.


“……뭐지?”

“왜, 왜 그래?”

혼잣말을 중얼거리자 로렐라가 반짝 고개를 들었다.


“아하.”

화면 위에 시선을 고정한 그녀의 입에서 순간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로렐라와 두 눈이 마주쳤다. 여전히 혼란스러운 자신과는 달리, 그녀는 한결 차분해진 모습이었다.


“하긴. 나도 아침짹 때문에 빡친 적이 많았지.”

로렐라는 이렇게 말하며 살짝 멋쩍게 웃었다.

……대체 무슨 소리지?

그 누구보다 그녀를 잘 안다고 자부하지만, 이럴 땐 가끔 전혀 다른 사람처럼 여겨졌다.

하지만 위너드는 더 이상 아무런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런데 지금은 오히려 다행이다.”

로렐라가 이렇게 말하며 가느다란 팔을 뻗어 자신의 목에 두른 탓이었다.


“그렇지?”

유혹적으로 속삭이는 부드러운 목소리와 더불어 곧이어 말캉한 입술이 닿았다.

그 감촉이 불씨가 되어 그의 모든 것을 녹였다.

위너드는 그녀의 입술을 깊게 파고들며 천천히 몸을 내렸다.

영원 같은 시간이 흘러갔다.

어느새 휘영청 떠오른 커다란 달이, 검푸른 하늘 위로 이지러질 때까지.


 

* * *

창문 밖에서 시끄럽게 지저귀는 소리가 들려왔다. 일찍 일어난 새들이 부지런히 날갯짓하며 바쁘게 날아다녔다.

로렐라는 천천히 창가로 다가갔다.

창문을 열자 밤새 내린 차가운 이슬을 흠뻑 머금은 싱그러운 풀 내음이 가득 밀려 들어왔다.

뒤에서는 아침 시중을 들기 위해 찾아온 조이가 바지런히 손을 놀리고 있었다. 하지만 로렐라는 그저 모른 척, 창문 밖만 바라보았다.

물론 그런 일은 없겠지만, 위너드가 방금까지 함께 있던 걸 들킬까 봐 콩닥콩닥거리는 심장을 애써 억누른 채로.


“오늘은 바람이 무척이나 세요. 그렇게 얇은 잠옷 차림으로 춥진 않으세요?”

“응, 괜찮아.”

로렐라는 재빨리 고개를 끄덕이고는 오히려 창문 쪽으로 더욱 몸을 내밀었다.

뜨거워진 얼굴을 남몰래 식히기에는, 이 찬바람이 제격이니까.

아침 목욕을 하고 옷을 갈아입을 때까지도 조이는 다행히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는 듯했다.

아침을 먹는 둥 마는 둥 하던 로렐라는 이내 업무에 집중하겠다는 말을 건네고는 곧바로 서재로 향했다.

침실에서 그랬던 것처럼 서재의 창문을 활짝 열고 기다린 지 얼마나 되었을까.

인기척이 느껴지더니, 긴 머리를 휘날리며 한 여자가 창문을 넘어 서재 안으로 들어왔다.

로렐라와 함께 해적들에게 잡혔던 길드원이었다. 그때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게 마음에 걸린다며, 그녀의 호위를 자처했다.

아델은 로렐라를 보자마자 꾸벅 고개를 숙였다. 로렐라도 간단히 인사를 건네고는, 바로 본론을 꺼냈다.


“전갈은 잘 받아 보았어요. 직접 만나 긴히 할 이야기가 있다고요?”

호위 외에도 각종 정보를 수집하는 게 그들의 임무였다. 그중 특히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정보가 들어오면 이렇게 그녀를 직접 찾아오곤 했다.


“실은…….”

가까이 다가온 아델이 작게 목소리를 낮췄다.


“아델리움에 있는 정보원한테서 연락이 왔습니다. 왕궁에 수상한 사람들이 출몰한다는군요. 심지어 그 숫자가 적지 않은 모양입니다.”

“수상한…… 무리요?”

“네. 삼엄한 경비를 피해 샬로네즈 왕녀에 대한 정보를 은밀하게 캐내고 있다고 합니다. 행동하는 방식이 아무래도 저희와 비슷한 일을 하는 사람들이 아닐까 하는 느낌이 듭니다만…….”

잠시 뜸을 들인 아델이, 이내 다시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왕녀의 수하는 아닌 것 같습니다. 하지만 아직 소속과 신분을 밝혀 내지 못했습니다.”

그 말에 로렐라의 머릿속에 떠오른 건 오로지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혹시, 다른 후보들이 보낸 수하는 아닐까.

지금 아델리움 왕궁 주변에는 그 누구도 쉬이 접근하지 못하는 상태라고 들었다.

샬로네즈 왕녀가 의문의 습격을 당했기 때문이었다. 왕실은 발칵 뒤집혔고, 범인을 잡겠다고 혈안이 된 것은 물론, 주변의 경계까지 더욱 강화했다고 했다.

그야말로 개미 새끼 한 마리 섣불리 지나가지 못할 정도로 살벌한 분위기라고.

이런 와중에도 은밀히 잠입해 왕녀에 대해 캐내려 드는 사람들이 있다니.

답이 너무나도 명확하지 않은가.


‘……그들이 행동을 시작한 게 틀림없어.’

저도 모르게 꼭 쥔 주먹에서 식은땀이 배어 나왔다.


“어떻게 할까요?”

아델의 물음에 잠시 생각하던 로렐라가 이내 단호하게 답했다.


“그들이 어떤 일을 벌이는지 주시하고, 계속해서 보고해 주세요. 단, 절대로 방해해선 안 돼요.”

애써 미끼까지 건네주었으니, 어떤 식으로든 활용해야지.


“네, 알겠습니다.”

즉각 대답한 아델이 로렐라를 향해 목례를 건넸다. 그러고는 나타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마치 유령처럼 소리 소문도 없이 창문을 통해 사라졌다.

* * *



“헉, 허억……!”

한밤중, 샬로네즈는 무언가에 쫓기는 사람처럼 왕궁 복도를 마구 뛰어서 가로질렀다.

그녀의 손에는, 방금 자신의 베개를 꿰뚫은 화살 하나가 들려 있었다.

한데 어찌 된 일인지, 아무리 뛰어도 주변을 지키는 경비병이 보이질 않았다.

내가 지금 꿈이라도 꾸는 걸까? 샬로네즈는 이 상황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목 근처에 난 상처는 그녀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님을 알려 주었다.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어느새 조용히 열린 창문 틈 사이로 뾰족한 화살이 날아들었다. 정확히 그녀를 겨누고.

습격 때 입은 부상이 아직도 욱신거려 진통제를 마시기 위해 몸을 움직이지 않았더라면 틀림없이 목이 꿰뚫렸을 것이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씩이나 이런 일이 벌어졌다. 이게 뜻하는 바는 명확했다.


‘누군가 날 노리고 있어.’

그것도 단순히 위협을 가하려는 게 아니라 진짜로 죽이기 위해서!

검은 해일 같은 두려움이 그녀를 덮쳤다. 하지만 뒤이어 그보다 더 큰 분노가 몰려왔다.

감히 누가 내게 이런 짓을……!

그때, 어두컴컴한 복도 끝에서 마치 기다렸다는 듯 나타난 괴물 같은 인영이 살기 어린 시선에 포착되었다. 샬로네즈가 이를 갈며 외쳤다.


“라그……!”

바로 그녀의 안내자였다.

안내자는 후보를 지킬 의무가 있다. 그게 아니라면 안내자의 꿈도 물거품이 되고 말 테니까.

한데 라그는 그녀를 지키려 들긴커녕, 손가락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설마…… 내가 죽어도 상관없다는 건가?

괴물이 되어 버린 주제에 날…… 포기했다고?

그 말이 사실이라는 걸 보여 주듯, 라그는 한쪽 입술을 비스듬히 끌어 올렸다. 그러더니 연기처럼 사라졌다.

샬로네즈는 우뚝 멈춰 섰다. 한 치 앞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 캄캄한 복도에 갇힌 기분이었다.


“……난 절대로 이대로 죽을 순 없어.”

이 세상의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소름 끼치는 목소리가 적막을 깨고 내려앉았다.


“반드시…… 반드시 먼저 죽여 주마.”

보석처럼 아름다웠던 호박색 눈에 핏발이 곤두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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